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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정원사 이동협의 정원 일기 세상 밖의 정원을 만나다
그러니 우리는 겸허해지자. 가능하면 세계가 질주하며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도 영혼의 고요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중략) 제발 서둘러 세계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것이다.-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낸 시간> 중에서
12월이 왔습니다. 댁의 정원 정리는 잘하셨는지요? 제가 말하는 정원은 집 밖의 흙이 있는 정원일 수도 있고, 아파트의 베란다 정원, 옥탑의 스티로폼 박스 정원, 또는 온라인상의 블로그 정원, 그마저 없다면 가슴에 간직한 마음의 정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누구나 정신없이 지나버린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한 해를 계획하게 됩니다. 정원을 서성이는 시간이지요. 올해를 돌이켜보자면, 제게는 정원의 나라 영국과 원예 선진국 일본을 다녀온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정원과 관련하여 동서양을 대표하는 가장 큰 전시 행사인 첼시 플라워 쇼와 도쿄 플라워 쇼를 참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둘은 꽃과 나무를 중심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의 사고방식과 생활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두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세상이 암울하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영국의 자연 정원과 개인 정원은 유럽 대륙의 끊임없었던 전쟁의 역사와 척박한 자연환경, 부실한 식물 자원 등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일본의 실내 정원이나 옥상 정원, 원예 기술의 발전은 거대도시(metrocity)의 콘크리트 같은 무기물적 생활 환경에서 탈출하고픈, 푸른 생명에 대한 갈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전 세계적 금융 위기로 요즘같이 어려운 시대, 물질문명에 의한 영혼의 상처를 단순하고 솔직한 자연에서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첼시 플라워 쇼와 도쿄 플라워 쇼에서 보고 듣고 온 이야기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물론 두 전시 모두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당장 생활에 적용하거나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의 행복한 생활을 상상하며 부담 없이 구경하고 ‘정원 가꾸기’가 새해 설계의 한 조각으로 자리하는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1 일본과 중국의 적극적인 행사 참여로 전시 정원에서도 일본풍과 중국풍을 쉽게 만날 수 있다.



1 영국민의 실질적인 면을 보여주는, 전시 규모에 비해 너무나 소박했던 행사장 출입구.


2 이탈리아식 정원 조성에 필요한 토피어리(생목 조형물) 전시장. 자연스럽게 거래 상담이 이루어지는 규모의 전시다.


3 미술품의 야외 전시장으로 활용 가능하게 설계한 전시 정원.

보통 사람들의 축제, 첼시 플라워 쇼
첼시 플라워 쇼는 세계 최대 규모이자 최고 수준의 플라워 쇼다. 매년 5월 셋째 주 수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단 5일간 열리며 입장객은 약 17만 명으로 제한한다. 8만 원(5월 당시)이라는 만만치 않은 입장료에도 영국민과 전 세계 정원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예약은 3개월 전에 이미 끝난다. 경험해 본 분은 알겠지만 몰려드는 차량과 사람들에 치이다 보면 그 어느 행사도 더 이상 즐거운 구경거리와 축제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첼시 플라워 쇼는 ‘짜증 요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높은 입장료와 입장객 제한으로 전시 전부터 ‘물 관리’를 할 뿐 아니라 행사장에 주차장이 아예 없어 관람객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한다. 불편하지만 주변이 번잡하지 않아 좋다.
봄과 정원 디자인을 전시한다 영국민과 전 세계 정원사들에게 첼시 플라워 쇼는 봄의 제전이자 봄맞이 축제와 같다. 영국의 4월 날씨는 변덕스럽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해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구가 딱 어울린다. 5월이 되어야 비로소 거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에 연녹색 새잎이 돋고 거대한 마로니에 나무에 붉은 꽃이 화사하게 만발한다. 거리에 봄기운이 넘쳐나기 시작하는 바로 이때, 첼시왕립병원 앞 공원에서 첼시 플라워 쇼가 열린다. 봄의 신록과 함께 무엇보다도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은 정원의 트렌드와 미래를 제시하는 견본 정원(showgarden)이다. 이곳에서 정원의 새로운 디자인과 경향, 신품종의 원예 식물을 한자리에서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첼시 플라워 쇼의 차별성이자 세계 최고의 경쟁력이다.
열정과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 첼시 플라워 쇼에는 어린아이가 없다. 따라서 극성스러운 엄마도 없고,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풍경도 없다. 오직 정원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어른들만의 격조 높은 잔치이자 전시인 것이다. 특히 이 전시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관람객의 대부분이 원예 관련 업자가 아니라, 대저택의 정원에서부터 도시 주택의 작은 뒤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자기만의 정원을 열심히 가꾸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 전문적인 전시임에도 이해관계에 얽힌 전문가나 사업가보다 일반 관람객이 많은 것은 정원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과 수준을 보여주는 반증이고, 아름다움에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운 구경거리이자 이 전시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영원한 경쟁력이다.


