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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 씨, 새 박사 윤무부 씨가 추천하는 초겨울 여행지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물새처럼
겨울 여행은 실천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여름철처럼 휴가를 공공연하게 얻기도 괜스레 눈치 보이고 막상 휴가가 생겨도 찬 바람을 쐬느니 뜨듯한 아랫목으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 싶다. 그러나 올겨울의 낭만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행복>의 여행 제안에 귀 기울여보자. 한 해를 찬찬히 돌이켜볼 전북 부안 모항, 가족들과 함께 철새 탐험 여행을 떠날 천수만으로.
시인 안도현 씨가 추천하는 전라북도 부안의 모항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비로소 여행이란, /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모항으로 가는 길’ 중
유별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행 가는 데 특정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기행이나 견학, 탐사가 될 것이다. 언제나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문제다. 안도현 시인은 ‘문득’이라는, 새우깡 안주처럼 흔하고 빤한 이유를 들어 여행의 동기를 읊는다. 그러나 누군가 콕 집어 ‘너’라고 부르면서 그 당연한 이유를 짚어주면 고개를 번쩍 들게 된다. 그래, 당신만은 내 떠나고픈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길잡이를 하는 시인도 있겠다, 몸이 안 따라주면 마음만이라도 이 여행길에 얹어본다.
안도현 씨가 처음 모항에 간 것은 20여 년 전. 그때만 해도 모항은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었다. 모항에 첫발을 디딘 뒤 3, 4년 뒤인 1980년대 후반에 그는 ‘모항으로 가는 길’을 썼다. 전교조 해직 교사 시절에,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열정이 아주 뜨거울 때 쓴 시란다. “그때는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거부감이 들 정도였어요. 시대상에 비춰볼 때 여행은 사치로 여겨졌지요.” 무거운 사회 분위기를 깨고 두 발이 닿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보기도 하는 사람이 또 시인 아닌가.

1 외국의 어느 바닷가 풍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북 부안의 모항은 그 자체로 시를 읊게 만드는 빛나는 풍경이다. 서러운 마음을 끌어 안는,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시인 안도현도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모항으로 향했다지 않은가. 모항은 자기를 찾는 누구에게도 ‘까칠’하지 않은, 그리운 모정 같은 동네다 .


2 모항에 간다면 시간을 비워 내소사에도 들러보라. 대웅전의 문살을 찬찬히 보자. 오전에 앞에서 보면 꽃 모양, 뒤에서 보면 마름모꼴이며 오후에는 새가 날아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 모항을 아는 것은 /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으로 가는 길’ 중
변산반도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격포를 지나 곰소 방향으로 조금 더 달려야 모항이 나온다. 이 동네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정평이 나 있을 만큼 창밖을 보면 절경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그런데 안도현 시인은 아직은 감탄을 아껴두란다. 그만큼 모항은 비경이다. “모항은 변산의 속살이죠. 지금은 꽤 치장된 관광지이지만, 당시만 해도 벤치 하나 가꿔놓은 곳이 없었어요. 제가 모항을 알게 된 건 모항 뒤쪽 작은 마을에 사는 박형진 시인 덕분이에요. 그 시인의 집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는데, 바닷물이 갯벌을 거쳐 마당 앞쪽까지 들어오더군요.” 모항에서 나고 자란 박형진 시인은 이곳에서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며 산다. 운이 좋다면 모항에 흡수되어 살고 있는 박형진 시인의 집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3 변산 일대는 한겨울에도 따뜻하다. 동해안처럼 눈이 허벅지 높이만큼 쌓이는 일도 없다. 무엇보다 변산 일대 해안가를 푸근하게 만드는 것은 숨 쉬는 갯벌이다. 축축하고 말랑한 갯벌이 시야에 가득 차는 한, 이 겨울에도 만물에 피가 돌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안도현 시인은 모항에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졌다며 서운해하지만, 자연 경관의 정취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모항에 도착하면 절로 나오는 감탄사는 ‘와 예쁘다!’. 두 개의 곶 사이에 쑥 들어간 포구, 넉넉한 산을 등지고 쭉 뻗은 바다를 앞에 둔 모항. 정겹고, 아기자기하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래서 겨울 바다인데도 쓸쓸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한쪽에는 너른 갯벌이, 다른 한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에워싸인 아담한 해수욕장이 있다. 작지만 각기 다른 풍경이 오종종하게 모여 있어 지루하지 않은 바다. 시인은 회고한다. “해수욕장에 갯바위라고, 누울 수 있는 커다란 터가 있어요. 여름에는 밤새 술 마시기 딱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포구는, 특히 겨울이라면, 반성하기 좋은 곳이지요.”
“변산 모항 쪽에 눈 오신다 기별 오면 나 휘청휘청 갈까 하네 // 귓등에 눈이나 받으며 물메기탕 끓이는 집 찾아 갈까 하네 // 무처럼 희고 둥근 바다로 난 길 몇 칼 냄비에다 썰어 넣고 // 주인이 대파 다듬는 동안 물메기탕 설설 끓어 나는 괜히 서럽겠네 // 눈 오신다 하기만 하면 근해近海의 어두운 속살 같은 국그릇에 코를 박고 // 한쪽 어깨를 내리고 한 숟가락 후루룩 떠먹고 // 떠돌던 눈송이 툇마루 끝에 내려앉는 것 한번 보고 // 여자가 옆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겠네 // 변산 모항 쪽에 눈 오신다 하기만 하면” ‘물메기탕’
“어느 겨울 박형진 시인의 집에 묵고 있을 때 동네 청년들이 마침 물메기를 잡아 왔더군요. 곧 ‘푸르르’ 매운탕을 끓여서 눈 오는 날 마루 끝에 앉아 먹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시원하고 맑은 물메기탕을 ‘먹어봐야 아는 맛’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부안 읍내의 시장 근처에 가면 물메기탕을 파는 음식점을 찾아볼 수 있다.


