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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도서출판 박영사 안종만 대표 인생보다 치열한 예술은 없다
갤러리 박영의 개관을 앞두고 도서출판 박영사의 안종만 대표를 만났다. 그림 앞에만 서면 얼굴에 빛이 돌고 나지막이 사랑의 노래를 읊는 남자. 그가 쏟아놓은 것은 그림 예찬이 아닌 인생 예찬이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인생은 예술이다 , 고통을 즐겨라.’


지난 11월 파주출판단지 내에 갤러리 박영이 문을 열었다. 도서출판 박영사의 안종만 대표가 마련한 곳으로 국내 신진 작가들에게 아틀리에를 제공하고 해외 화랑과 교류를 통해 국내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자 한다.


1 가산동의 작품 수장고.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의 수장고를 벤치마킹했다.


2 도서출판 박영사의 사무실 풍경. 벽에 걸린 그림은 랄프 플렉 Ralph Fleck의 작품.

그림 앞에 서면 어느새 그의 표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얼굴에 화색이 감돌고 눈매가 느긋해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랑에 빠진 로맨스 그레이’가 떠올랐다. 그림과 사랑에 빠진 사나이는 바로 도서출판 박영사 안종만 대표.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사무실이었다. 루이스 부르주아부터 나이젤 홀, 린넨브링크, 바스키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시선을 끌었다. 사무실과 편집부를 함께 둘러보며 그림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해주는 그를 따라가다 보니,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미술관을 돌아보는 듯했다.
도서출판 박영사, 일반인에게 친숙한 출판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아주 낯설지만도 않을 것이다. 경영, 경제 또는 정치학 등을 전공하지 않았다 해도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한 번쯤은 접해보았음직한(읽지 않았더라도!) 책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경영·경제학을 전공한 이들에게는 바이블과 같다는 <경영학대사전>이나 <경제학대사전>도 박영사를 대표하는 출판물이다. 박영사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근거 없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출판사와 갤러리의 만남을 떠올릴 때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사회과학 도서와 미술 작품의 만남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의문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은 안종만 씨를 향해 “어떻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3 갤러리 박영의 제4전시실.
4 도서출판 박영사의 안종만 대표.
5 갤러리 박영의 아틀리에에 입주한작가 한지석 씨의 작업실에서 안종만 대표와 함께.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왜, 무엇이 그리 좋으냐 물으면 뭐라 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좋은 거지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죠.” 이어 그는 자연스럽게 박영사의 창업자인 부친(안원옥 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관심과 안목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출판사를 시작하신 그의 부친은 동양화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다. 그 덕에 안종만 씨는 중학생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인사동 화랑을 드나들며 청전 이상범,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등의 그림을 보고 자라는 호사를 누렸다. “자수성가한 이답게 평생을 단벌 신사에 근검절약하며 사셨던 아버지의 그림에 대한 애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요. 아버님은 운보 김기창,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향 선생들과 가까우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지요.”
2008년 11월은 그에게 특별한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준비한 ‘갤러리 박영’이 드디어 개관전과 함께 문을 열었다. 40대 중반에 서양화가 문범 씨의 작품으로 아트 컬렉션을 시작한 이래 20여 년의 숙성을 거쳐 갤러리를 갖추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러나 갤러리 박영은 그의 컬렉션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궁극적으로 그가 추진하는 아틀리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였다. 갤러리 박영은 작가들에게 제공하는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현재 김태중, 낸시랭, 이지현, 이진준, 최진아, 한지석 등 여섯 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다. “작가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종종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고 결심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작업 공간도 제공하고, 갤러리 박영을 통해 해외 갤러리와의 교환 전시 등도 추진해서 작가들을 세계 미술 시장에 알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명함에서 보았던 ‘박영장학재단’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장학생을 많이 키우셨지요. 당신께서 고학을 했던 탓에 어려운 환경의 젊은이들을 많이 도우셨어요.” 그 뜻을 이어 1993년에 설립한 것이 박영장학재단이다. 이 재단을 통해 지원한 학생이 지금껏 8백 명이 넘는다. 그러고 보니 아틀리에 지원 프로그램이나 장학재단의 뿌리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1 지난 11월 파주출판단지에 문을 연 갤러리 박영의 야외 공연장 전경.
2 갤러리 박영의 초입에서 바라본 전경.
3 도서출판 박영사의 가산동 사무실 복도에는 55년간 박영사에서 출판되었던 모든 책들이 한 권씩 진열되어 있다.


