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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문화공간 건축평론가 이용재, 백남준 아트센터를 말하다
백남준 씨가 생전에 스스로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이름 붙인 백남준 아트센터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꿈틀거리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이곳을 건축평론가 이용재 씨가 다녀왔다. 그리고는 이 ‘유적’과도 같은 미술관이 문을 열기까지 벌어진 구절양장 같은 사연도 함께 들려주었다.


1 백남준 아트센터는 국제 현상설계 공모 당선작으로 그랜드 피아노 형태를 반영했다.
2 비디오 설치 작품 ‘TV 정원’.


백남준 선생. 1932년 서울 창신동에서 거상의 아들로 태어난다. 부친은 이승만 정권한테 친일 장사꾼으로 찍히고. 1950년 일본으로 밀항. 대한민국에선 안 되겠군. 도쿄대학 미학과 졸업하고 독일로 넘어간다. 전공은 음악사, 작곡. 미학과 음악이 만난다.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샬로트 무어맨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공연하다 경찰에 잡혀간다. 외설. 여자의 가슴을 드러내고 활로 여자의 갈비뼈를 긁어댄 거다. 이제 세계적인 스타. 왜 꼭 악보의 음표대로만 연주해야 되냐. 그리로 가면 베토벤을 이길 수 없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렇게 백남준을 추모한다. “백남준이 대한민국에서 활동했으면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없었다. 왜냐고. 하도 옆구리 차는 사람이 많아서.”
백남준 선생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초고속 인터넷 고속도로를 깔아야 된다. 침묵하던 클린턴의 기자 회견.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겠다. 나의 아이디어임. 내 걸 훔쳐! 복수전. 백악관에 초청받은 백남준은 휠체어 타고 참석. 속옷은 일부러 안 입었고 바지 단추는 풀려 있다. 클린턴과 악수. 휠체어에서 백남준이 일어나는 순간 바지는 흘러내리고 중요 부분이 완전히 드러났다. 클린턴과 힐러리 기절초풍. 까불고 있어. 2001년 ‘서울 랩소디’를 의뢰받는다. 2백80개의 모니터가 깜박인다. 아트, 아트, 아트. 이 ‘서울 랩소디’의 가격은 6억 원. 근데 선생은 거지다. 선생 통장에 작품료가 입금된 적이 없는 거다. 계약만 되면 다음 작품 구상에 착수해 이미 다 써버리고 그래도 남은 게 있으면 복지 시설에 기부하기 바쁘시니. 그러니까 설라무네 작품을 의뢰한 패트론들은 선생 계좌번호를 모른다. 제작 업체나 복지 시설 계좌번호만 알고 있다나 뭐라나.
전국 8도의 지사들이 모였다. 우리가 ‘백남준 미술관’을 짓겠다. 우리 동네도 선생 덕에 떠보자. 난리가 났다. 임창렬 경기도지사가 한 수 위. 자식들 말로만. 전 세계를 다니며 선생의 작품 60점을 사 모았다. 선생을 찾았다. 저희가. 그러지 머. 도내 27개 시가 다시 붙었다. 우리 동네에. 돈 많은 도시가 유리한 법. 1만 평의 대지 무상 제공하고 공사비도 일부 부담하겠다. 용인시 승.
2003년 국제 현상설계 공모. 4백30개 팀 참석. 독일 여성 건축가 크리스텐 셰멜 당선. 주제는 매트릭스. 전파신호를 건축으로 해석. 공사비를 산출해 보니 7백20억이 나왔다. 대책회의가 열렸다. 확보된 예산은 3백60억. 반으로 뚝 잘라라. 싫다. 설계자는 독일로 귀국. 친구와 술을 마셨다. “야, 대한민국이 날 갖고 논다. 나 안 할래. 건축이 무슨 양배추냐. 다 해놓은 걸 반으로 자르게.” “그럼 내가 할게.” 친구 마리나 스탄코빅이 한국을 찾았다. 재설계. 이번엔 그랜드 피아노 버전. 시간은 흐르고. 2006년 1월 백남준 서거. 경기도 의회가 열렸다. 빨리 짓자. 욕먹겠다. 3년 만에야 착공. 2008년 오픈. 전화가 왔다. 너네 ‘백남준 미술관’이라는 이름 쓰지 마라. 내가 이미 특허청에 상표등록 해놨걸랑. 머라. 그래 이 미술관은 ‘백남준 아트센터’가 된다. 반투명의 검은색 유리로 만든 1천7백 평의 그랜드 피아노. 선생님 좀 늦었습니다. 죄송.


