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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가수 김창완 언제나 지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 슬픈 현재나 기쁜 현재나
이제 ‘산울림’의 김창완은 없다.‘김창완 밴드’의 김창완으로, 새 음반 <The Happiest>를 들고 그가 돌아왔다. 무심과 행복 사이를 휘적휘적 넘나드는 그는 인터뷰 내내 여백처럼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뭐라도 묻지 않으면 누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해올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바람 부는 홍대 골목, 공연장 귀퉁이에서 산울림의 ‘백일홍’을 웅얼대고 있었다. “잊혀질 것 같지 않던 기쁜 일들도 / 가슴속에 맺혀 있던 슬픈 일들도 / 모두 다 강물에 떠내려간 잎사귀처럼 가고 / 백일홍 핀 꽃밭에서 들리는 건 / 어린아이 피아노 소리 / 사라지는 건… 사라지도록 / 잊혀지는 건… 잊혀지도록….”(‘김창완 Postscript’ 앨범 중 ‘백일홍’)
노랫말의 숨은 뜻에 감탄하며 점자책을 읽듯이 짚어 내려가던 그때, 그가 우리 앞에 섰다. 응달의 수숫대같이 치솟은 머리칼과, 생각보다 조금 작은 몸피와,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소년 같은 눈, 그리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음성. 그의 허물어지는 듯한 표정 앞에서 3초 만에 애정이 솟아올랐다.
김창완. 작사,작곡, 연주까지 다 하는 뮤지션이자, 그의 말이라면 자다 깨서라도 듣고 싶게 만드는 라디오 MC, 늘 비실대고 사기당할 것 같은 ‘김창완식 자연주의’ 연기를 펼치는 배우, 산울림 13집까지 음반 재킷의 그림을 그린 ‘화가’, 글로 밥 버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필력으로 수필집을 낸 작가, 3일 동안 열네 곡을 작곡해 무대에 올린 뮤지컬 작곡가(<반 고흐와 해바라기 소년>)…. 집에는 그가 직접 조각한 작품 ‘허무한 손’이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는, 기자들 사이에서 ‘생각의 달인, 말의 달인’으로 이름 높다. 신에게 어떤 봉사를 하여 듣는 이를 훅 빨아들이는 재주를 갖게 된 걸까, 고심하게 만드는 말솜씨에, 고감도의 비유, 거기에 행간의 깊이까지. 이렇게 폭이 넓은 그의 세계를 담기에 한두 시간의 인터뷰가 가당키나 한 건가, 두려웠다. 하지만 여긴 서울이다. 이곳은 오해의 세계이기도 하면서, 진담의 세계, 범인 凡人들의 세계이기까지 하다. 11년 만에 음반 를 내고 홍대 클럽에서 스탠딩 공연을 앞둔 그. 그는 ‘오해’의 세계에서 ‘진담’을 말해줄 것이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 / 가벼운 아침 발걸음 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 /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 / 이리저리 지나치는 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산울림 1집 ‘아니 벌써’ 중) ‘○○○ 대통령은…’이란 뉴스가 헤드라인을 채우는 이상한 공화국에서 산울림의 노래는 청춘의 가슴에 어떤 트임을 주었던가. 사운드도, 가사도, 노래 부르는 법도, 곡의 길이도 사상 초유였던 ‘아니 벌써’. 이 가요사의 명곡으로 산울림은 젊음의 핏기가 거세된 기존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1970, 80년대 추운 시절을 산 청춘들은 산울림의 ‘독백’으로 사춘기를 버텼고, ‘청춘’을 부르며 미처 떠나지도 않은 청춘을 슬퍼했고, ‘너의 의미’를 부르며 사랑을 보냈다. 그들의 멜로디는 간단하고 가사는 쉬웠다. 기쁜데 우울한 척하는지, 우울한데 기쁜 척하는지 알 수 없는 산울림만의 ‘속 깊게 딴청 피우는’ 정서는 청춘의 가슴에 불을 놓았다. 불안한 현재와 아득한 미래를 귓속말로 들려주면서. “그냥, 그랬던 거예요. ‘아니 벌써’가 반어법으로 사회에 저항했다고들 하지만, 사실 심의에 걸리는 바람에 원래 가사의 반대로 바꾼 것뿐이지. 사람들이 그 가사에서 ‘스스로 읽어낸’ 은유가 이 노래의 생명력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청춘을 거추장스러워 할 정도로 삼형제가 청춘에 있었던 거죠. 청춘은 늘 무언가 ‘거부’하기 마련이니까.” 그는 한가로이 난이나 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일곱 살에 서울대에 들어간 큰형 김창완이 대학 1학년 때 5백 원짜리 통기타를 사 들고 와 처음 잡아본 ‘감동의 D 코드’, 둘째 김창훈이 4천 원짜리 기타를 튕기고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를 두드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한 ‘형제 취미 밴드’. 작곡까지 도맡은 큰형이 음악 입문 한 달 만에 완성한 노래 ‘왜 가’(후에 산울림 5집에 실렸다), 산울림이 아니라 ‘무이’로 출전한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의 아쉬운 탈락(예심 1위였지만 김창완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대신 둘째 김창훈이 만든 ‘나 어떡해’로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받았다), 은행 입사 시험 치르는 날 시험장 대신 녹음 스튜디오에 1만 원짜리 기타 들고 들어가 녹음한 ‘산울림 1집’, 음악 대신 공부에 전념하자는 의미로 친척들에게 나눠주려고 녹음한 1집의 대히트, 그 후로 이어진 산울림 앨범 13집, 동요 앨범 4장, 독집 앨범 등 총 30여 장의 음반. 나열하는 것만으로 입이 버쩍버쩍 마르는 그들의 연대기다. 존재만으로도 ‘청춘의 대공습’이었던 산울림은 1970년대에서도, 1980년대에서도 ‘섬’으로 존재했다. 