1 실내 전시장 내 아마추어 정원사를 위한 가든 스쿨.


2 ‘잃어버린 중국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조성한 중국풍 정원.


3 아름드리 마로니에 숲 속에 마련한 야외 휴식장. 흥겨운 경음악 연주와 함께 5월의 봄을 만끽할 수 있다.

풍성한 정원의 재료 첼시 플라워 쇼의 전시 구성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정원 디자인의 흐름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견본 정원과 정원용 장비·용품·가구·소품·약·비료 등 각종 하드웨어로 꾸미는 야외 전시, 정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꽃과 원예 식물의 실내 전시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파빌리온의 실내 전시는 이 세상 정원에 심을 수 있는 모든 꽃을 다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척박한 토양 탓으로 일찌감치 정원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외래종 식물을 수집했다. 영국은 19세기에 ‘식물 사냥꾼’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나라다. 그 ‘명성’에 걸맞게 최대 물량의 다양한 품종을 전시하며, 꼼꼼히 들여다본다면 이 실내 전시만으로도 꼬박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이러한 풍부하고 다양한 정원의 재료는 영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농원에서 생산된다. 농원이라 해서 비닐하우스 몇 동 세운 우리나라의 화원쯤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영국의 유명한 농원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목원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농원은 품종 개량과 생산뿐 아니라 관광 사업까지 연결하는 복합적인 사업체이다. 단 5일간의 전시 기간 동안 1년 매출의 70% 이상을 주문받는다니 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나는 전시인가!
그곳에 대한민국은 없다 런던 히드로 공항 입구에는 한국 대표 기업 삼성의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삼성의 로고는 첼시 구단 축구 선수들의 파란 유니폼에도 선명히 새겨져 있어 가끔 유럽의 축구 중계를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그러나 세계의 정원사와 영국의 가정주부를 가슴 설레게 하는 첼시 플라워 쇼의 정원에는 삼성도 LG도 없다. 대한민국이 없다. 일본과 중국만이 매년 자국 기업이나 이익 단체를 동원해서 참여한다. 정원 디자인에서도 일본풍과 중국풍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영국의 정원 관련 이벤트는 우리나라의 드라마만큼 방송 횟수가 잦다. 기업이나 국가 이미지 홍보를 위해 한국의 정원을 출품한다면 얼마나 격조 있고 근사한 일인가. 빠른 시간 내에 첼시 플라워 쇼에서 대한민국의 풍류와 시심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4 파빌리온(실내 전시장) 내부의 꽃 전시장.


5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게 배려한 어린이를 위한 정원.

영국의 봄은 첼시에서 시작된다 영국에서 정원 사업은 국민적 관심도로 치자면 최고의 사업일 것이다. 우리나라 각 지방마다 대형 할인 매장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듯이 영국에서는 가든 센터(정원 용품 매장)가 꼭 하나씩은 있다. 영국에서 정원은 일상이자 생활이다. 따라서 첼시 플라워 쇼는 봄의 서막을 알리는 축전이자 국민적 관심을 끄는 최대 이벤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주 시절부터 지금까지 개막일에 꼭 참석을 했다. 공영방송 BBC는 개막식을 생중계하며 밤 9시 뉴스는 첼시 플라워 쇼 소식으로 시작한다. 행사 기간 내내 중계 부스를 차려놓고 전시장 소식을 정기적으로 전한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뉴스 같지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전시 목적의 공간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낭만적인 공간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공원 숲 속에서 간단한 식사와 음악을 즐기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5월의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정원을 꿈꾸는 도시민을 위한 배려, 도쿄 플라워 쇼
도쿄 플라워 쇼가 열리는 마쿠하리메세는 도쿄의 외곽 도시 지바에 위치한, 우리나라로 치면 일산 킨텍스 같은 곳. 환승역에서 수많은 정장 차림의 승객들이 전철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일본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짙은색 정장 차림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근처에 꽤 큰 규모의 회사가 있나 싶었다. 이들은 내가 내리는 전철역에서 내려 전시장까지 함께 걸어왔다. 맙소사! 꽃 전시장에 정장 차림의 관람객이라니? 이 의문은 전시장을 둘러보고서야 풀렸다. 도쿄 플라워 쇼는 신기술과 신품종에 관한 정보 제공과 거래 상담, 계약을 목적으로 하는 전시였다.
신제품, 신기술, 신품종 사업자 중심의 전시를 목적으로 해서인지 입장료(일인당 2천 엔) 수익은 기대하지 않는 듯했고 대부분의 내방객들은 초대장에 명함을 붙여 출입증과 교환했다. 그 출입증에는 직종과 직무가 명확하게 기입되어,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마저 줄이게 해놓았다. 개최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올해는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간 개최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플라워 전시지만 첼시 플라워 쇼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함을 바탕으로 전시 내용을 다양하게 갖춘다. 첼시 플라워 쇼가 6백여 개 부스를 운영하는 데 비해 도쿄 플라워 쇼는 디자인 전시 없이 8백여 개 부스를 운영한다.