백남준의 작품과 흔적 1 ‘엘리펀트 카트’.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으로 코끼리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부처와 비디오 아트를가득 실은 마차로 이루어져 있다.

백남준의 세계로 가는 다섯 개의 정거장
백남준 아트센터

미국의 한 평론가는 백남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천재 예술가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라면, 5백 년 후에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은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누구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아티스트였지만 정작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8일 개관한 백남준 아트센터는 세계 최초로 백남준의 이름을 공식 사용한 미술관으로 대중과 백남준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는 의도 아래 프로그램이 계획되었다. 먼저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을 기념해 2009년 2월 5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백남준 페스티벌 ‘NOW JUMP’가 열린다. 다섯 개의 스테이션으로 나누어 스테이션 1,2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스테이션 3은 길 건너편에 있는 신갈고등학교와 지인 아트센터에서 동시에 진행된다.(스테이션 4,5는 각각 백남준 연구를 위한 학술 프로젝트와 백남준을 기리기 위한 예술상 시상으로 전시회에 포함되진 않는다.)스테이션 1에는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 같은 예술적인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자료들이 빼곡히 차 있어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한결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스테이션 1의 압권은 그 유명한 비디오 설치 작품 ‘TV 정원’이다. ‘TV 정원’은 미술관 내에서 대규모의 정원을 만나는 흔치 않은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반짝이는 꽃이 핀 것처럼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에 설치된 70여대의 TV에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비언어적인 행위인 춤을 통해 전 세계인의 소통을 다룬 <글로벌 그루브>가 방영되고 있다. 관객들이 가장 열광하는 작품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되어 개관 전부터 대중의 기대를 모은 ‘코끼리 마차 1999-2001’. 마차에는 생전에 앤티크 시장 구경을 좋아했던 백남준이 직접 구입한 앤티크 TV장과 축음기, 텔레비전 등이 가득 실려 있다. TV 화면에서는 재미있게도 어디론가 떠나는 코끼리가 등장하는 영상이 비친다. 코끼리 위에는 마치 백남준 자신처럼 보이는 불상이 노란 아디다스 우산을 쓴 채 앉아 있다.


2 슈야 야베와 함께 만든 ‘로봇 K-456’.
3 ‘TV 부처’는 1974년부터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불교에 심취했던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백남준의 오리지널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곳곳에 놓여 있는 그의 생전의 흔적을 느끼는 재미가 더 크다. 입구에 들어서면 백남준의 <태내 자서전>을 볼 수 있다. <태내 자서전>은 그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신이 했던 생각과 어머니와 주고받은 대화를 휘갈겨 적어놓은 것이다. 이런 요소 덕분에 백남준 아트센터는 그가 호흡을 불어넣은 듯,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백남준 아트센터가 개관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해온 이영철 관장은 “백남준이 무엇을 꿈꾸었는가,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가 하는 부분, 자연인으로서의 백남준이란 누구인가라는 지점에 초점을 두었습니다”라고 이곳의 성격을 설명했다.

한편, 백남준 페스티벌 내내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와 비디오 아티스트, 음악가들의 실험적인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개관 당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된 프랑스의 아니 비지에와 프랑크 아페르테의 퍼포먼스는 아트센터를 찾은 프레스와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섯 명의 외국인 퍼포먼서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 없이 전시장 바닥에 드러눕거나 관람객의 코앞에서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우리는 언어 외에 다른 형태의 소통을 보여준다. 우리가 여러 가지 액션을 취했을 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프랑크 아페르테는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대화만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 퍼포먼스를 시작했다고. 실제로 아트센터에서 이 퍼포먼스를 접한 관객들은 놀라서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퍼포먼서의 허리를 간질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백남준 아트센터의 이수영 큐레이터는 “공부하러 온다는 부담은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러 오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조언했다. 또 백남준의 작품은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가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 여러 번 와서 보는 것도 좋다고 덧붙였다. 개관 이후 일주일 만에 3천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 오래 기다려왔던 만큼 알찬 공연과 전시로 관람객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병상에 누워서도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백남준은 이곳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문의 031-201-8500, www.njpartcenter.kr

4 생전에 백남준이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 개인적인 메모와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고현경 객원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