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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한 에세이] 어느 주부의 완벽한 하루
스타벅스도, 마놀로 블라닉도 나오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30대 주부의 하루를 그린 <알링턴 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가 출간됐다. 21세기에 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의 불안과 허탈이 드러난 소설을 읽고, 역시 주부의 삶을 사는 시인이 독후감을 보내왔다.

앞선 차들이 안개의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가 흔적도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액셀에서 발을 떼지 못한 때. 여자에게 결혼이란, 꼼짝없이 안개에 갇힐 때처럼 ‘막아내기엔 늦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삶은 다소간 폭력적이다. 평온한 중산층의 삶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아이처럼 손만 가고 돌아오는 건 없는 그런 부류의 남자들” “그녀의 일생을 하루로 놓고 보았을 때, 엉망이 되어버린 오후 같은 존재, 힘든 집안일 같은 존재” 같은 책 속 표현처럼 결혼한 여자들은 이끼처럼 눈에 띄지 않게 온몸을 던져 자신의 영역을 움켜쥐고 있다. 왜 하필 세상의 영양과 휴식은 이 여자들에게서 나온단 말인가?
<알링턴 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레이철 커스크 지음, 민음사)는 다섯 여자의 하루를 보여준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아, 하루가 마치 한 여자의 일생 같다. 줄리엣, 크리스틴, 어맨다, 메이시, 솔리. 이들은 여자로서 절정인 30대다. 남편은 유능하고, 귀여운 아이들도 있다. 이쯤 되면 그녀들은 완벽하게 행복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난 자꾸 문장 너머 행간을 읽으며, 내 속에 웅크린 ‘그림자 여자들’을 끄집어내는지 모르겠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고독하지만 신비하고 당당해 보인다. 결혼한 여자도 그들처럼 다른 곳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날 수는 없을까? 뺏기지 않은 생기와, 연약하지만 상처 입지 않은 절정의 모습으로. 나는 결혼에 대해 묻는다. ‘실수치고는 가혹하며, 연단을 받는 중이라면 나중엔 얼마나 나은 사람이 돼야 하는가?’

저는 남편이 아주 친절하게 죽여줘서 아픔도 느끼지 못했답니다 총명해서 유명 작가가 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줄리엣. 그녀는 문학 선생님이다. 남편 역시 선생님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줄리엣은 교문을 들어서기 전에는 절대로 학교 일을 생각하는 법이 없지만 남편은 늘 학교 일을 생각한다는 것. 그는 아이를 챙기지 않고 집안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줄리엣과 함께하는 삶에서 달아나 있다. 똑똑한 여자가 평범한 여자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동안 왜 제 소식이 들리지 않는지 궁금하셨죠? 왜냐하면 저는 죽었거든요….사실 남편이 저를 죽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제가 얼마나 조심하며 살고 있는지 보시면 선생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나는 그녀의 편지에다 악플을 단다. “머릿속에 커다란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이물감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도 죽어가는 중일 거야. 아직 자의식이 남아 있는 거라고. 더 이상 고뇌하지 않을 때까지 남편은 당신을 죽일 거야. 남편들은 완전범죄를 꿈꾸지.”

비 오는 날의 무덤 파기, 혹은 너무 평범하게 살아서 받는 죄 어맨다는 남자처럼 일해서 여자처럼 성공했다. 알링턴 파크로 이사 오면서 주부로 안착한 그녀는, 주부로서도 완벽해지기를 희망한다. 3년 동안 골라 1년 동안 수리해서 들어온 집, 깨끗하고 정교하며 그녀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물건인 자동차! 문제는 결혼 생활은 차처럼 군소리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 살았더라면 흰색 가루 음식만 먹으며 정육점 같은 곳에는 갈 일이 없겠지만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사람이든 물건이든 깔끔한 상태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한다. 만약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반격을 가한다. 소파에 낙서를 한 친구의 아기에게 그녀는 속삭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죽여버릴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거미처럼 냉정하다고 느낀다. 그녀가 친정엄마의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더라도 식구들은 “어맨다는 차가워”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어진다. “당신은 빗속에서 흠뻑 젖어가며 당신 무덤을 파는 거야.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하고 싶고, 가장 비싼 집, 좋은 차를 갖고 싶다는 것. 죄라면 그 평범한 욕망이 죄일 거야. 한 번이라도 지금 하는 일을 집어치워 봤어?”