갤러리 박영을 이야기하면서 파주출판단지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려면 3박 4일도 모자란다며 말문을 열었다. “유럽에는 책 마을이 정말 많아요. 대표적인 곳이 영국 오웰스 지방의 헤이온와이입니다. 1961년에 리처드 푸시라는 사람이 친척으로부터 극장을 하나 기증받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헌책을 팔았다고 해요. 50년이 지난 지금 20만~23만m에 이르는 마을 전체가 헌책을 파는 헤이온와이의 시작이었지요. 예술인 마을이 프랑스에만 6~7곳, 독일에도 슈투트가르트 등 4~5곳이나 됩니다. 벨기에의 레듀는 헤이온와이를 밴치마킹한 곳이지요.” 파주출판단지의 3인방으로 알려진 열화당 대표 이기웅 씨와 한길사 대표 김언호 씨, 박영사 대표 안종만 씨가 일을 벌인 것은 20년 전. 우리도 예술가 마을, 책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은 그들은 토지개발공사에 조합을 만들고 땅을 분할받아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이 현재의 파주출판단지다. “20년 전만 해도 자유로도 없었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시절이라 파주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아주 먼 곳이었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이후에 자유로도 닦이고 일산도 생기고…” 파주출판단지가 없었다면 갤러리 박영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미술 애호가 이전에 출판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에게 그림이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애인이라면 책은 오랜 시간 동고동락해온 아내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박영사 편집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고를 교정 보는 것으로 처음 일을 배웠다. 졸업을 하고 정식으로 입사한 뒤에는 책을 포장해서 지방으로 발송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가 1970년대 초반이니 그가 책 만드는 일을 시작한 지가 벌써 30년을 훌쩍 넘어 40년을 바라보고 있다. “출판은 시간과 공간을 빠르게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좋은 책은 사회와 문화를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듭니다. 출판업의 매력은 그 자체가 바로 문화 사업이라는 점입니다. 현재는 박영사가 학술 서적 전문 출판사로 알려져 있지만 아버님이 출판을 시작하셨을 때는 문학이나 예술 관련 서적도 꽤 출간하셨지요. 1960년대 초반에는 동양미술사와 서양미술사 관련 서적도 출판하셨고요.” 1950대 중반에 출간했던 김소월 시집 <님의 노래> 초판이 30만 부나 팔렸다 하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갤러리 박영의 개관과 함께 ‘박영북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고 했다. 전문 서적 출판사 이미지가 너무 강해 그동안 박영사에서 출판하기 어려웠던 예술서나 교양서, 동화, 그리고 갤러리 박영을 통해 지원하는 작가들의 작품집 등을 출간할 계획이다.

4 갤러리 박영의 사무실 발코니에서 안종만 씨와 그의 장녀이자 갤러리 박영의 실장인 안수연 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 도서출판 박영사의 가산동 사무실에 마련한 갤러리.


2 박영사의 사무실은 그 자체가 갤러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많은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트 컬렉터로서 그의 컬렉션이 궁금해졌다. “나는 특별한 취향은 없어요. 비구상을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구상은 실체가 정해져 있어서 재미가 없어요. 비구상은 속을 모르겠어요. 내 방에 있는 루페르츠 그림이 무언지 알아요? 여자 나체를 그린 거라는데, 딱 봐서 저게 나체인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추상이라는 것이 사람을 궁금하게 합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다 알 수 없어요. 볼 때마다 달라지기도 하고. 남녀 관계도 그래요. 서로 모르겠고 궁금한 것이 있어야지, 다 알아버리면 매력이 없지요.” 이강소, 박서보, 문범, 정광영, 김웅…. 사무실과 갤러리는 그의 말대로 대부분 비구상 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컬렉션을 시작한 것이 마흔다섯 되던 해예요. 사무실에 있던 초상화 봤지요? 그게 벌써 20년 전인데 사람들이 다 지금이 훨씬 젊다고 해요. 물론 얼굴에 주름도 생기고 머리도 빠지고 늙었겠지만 분위기가 젊어졌다는 거지요.” “얼마 전에 부부 동반으로 홋카이도를 갔어요. 친구들이 모두 골프를 치러 가는데 나는 부인들을 데리고 안도 다다오가 지은 미술관도 가고 좋은 카페도 가고, 일주를 했지요. 옛날에는 나도 골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근데 사람이 이렇게 변합니다. 그는 연달아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세상에 꼭 보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직원들과 해외여행을 가면 자신이 일정을 새롭게 짜게 된다고도 했다. 노천카페에 앉아 아름다운 건축물을 바라보며 하늘과 바람과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행복한지도 이야기했다. 그림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


3 갤러리 박영의 아틀리에에 입주한 작가들과 안종만 대표.


4 갤러리 박영의 제1전시실을 밖에서 바라본야경.
5 안종만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이고리 미토라이 Igor Mitorai 작품.


그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절대 하늘은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며, 사는 동안 고통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니, 피하지 말고 즐기라고도 했다. 인생의 고비와 고통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라며. 지금까지 그 또한 삶이 달콤한 열매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파주출판단지를 조성하면서 좀 더 많은 출판사가 합류하기 위해서는 기반 인프라 확충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출판단지 내에 쇼핑몰을 추진했다. 이제야 은행이 입점하고 대형 브랜드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등 정상화되어가고 있지만 지난 5년간 그가 겪은 경제적·심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그 즈음 선배 하나가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 최고 학벌에 수백억대 재산,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자식을 둔 그가 어처구니없게도 산책길에 발을 헛디뎌 쓰러졌는데, 자식도 못 알아보고 스스로 밥도 못 먹는 상태가 되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그 선배를 보면서 마음을 달리 먹었다. 가진 것이 많다 한들 뭐 할 것인가. 나는 가족도 알아보고 밥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후로 그는 항상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웃는 얼굴로 다녔다고 한다. ‘박영사 부도났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의 얼굴이 좋아지기만 하니 사람들은 의아해했다고.
안종만 씨는 아트 컬렉터이기 이전에 사업가다. 비즈니스맨으로 시간을 잘게 나누어 빈틈없이 써야 하는 만큼 그의 시간에 맞추어 잘게 쪼개진 만남을 가져야 했다. 세 번의 만남에서 그는 세 곡의 노래를 불렀다. 한 번은 가산동 사무실의 갤러리 안에서 부른 제목을 알 수 없는 칸초네였고, 또 한 번은 갤러리 박영의 텅 빈 전시장에서 부른 ‘Can’t help falling in love’였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부른 노래는 ‘애정의 조건’이라는 곡이었다. 처음 그가 노래를 부를 때는 재미있었고 두 번째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세 번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얼굴에서 마침내 행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림과,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사랑에 빠진 로맨스 그레이의 행복을!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