변산에서는 차로 10분만 달려도 계속 다른 풍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푸른 해송 海松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얄팍한 해수욕장이, 또 눈 덮인 염전이 나타난다. 소금 창고는 수년간 침투한 염분과 냉기로 단련되었을 것 같다.


2 해 질 녘 노을이 반질반질한 갯벌 위에서 미끄러지며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부안에는 모항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우선 서정주를 비롯한 쟁쟁한 시인들이 시 한 편씩 읊고 갔던 내소사. 고졸한 멋에 취해 있다 보면 사람들이 왜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는지 짐작이 된다. 내소사로 향하는 울창한 전나무 숲길도 인상적이다. 눈이라도 내린다면 흰 망토를 뒤집어쓴 거대한 숲의 전령처럼 보인다. 신선한 각종 젓갈로도 유명한 곰소가 바로 옆이다. 하얀 소금 대신 눈에 뒤덮인 곰소 염전의 소금 창고를 보는 맛도 색다르다.


1 지금 천수만에서 겨울을 나는 기러기 떼는 시베리아에서부터 4000km 정도 먼 거리를 약 시속 80km로 날아온 철새들이다. 체지방을 소진하며 장거리 비행을 한 이들은 천수만에서 그간 주렸던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며 살을 찌운다. 천수만에 설치된 ‘탐조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기러기의 통통한 엉덩이까지 확인할 수 있다.