다시 10년 전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줄 수 있어 크리스틴은 목표가 뚜렷했다. 신분 상승. 그녀는 자신의 목표에 맞는 남편을 만났다. 결혼 10년 동안 남편은 한결같았다. 옷 사이즈도, 생활 습관도. 남편이 샤워를 하는 동안, 크리스틴은 8인분의 요리를 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10년 전 남편은 그녀의 삶에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활에 배어 있는 남편의 존재감은 억압의 다른 이름이다.
“똑같이 머무르는 게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변화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받아들여야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 자신이 미래입니다.”
목표를 성취했지만 왜 삶은 조금도 흥미롭지 않을까? 그녀의 삶은 학교와 부엌 사이에 있고, 유일한 일탈은 쇼핑센터다. 변하지 않는 한 남자야말로 그녀의 미래다.
“나는, 가족은 말이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늘 생각했거든.”
혼자 남겨진 크리스틴의 어머니처럼, 그녀도 언젠가 딸에게 이런 한탄을 늘어놓을지 모른다. 문득 손님이 돌아간 뒤 엉망진창인 기분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을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시간이 많지 않아. 당신 아버지가 어머니의 시간을 다 가져가 버렸듯이 남편이 당신의 시간을 가져가 버릴 거야. 당신은 지독하게 손해 보고 살고 있는 거야.”

착하게 낡은 영혼이고 싶지만, 피곤하게 마른 영혼일 뿐 메이시의 관심은 세상의 바깥, 재난으로 고통받는 인간과 환경에 있다. 알링턴 파크로 이사 올 때만 해도 그녀는 따뜻한 관계, 인간적 연대를 꿈꾸었다. 그러나 누구도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에, 이웃의 아이가 유괴됐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착한 영혼이고 싶지만, 무력해진 그녀는 서서히 더 고립된다. 남편은 그녀의 뜻에 따라 이사 와 이직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녀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지는 못한다. 사실은 “이리 와, 메이시!” 사람들이 애완견을 부르는 것처럼, 그녀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늦은 밤, 나는 그녀의 영혼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도심에서 낮 동안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 무자비해. 그 지칠 줄 모르는 활동에는 휴식도 없고 적당한 곳에서 멈추는 일도 없지. 삶의 이야기엔 멈춤이나 휴식이 필요하고, 밤낮의 리듬도 필요하지. 우리는 그게 필요한 거야.”

잃어버린 여성성을 찾아 머나먼 항해를 떠난 햇살 같은 여자 솔리, 그녀도 한때 햇살 같은 여자였다. 탄력 있는 젖가슴도 모유 수유를 하고 나면 늘어진 A컵이 되듯이, 넷째를 임신한 솔리는 수유와 생식을 하는 사이 볼품없어졌다. 방 하나를 세주면서 그녀는 낯선 여자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의 속옷과 화장품을 보며 그 여성성에 압도당한다.
엄마가 되었지만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솔리는 이 모르는 시간과 싸워왔다. 그녀가 그토록 가족에 몰입한 이유는, 가족이야말로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붙들어맬 동아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타고난 남성성을 하나도 손상받지 않은 채이고, 배 속 아기조차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끼면서도!
여자들은 아이를 몸속 자신의 빈 방에서 키워내고, 다시 빈 방이 되고, 다시 또 아이를 키워낸다. 이 생식 본능은 습관일까, 선택일까? 여자에게 임신은 어쩌면 초라한 감자 자루 같지만 사실은 아이들의 사랑으로 가득 찬 쓸모 있는 자루라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다. 점점 낡은 여자가 되어가는 나는 솔리를 찾는다. “자궁은 상처야. 예수님 손바닥의 못 자국 같은. 어쩌면 당신이나 나나 상처를 받을수록 구원이 가까워진다는 걸 믿는지도 몰라. 상처를 보듬는 것, 그런 미련한 짓을….”

모든 구름은 빛나는 모서리를 감추고 있다 오늘이 내일에게 나를 건네주고, 올해가 내년에게 나를 건네주는 그 끊임없는 반복. 그 시간을 들여다보면 완강한 일상 속에서 신기하게도 내가 잘 견디고 있는 게 보인다. 모든 결혼한 여자들은 상처에 담대하다. 늘 상처받지만 상처에 쓰러지지 않는다. “이만큼 사는 게 어디야!”생을 덮은 모든 구름은 빛나는 모서리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캄캄한 하늘 한구석의 저녁노을처럼, 별처럼 갈라지거나 뚫린. 그 모서리는 아마도 출구일 것이다. 줄리엣이 한 시간짜리 문학 수업을 자신의 일주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듯이, 솔리가 아들 셋에 이어 딸을 얻고 눈물을 흘린 것처럼 결국 자신의 인생을 긍정해가는 빛나는 틈. 그 여자들은 아무리 짙은 안개 속에 갇혀도 언젠가는 통과할 거라는 믿음 하나로 액셀을 밟는다. 헛똑똑이 줄리엣, 속물 크리스틴, 야멸찬 어맨다, 회의주의자 메이시, 헌신적인 솔리. 쇼핑센터에서 학교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그저 그런 여자들. 그러나 말이다, 그 여자들의 내부에는 빛나는 모서리가 있다.

김수영(시인) ,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