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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를 배우는 주부들]민화 배우는 주부 최옥주・유은숙・김진화 씨 민화 안에 내 작은 소망을 그린다
현명한 CEO는 고전에서 답을 찾는다고 합니다. 21세기의 현명한 주부는 전통문화에서 삶의 해답을 찾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되는 것이 고전이라면, 압축된 천 년의 지혜가 바로 전통문화지요. 그저 낡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처음 읽을 때조차 ‘다시 읽는’ 느낌이 드는 우리와 친숙한 문화입니다. 집 안팎에 모래바람, 찬 바람 부는 이 어려운 시절, ‘새삼’ 민화, 가야금, 규방 공예에 빠진 주부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전통문화를 배우면서 가족에 함몰돼 있던 ‘나’를 찾았고, 세상과 어우러지는 옛어른들의 지혜를 덤으로 배웠습니다. 또 이 어려운 시절을 잘 보낼 수 있는 호기로움도 얻었습니다. 이렇게 주부가 행복해지니 그 가정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그 배움이 깊어질수록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다!” 온고지신 溫故知新에 빠진 그들의 행복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북촌문화센터에서 황종미 선생에게 민화를 배우고 있는 주부 최옥주・유은숙・김진화 씨(왼쪽부터).

최옥주・유은숙・김진화 씨는 민화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여자’가 되었다. 꽃 한 송이, 물고기 한 마리를 그리면서도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는 민화 덕분이다. 그림 솜씨보다 값진 수확은 주변 사물과 가족, 그리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마음과 작은 꿈이 생겼다는 점이다.

담 밖에서 기웃거리기만 하면 담은 한없이 높아 보이기 마련이다. 한데 한 번쯤 용기 내어 대문을 두드리고 문턱을 넘어서면 담 너머 세상도 범접하기 힘든 곳은 아니라는 걸, 나도 즐길 수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부가 전통문화를 배우면서 느끼는 기쁨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것이긴 하지만 어렵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선입견,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떨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최옥주・유은숙・김진화 씨 역시 그러했다. 이들은 옛날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민화를 배우면서 전통 그림과 친숙해진 것은 물론, 그림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는 방법을 배웠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별다를 것 없어 기대할 것도 없는 일상의 연속이라는, 주부라면 한두 번쯤 되뇔 법한 넋두리도 이들에겐 ‘해당 사항 없음’이다.
먼 예술이 아닌 복을 부르는 생활 속 그림 북촌문화센터에 들어서니 원색의 색감이며 어렵게 포장하지 않은 그림이 금세 시선을 사로잡는다. 완성을 앞둔 그림에서는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물고기와 흐드러진 모란꽃이 한창이다. 그래서일까. 바깥은 겨울날이건만 세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따뜻하고 유쾌해 보인다.
민화를 배운 지 4년이 되는 최옥주 씨는 우연히 민화 전시회에 들렀다가 그 화사한 색채에 반해서, 2년 차 김진화 씨는 TV 사극에 등장하는 민화를 취미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그리고 1년 차 유은숙 씨는 책가도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에 민화를 배우게 되었다. 고상한 취미 하나쯤 가져보겠다는 사치스러운 생각 때문도 아니고,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을 타고났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눈이 가고 마음이 가서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그림이었다. 저마다 붓을 든 이유는 다르지만 붓을 놓지 않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거창한 예술 이론에 치이지 않아도 되고, 작가의 심오한 의도를 찾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저마다의 소박한 소망을 담아 그리는 실용적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화에 등장하는 꽃, 물고기, 호랑이, 구름, 소나무 등은 각각의 상징과 염원을 담고 있다. 일례로 모란은 부귀를, 석류는 다산을, 호랑이는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민화는 멀찌감치 떨어져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처럼 읽고 즐기는 그림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혜경궁 홍씨가 오래도록 회임을 하지 못하는 중전을 위해 석류도를 그린 병풍을 선물하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민화는 좋은 의미를 담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서 흥미로워요. 그래서 주부들이 더 친숙하게 느끼고, 배울수록 재미가 있어요. 내 삶과 바로 연결 지어 그릴 수 있거든요. 예를 들어 뛰어오르는 물고기는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험이나 승진을 앞둔 사람에게 좋다고 해요. 그래서 두 아이 방에 물고기 그림을 그려서 걸어주었는데, 그림 덕분인지 두 아이 모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었어요. 아이들이나 저나 그림 덕분이라고 공치사를 늘어놓으면서 한 번씩 웃어요. 안방에는 부부 사이 좋으라고 꿩 두 마리가 정답게 있는 화조도를 그려 걸어두었고요. 내가 그렸다는 게 기특해서 매일 봐도 너무 좋아요.” 최옥주 씨는 민화 배운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왼쪽) 민화 공부 4년 차, 2년 차, 1년 차인 최옥주・김진화・유은숙 씨. 자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오른쪽) 먹으로 선을 그리고 여러 번 채색해야 하기 때문에 민화를 그리는 순간에는 집중력과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아래 호랑이 그림은 유은숙 씨의 작품.


