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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이 나를 치유한다] 북 카페 주인장 여인명 씨 컬렉션은 내 삶의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다
중국에는 ‘책에 미치면 사랑하는 첩과도 바꾼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 자신도 화가였던 렘브란트는 일평생 명화를 모으는 데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수집의 대상을 물건으로 바라보면, 이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핍한 삶의 어려움보다 아름다운 그림이 주는 만족이 더 컸다면 렘브란트는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수집을 생각하면 사물을 떠올리지만 정작 그 사물을 좌우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수집은 이성보다 감성에 이끌리는 행위로, 객관적인 잣대로 가치와 소용과 합리성을 이야기하면 무의미해지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사물과 소통하는 ‘행복한’ 수집가들을 만났습니다. 다양한 수집품과 함께 그들이 내보여준, 수집을 통해 얻은 마음의 풍요와 열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만나보았습니다.
공산당원처럼 보이는 청년이 불끈 쥔 주먹을 세우고 소리치는 듯한 그림 위로 선정적으로 새겨진 문구 ‘RUN, CHANGE, EVOLVE’가 시선을 끈다. 25권의 그래픽 잡지가 각각 한 권씩 아크릴 박스에 밀봉되어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다. 아트 숍 내부의 전시 코너에는 잡지, 음반, 아트피겨, 포스터 등이 쇼윈도 안의 상품처럼 자리하고 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컬러 매치로 전시한 이 반복적이고도 다양한 사물들은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라 한 수집가의 컬렉션이다. 이는 백남준 아트센터 아트 숍에서 마련한 이색적인 팝아트 전시로 디자인 책과 잡지 등 해외 도서를 유통하는 ㈜비트 보이 대표이자 북 카페 루팡 더 플레이스의 주인장 여인명 씨의 작업이다.

‘나는 박제화된 문화 현상을 수집하는 컬렉터’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LP 음반, CD, DVD, 장난감, 포스터, 잡지 등 다양한 문화 상품과 정보를 수집해왔다. 해외 출판물 유통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패션 잡지 <보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각종 디자인 서적과 비주얼 잡지를 다루다 보니 어느덧 아트 디렉터와 사진가, 디자이너 등 시각 예술계를 훤히 꿰뚫는 ‘재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매달 발간하는 수백 종의 해외 잡지와 책을 통해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는 그에게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어느 날 우연히 들여다 본 음반 커버에서 아트 디렉터 솔 바스, 사진가 유르겐 텔러 등 평소 위대한 아티스트라 생각했던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고 느꼈던 흥분과 감동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LP 음반 수집이 1만 장이 넘는다. 그는 음반을 단지 음악으로 수집하지 않았다. 하나의 음반은 음악가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와 사진가, 편집자 등이 자본과 만나 만들어낸 문화적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DVD, 공연 포스터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요즘 친구들이 MP3로 듣는 음악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는 영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왼쪽) 루팡 더 플레이스의 디제이 박스 풍경. 그는 이 공간에 들어서면 디제이가 된다. 다양한 장르의 컬렉션 중 일부인 음반으로 채워진 이곳에서 그는 리메이크곡을 자주 틀곤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곡이지만 누가 리메이크했는지 알기 어려운 곡을 틀어 사람들을 궁금증에 빠지게 만들곤 한다.


1 여인명 씨가 운영하는 북까페 루팡 더 플레이스의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잡지 컬렉션 코너.
2 컬렉션의 일부를 이루는 아트 피겨.
3 여인명 씨가 처음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음악보다 음반 커버 디자인에 매료돼서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을 일회성 경험과 문화적 현상 등이 시각적으로 박제된 것이라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잡지를 들 수 있다. 잡지는 한 달간의 다양한 문화 현상을 한 권의 책으로 밀봉한 것이다. ‘이 한 권의 잡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이루어졌을까?’ 그는 이러한 ‘박제된 문화 현상’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빈티지 공연 포스터를 보면서는 예술가의 공연 현장과 그를 표현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작가, 아트 디렉터와 기획자간에 이루어졌던 교감, 공연과 포스터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상호 교류의 에너지가 전해진다. 이는 그에게 시공을 초월한 우주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
10여 년 전과 비교해볼 때 그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다. 그 시절 삶의 경로를 바꾸지 않았다면 지금쯤 보스 양복을 입고 아이들 조기 유학을 고려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2008년 오늘, 더 이상 의심이 없어야 할 불혹의 나이에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나는 누구인가? 사업가인가? 서점 주인인가? 바텐더인가? 아니면 디제이인가? ‘문화적 현상을 박제한’ 그의 수집품들은 넥타이 부대의 평균치 인생 경로에서 이탈한 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수집품들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부메랑이 되어 그를 자극한다. 인생은 예술이다. 움직여라, 변화하라, 나아질 것이다(Run, change, evolve!) 그에게 수집은 에너지의 충전이다. 돌이켜보면 삶의 변화가 그를 수집가로 만들었는지, 수집 과정이 그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방대한 수집품은 강렬한 에너지가 되어 그의 삶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1 국내외 월간지의 창간호로만 채워져있는 선반.1987년도 9월에 창간한 <행복이 가득한 집>도 눈에 띈다.
2 1968년도에 푸에리토리코에서 제작된 빈티지 포스터.
3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ld’가 수록되어 있는 앨튼 존의 오리지널 음반 ‘Blue Moves’



4 DVD 컬렉션이 그의 사무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5 백남준 아트센터의 아트 숍에 전시한 그의 팝아트 전시 풍경.
6 백남준 아트센터 아트 숍에 전시한 그의 컬렉션. 잡지, 아트 북, 포스터, 음반, 아트 피겨 등 그가‘박제된 문화 현상’이라 표현하는 다양한 장르의 컬렉션이 마치 쇼윈도 안의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