‘새 박사’ 윤무부 씨가 추천하는 충남 천수만 철새 도래지
매년 겨울 ‘새 박사’ 윤무부 씨는 바쁘다. 겨울 새들이 속속 상륙한 철새 도래지로 안내해달라는 각지의 간청 때문이다. 새를 목숨처럼 아끼고, 누가 새에 대해 물어보면 하던 일도 제쳐놓고 A부터 Z까지 설명해주는 조류학자 윤무부 씨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는 적이 없다. 유치원 어린이들이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회의 리더들이건 새를 만나겠다는 사람은 누구든 차별하지 않는다.
“12월 무렵 우리나라에서 겨울 철새를 보려면 강원도 철원 민통선, 경남 창원시 주남 저수지, 금강 하구, 제주도 하두리 양어장, 충남 서산 천수만, 강원도 속초의 청초 호수 등으로 가면 돼요.” 윤무부 씨는 그중 처음 겨울 철새를 보러 가는 가족에게 충남 서산 천수만을 추천했다. 이곳을 찾는 겨울 철새는 물론이거니와 천수만의 갈대 숲이나 드넓은 호수가 볼 만하기 때문이다.
윤무부 씨의 말대로 천수만의 벌판은 묘한 구석이 있다. 추수가 끝나 평평한 벌판이 한편으로는 그토록 황량하고, 또 한편으로는 새들의 거대한 둥지처럼 느껴져 안온하다. 여의도의 46배에 달하는 거대한 간척지, 천수만. 한반도에 총 5백여 종의 새가 살고 있는데, 그중 천수만에 찾아오는 새가 3백20여 종이란다. 우리나라에서 사계절 내내 가장 다양한 새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간척지가 대부분 농사에 사용되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는 전봇대도 없고, 따라서 시야가 확 트여 새의 움직임을 보기에도 좋다.
천수만 A지구에서 탐조 여행을 시작했다. 저 멀리 벌판에 시커먼 흙 무덤이 있는 것 같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엉덩이가 통통한 기러기 무리다. 한낮 따뜻한 햇살에 등을 데우며 고개를 숙인 채 먹이를 먹고 있었다. 벌레나 떨어진 벼 이삭, 벼의 뿌리 등을 주로 먹는단다. 안내를 맡은 천수만 철새 도우미가 “저게 몇 마리나 될 것 같아요? 수천 마리요? 에이, 한 5만 마리쯤 되네요”한다. 간혹 운이 좋으면 이 무수한 무리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우리 머리 위에서 ‘철새 융단’을 펼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엔 웬만한 자동차 소음에도 꼼짝 않고 일광욕을 하며 먹이를 섭취한다. 뒷산에 사는 독수리 같은 맹금류 한 마리가 뜨지 않는 한 말이다.

2 갈대숲 너머로 보이는 백로. 흰 몸뚱이에 주황색 부리를 가진 백로는 늘 혼자 노닌다.


3 천수만 일대에서 점으로 보이는 생물들은 모두 새 떼다. 물위에 떠있다가 고개를 푹 쳐박고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4 이 잿빛 새는 ‘왜액 왝’하고 운다 하여 이름이 왜가리다.


“절대로 새들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윤무부 씨는 신신당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들판 사이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가면 쉬고 있던 기러기들이 목을 쭉 빼고 경계하며 버스의 반대 방향으로 슬금슬금 걸어간다. 이때 버스가 멈추면 기러기들이 놀라서 날아가 버린다고. 그래서 버스는 계속 속력을 낮춘 채 지나가야 한다. 또 큰 고니는 가족 단위로 생활하고, 왜가리는 홀로 노닐며, 기러기는 거대하게 무리 지어 사는 등 무리 짓는 습성이 각각 다르다. “새들의 이런 다양한 습성을 현장에서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무척 잘 기억해요. 재미있기만 하다면 전문 지식도 잘 이해하고 오랫동안 잊지 않아요.” 그래서 미리 조류 도감을 읽고 가거나 한 권쯤 챙겨 가면 좋다.
아주 운이 좋다면 해질 무렵 천수만의 슈퍼스타 가창오리의 군무를 볼 수 있다. 보자기처럼 떼로 펼쳐져서 하늘에서 맴도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다. “물론 새도 봐야지요. 더불어 자연과 새와 사람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세요.” 사람이건 새건, 모두 자연의 일부임을 배우고 간다면 그만한 소득은 없지 않을까.

탐조 여행을 떠날 때는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한국의 새>(윤무부/교학사) 같은 조류 도감, 튀지 않는 색상의 따뜻한 겨울 외투, 쌍안경, 간단한 식사, 그리고 전문가의 안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철새 도래지는 관람객을 안내하는 전문가가 동행하지 않으면 입장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미리 알아보고 가야 한다. 새 박사 윤무부 씨가 직접 안내하는 탐조 여행 프로그램도 있다.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우리나라 철새 도래지 중 한 곳을 하루 만에 돌아볼 수 있다. 그의 해박하고 친절하고 재미있는 새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루도 모자라겠지만. 단, 25인 이상 단체로 신청해야 한다. 문의 0112548080@hanmail.net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