영향받은 음악 사조나 선배도, 심지어 동료도 없었던 ‘형제 밴드’ 산울림. 그들은 1990년대가 돼서야 시대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들의 음악은 20년쯤 앞서 있었던 거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산울림 6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미적분학을 또 하나 만들고 싶었고, 알랭 드 보통이 해석한 ‘에피큐리언(에피쿠로스주의자, 곧 쾌락을 중시하는 사상가들의 가르침) 라이프’를 되뇌기 좋아하고,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의 가사가 게르니카(피카소의 그림 제목)가 시사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현대 과학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자연인’ 김창완이다. 살면서 가장 궁금한 건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이며, 요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연환경이라는 그(그가 직접 쓰는 라디오 오프닝 멘트는 대부분 하늘, 구름, 벌레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그의 노랫말이다. 천재의 상상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고감도 언어, 그러면서도 일상을 들여다보는 푸근한 시선이 그의 노랫말에 있다. 도무지 가사가 될 것 같지 않은 구어체 언어들이 그의 노래 속에서는 물처럼 출렁인다. ‘백일홍’의 그 속 깊은 가사가 그렇거니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는 또 어떤가. 자기 안에 향기를 품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말할 수 없는 가사들이다. “노랫말이 있으면 멜로디는 절로 따라온다는 게 내 작곡 이론이에요. 가사에 어떤 틀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긴 산울림에게 틀이 있다는 건 이상하고 안 어울리니까. 음악적이라기보다 내내 문학에서 시작한 노래들이어서 그런 거 아닐까?”‘문학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지닌 그 노랫말은 여전히 힘이 세다. 그는 술집이든 카페든 낮이든 밤이든 생각나면 곡을 짓고 글을 쓴다. ‘청춘’은 아이 돌날 만든 노래이고,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도 오토바이 여행 중에 밥 시켜놓고 썼다. “어떻게 노래도 하고 작곡도 하고 글도 쓰냐고요? 나, 죽을 만큼 노력해요. 누구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잠재력을 가졌는데, 그걸 끌어내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난 죽을 만큼 갖다 쓰는 것뿐. 뮤지컬 할 때 3일 만에 열네 곡을 썼는데 ‘와, 쉽게 하네!’ 하겠지만, 나는 그 3일간 잠을 잔 기억이 없어요. 어떤 일을 할 땐 그 일 말고 세상에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치열하게 자신을 담금질하고 풀무질하는 55세의 몽상가. 어른이라기엔 너무 순수하고 아이라기엔 너무 심오한 55세의 천재.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 / … / 여자들은 여자들을 살고 남자들은 남자들을 살지 / … / 미리 알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 후회 없이 살 수 있지도 않아 /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 다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게 있지….”(김창완 밴드 1집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중)
1977년 세상에 ‘산울림 1집’을 내놓은 이후 그는 30년 동안 ‘산울림의 김창완’이었다. 30년 동안 앨범 팔아 돈을 취한 적도 없고, 그의 콘서트에서 기절하는 여자애들도 없었지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너의 의미’ ‘백일홍’을 지은 사실만으로도 훗날 <시용향악보>에 기록되어야 마땅한, ‘산울림의 김창완’이었다. 그가 1990년대 후반부터 ‘김창완식 어벙한 연기’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횡무진할 때도, ‘남자 이영애’라는 말이 나올 만큼 CF에 동시 다발로 출연할 때도 그는 ‘산울림의 김창완’이었다.
“산울림 음악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냐고요? 이 이야기 먼저 해야겠네. 나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아저씨, 왜 살아요? 아줌마, 왜 살아요?’ 이런 질문을 계속했는데, 그 답은 늘 ‘커보면 알아. 공부나 열심히 해’였어요. 어느새 나도 대답할 나이가 됐는데, 이렇게 답해줘야겠다 싶어요. ‘인생은 답을 구하는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질문을 던지는 거란다. 질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다.’ 내가 오랫동안 날 규정하지 않고 ‘산울림의 음악은 무정형이다, 나는 나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게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산울림은 산울림일 뿐이에요.” 아, 세수하고 난 것처럼 갑자기 눈이 환해진다. 인생에는 훌륭한 바보도 있도 뻔뻔스러운 희생자도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다.