1 화단을 수직적으로 조성하여 실내 정원의 대안을 제시한 벽면 정원.
2 ‘선토리 블루 로즈 Suntory Blue Rose’로 명명한 파란색 장미. 자연에서 만들어내지 못한 이 꽃은 일본의 위스키 회사가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3 초록색의 세덤 Sedum 잎을 약품 처리해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 절화용 원예 기법.

현실적 대안을 찾아서 영국의 대정원(manor)과 일반 가정의 뒤뜰(private garden)은 영국의 독특한 문화로,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없는 꿈이고 동경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자연을 곁에 두고자 하는 마음은 영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우리나라 사람이나 다 똑같다. 도쿄 플라워 쇼는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옥상 정원, 베란다 정원, 테이블 정원, 포인트 정원, 벽 정원, 실내 텃밭 등을 만들 수 있는 용기와 재료, 흙, 비료, 적정한 식물과 관리 요령까지, 현대 도시민들의 협소한 생활 공간과 부족한 시간까지 배려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파란 장미를 만나다 일본인은 손재주가 좋을 뿐 아니라 침착하고 꼼꼼하다. 이것이 오늘날 기술 대국 일본의 기초이며 이것은 식물학, 원예학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일본이 19세기 중반 유럽과 거래를 튼 이후 영국의 식물 사냥꾼들이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았고 그 결과 수많은 식물 학명에 ‘japonica(일본산의)’라는 단어가 붙게 되었다. 가끔 그 기술의 잔재주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꿈을 현실화하는 놀라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파란 장미는 이번 전시 최대의 이슈. ‘선토리 블루 로즈 Suntory Blue Rose’는 선토리 위스키로 유명한 주류 회사가 거금(2백억 원으로 추정)을 투자해 내놓은 것이다. 2009년 출시할 파란 장미는 그 희소성으로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지구 상의 수많은 이벤트에 사용될 것이 틀림없다.
섬세함의 따뜻함, 부러움 정원을 직접 가꾸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쿄 플라워 쇼를 들여다보면 정원 일의 불편과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제품들이 눈에 띈다. 수요가 별로 많지 않아 대량생산할 제품도 아니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반가운 물건을 만들어낸 이의 섬세한 시각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도쿄 플라워 쇼가 내세울 수 있는 힘이고 경쟁력일 것이다.


1 도쿄 플라워 쇼 전시장. 국제 가든 엑스포와 플라워 엑스포를 동시에 전시한다.
2 재봉틀과 소형 박스 화단을 합쳐놓은 소품용 장식 화단.
3 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꽃장식 스탠드. 꽃과 페트병을 연결하는 부속을 팔기 위한 아이디어지만 도시민을 위한 배려가 숨어 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이동협 씨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최전방 임진강에서 육군 중위로 제대한 후 쌍용건설 국내 건축부, KBS 미술부 무대 디자이너를 거쳐 SBS 미술부 창사 멤버로 일했습니다. 현재는 SBS 아트텍의 전략사업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꿈꾸는 정원사 이동협의 ‘나의 정원 일기’는 blog.chosun.com/ydh208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4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되는 미니 화분. 벽면이나 유리에 부착할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