유은숙 씨 역시 올해 고3 수험생이 되는 큰아이를 위해 물고기 그림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다. 주부이기에 마땅히 챙겨야 할 가족의 행복과 평안, 자신의 소망을 이들은 공허한 수다가 아닌 민화에 담는다. 복을 부르는 그림이기에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 김진화 씨는 모란도를 그려 지인의 사업 번창을 소망하는 마음을 전하고, 한국 문화에 생소한 외국인에게는 잡귀를 쫓는 호랑이와 복을 부르는 까치 그림으로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마음이 열리다 민화를 배우고부터 별다를 것 없을 것 같던 삶에도 잔잔한 변화가 일었다. 가장 큰 변화는 매사를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민화에 담긴 의미가 모두 희망적이기 때문이리라.
“주변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예전엔 꽃이 피어도 피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이제는 꽃 한 송이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이 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예쁘구나 하면서 모양과 색깔과 향기를 찬찬히 음미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되고요.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그렇게 열리는 걸 느껴요.”
유은숙 씨는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갖게 된 자신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사실 집안일에만 매달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왠지 내가 희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족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버거운 짐처럼 여겨졌던 기억, 대한민국 주부라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밝고 희망적인 민화를 그리고부터는 피곤에 절어 TV 리모컨만 눌러대는 무뚝뚝한 남편도, 크고 작은 일로 잔걱정시키는 아이들도 예뻐 보이더란다. 또 민화 특유의 원색적인 컬러를 하나하나 덧칠하다 보면 심란하던 마음도 만개한 봄꽃처럼 화사해진다고.

“요즘 같은 경제 위기에 끄떡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얼마 전 심적으로 잠깐 힘든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이 모란도를 그리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얻었어요. 민화는 먹으로 섬세하게 선을 그리고 여러 번 채색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한 집중력이 필요해요. 그것이 흐트러지면 그림이 망가지니까 마음을 다잡아 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절로 마인드 컨트롤이 되는 것 같아요.” 모란도의 완성을 앞둔 김진화 씨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새로운 꿈이 날개를 펴다 전에 없던 꿈을 갖게 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세 사람 중 가장 오랫동안 민화를 배운 최옥주 씨는 민화 그리는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두 번 정도 그룹 전시에 참여했는데, 최근에는 자신의 그림만 모아 전시를 하면 어떨까 하는 꿈을 갖게 됐다.
“예전엔 엄두도 내지 못했죠. 그림은 미술 전공하고 유학 다녀온 화가들만 그리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민화를 배우다 보니 이런 꿈도 생기네요. 화가 타이틀을 갖겠다는 게 아니고 그런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열심히 배우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유은숙 씨는 꾸준히 배워온 닥종이 인형과 민화 등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외국인 대상의 문화 콘텐츠 사업을 구상 중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인사동이나 휙 훑고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고 싶은 것. 요즘에는 그동안 만든 닥종이 인형과 민화를 모아 자신만의 갤러리를 열고 싶은 바람도 하나 생겼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어 민화뿐 아니라 가야금도 배운 김진화 씨는 전통문화에 더 깊이 심취하고 싶은 열정이 생긴 듯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예전에는 민화를 보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민화뿐 아니라 다른 그림을 보는 안목도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문화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아갈 때 더욱 매력적이에요. 민화를 통해서 먼발치에서만 봤던 전통에 또 한 걸음 다가가게 되었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글씨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드네요.”
예기치 않았던 인생 계획을 세우며 민화의 재미를 만끽하는 사람들. 이런 소소한 변화야말로 명화를 완성하는 것보다 값진 배움의 열매라는 사실을 이들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민화를 배우고 싶다면 북촌문화센터를 추천한다. 강좌는 매주 1회 3개월 과정이며 수시로 접수가 가능하다. 7개월 정도면 기초를 배울 수 있고, 그 이후부터는 직접 먹선을 그리고 채색까지 완성할 수 있다. 민화 외에도 국악, 서예, 칠보, 한지 공예 등 다양한 강좌가 마련되어 있다. 문의 02-3707-8270

최혜경, 유은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