이번 겨울 그는 ‘산울림’의 김창완이 아니라 ‘김창완 밴드’의 김창완이 될 것이다. 11월 말 발매하는 산울림 전집 소책자에 김창완은 이렇게 썼다. “이제 바람은 멈추었다. 모든 색은 합쳐져 단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되었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지난봄 막내 김창익을 하늘로 보내고 그는 ‘내 청춘을 잃었다’라고 했었다. 그리고 ‘산울림으로서 더 이상의 작업은 없다’고 산울림에 종언을 고했다. “나는 지금 산울림과 헤어지고 있어요. 그게 산울림에 대한 내 경의이자 애정이지요.” 그렇게 그가 ‘김창완 밴드’로 들고 나온 첫 음반의 제목은 ‘The Happiest’다. “나는 쉰 살이 넘어가면서 50년 묵은 내 우울을 떨쳐버렸는데, 그건 대단한 경험이 아니에요. 애인한테서 전화가 안 와서 짜증 내다 전화가 오는 것, 인생은 그런 건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전화라는 게 원래 없는 거라는 걸 안 거예요. 언젠가는 전화가 오는 게 아니라. 그걸 알고 나서 우울을 벗어버렸죠.” 그는 울고 난 후의 눈 같은 표정이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 어머니 코 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 / … /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기타가 있는 수필’ 음반 중 ‘어머니와 고등어’)
자연인 김창완에겐 27년간 아픈 남편을 수발하고도 그 시련 앞에 대범했던 여장부 같은 어머니가 계신다. 그리고 20년 넘게 일요일마다 어머니 모시고 목욕탕엘 가는,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며 어머니를 으쓱하게 하는 ‘마누라’가 있다. 대학 시절 흑석동 독서 모임에서 만난 그 의대생은 20년 넘게 방석처럼 푸근하게 그를 안는 아내가 됐다. 주말이면 드라마 촬영하러, 자전거 타러 도망가고, 평일엔 술 마시러, 라디오 녹음하러 도망가는 남자. 그래서 일주일에 나누는 대화는 고작 “언제 들어왔어?”가 전부인, 무뚝뚝한 남자. 이 침묵을 견디는 마누라를 그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금방 나왔는데도 아내가 그립다’고 여전히 말하는 남편이다. 그는 언젠가 짧은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마누라가 나를 키웠다. 나의 온갖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거지를 이해하고 지원해 주는 이는 마누라밖에 없다. 마누라가 만든 견고한 일상이 내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줬다.” 또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고,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외아들 신화도 있다. 그리고 그토록 좋아하는 오토바이, 자전거, 그리고 술. “사람들은 술과 마음을 연결시키려 해. 술은 무조건 낭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술은 술이야. 술을 해독하는 방법은 후회밖에 없지. 그래도 마시는 이유? 그런 거친 상태에 날 풀어놓는 게 좋아서.” 애주가인 그가 술을 마시면 노래에서 미처 들려주지 못한 그의 자유, 눈물, 소망을 들려준다.

“한때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녔지만, 이제 그건 다 끊었어요. 그러고 나니 오히려 인생에 낙이 생기데. 김치 하나로 맛있게 밥 먹는…. 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기까지 6개월이 걸렸어요. ‘맨밥에 김치’에서 간절함을 알았어요.” 그가 발열하며 웃었다.
“나, 행복하냐고요? ‘내가 날 잘 모를 때, 내 인생이 무언지 잘 모를 때 바라봤던 게 가장 인생다웠던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어요. 이 말처럼 행복은 골 Goal이 아니라 출발점 아닌가 싶어요. 행복은 우리의 시작점인데 넣어야 할 골로 평생 착각하며 사는 건지도 모르죠. 언제 제일 행복했냐고 물으면 언제나 지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슬픈 현재나, 기쁜 현재나. 내일은 어떤 일이 더 일어나고 행복해지겠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그럼 어저께 그저께가 지금보다 더 나았었나? 술 먹고 실려 간 기억밖에 없는데, 뭘.”

금방 내린 눈처럼 여백만 남은 것 같다가도, 아무도 모르는 무거운 비밀을 집어삼킨 노인 같기도 한 그와의 짧은 대화였다. 나도 그와 열 몇 시간 인터뷰했다는 어느 기자처럼 그에 대해 쓰지 않는 편이, 차라리 그의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진담’을 쓰레기 같은 질문으로 ‘오해’한 게 아닐까, 미안한 자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에게 내민 책 <이제야 보이네>에 사인을 하며 그가 썼다. “모르는 채로….”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 뜻을 놓칠 뻔한 한마디가 생각났다.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가슴에 담아둬라. 알려고 노력한다고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세상에 대한 가장 큰 베풂은 용서다. 사람이 세상에게 베푸는 가장 큰 것이 용서이고, 그것은 곧 망각이다.” 문득 오해를 견디고 사는 일이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망연해진 날 남겨두고 홍어에 소주 한잔 하러 간다며 그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로 휘이 바람이 지나갔다. 좁은 등압선을 가진 바람이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