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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도 손님도 더불어 즐거운 마을 공공의 디자인은 공공의 선이다
동네 전봇대에 덕지덕지 붙은 흉물스러운 광고지나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철제 울타리에 마음이 쓰였던 적이 있는가? 주민이 똘똘 뭉쳐서 마을을 아름답고 살기 좋게 만드는 곳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 폐광촌 마을 모운동 주민들은 직접 벽화를 그리고 꽃길을 만들어 마을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고, 작고 평범한 일본의 농촌 마을 이나카다테에서는 농부들이 벼 이삭으로 거대한 그림을 그려 활기를 모았다. 오스트리아 빈의 도심 속, 화가 훈데르트바서가 지은 작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나무도 세입자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연을 이웃 삼아 살아간다. 더불어 살기 위한 마음으로 서툴지만 정성껏 마을을 가꾸는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공공 디자인이자 공공의 선이 아닐까.


주민들의 힘으로 ‘찾아오고 싶은 마을’로 탈바꿈한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2리 모운동. 정순화 할머니 집에 동네 아이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한요엘, 김소현, 정순화, 한요셉, 강형구.


해발 50~700m에 걸친 모운동에는 계곡을 깎아낼 듯한 칼바람 대신 온유한 가을 미풍이 불었다. 따뜻한 지역에만 자란다는 감나무가 무성할 정도.
1, 2 전형적인 강원도식 낮은 집에 벽화를 그렸더니 동화 속 집 같다.


강원도 영월의 폐광촌 모운동
마을 사람들이 그린 벽화, 마을을 살리다
산속으로 난 1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을 꼬불꼬불 올라갔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2리 모운동은 생각보다 산골 깊숙이 자리했다. 길이 지루해질 무렵 망경대 산자락에 안긴 아늑하고 아담한 마을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강원도의 여느 산골 마을처럼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간 터라 무척 한산했다. 그러나 침체된 분위기 대신 경쾌한 기운이 감돈다. 집집마다 개미와 베짱이, 인어공주 등 동화 속 캐릭터가 벽화에 수놓였고, 높은 담벼락 대신 국화며 코스모스가 골목길을 연다. 한때 잘나가던 광산촌이었다가 폐광 이후 마을이 사라질 뻔했다는 소문이 믿기질 않았다. 이곳에서 17년째 이장으로 일하는 김흥식 씨를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이장 집의 현관문에는 알록달록한 선녀와 나무꾼 그림이 있다.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선명하다. 김흥식 이장의 아내 손복룡 씨의 작품이란다. “지난 1년 동안 마을 주민들과 힘을 모아 모운동을 가꿨습니다. 서툴지만 우리 스스로 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껴요.” 몇 년 전부터 의욕적인 젊은 작가들이 변두리 마을에 벽화를 그리며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는 공공 미술 작업이 유행이다. 그런데 이처럼 동네 주민들이 모두 직접 나서서 마을의 ‘환경 미화’에 도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위) 마을을 살리다모운동의 ‘아이디어뱅크’ 김흥식 이장. 사람들이 폐광촌은 더 이상 사람 살 곳이 아니라며 떠날 때 그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동네로 만들겠다’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해 이렇게 고운 동네를 만들었다.



너른 계곡을 통틀어 27가구 54명이 살고 있는, 읍내와 이곳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 네 번만 들어온다는 모운동. 이 동네도 1980년대까지는 번쩍번쩍했다. 서울 영화관과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 있을 만큼 인근에서는 번화한 축에 속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 극단 ‘낭랑쇼단’이 자주 찾는 ‘잘나가는’ 마을이었다. 약국 2개, 방앗간 2개, 교회 5개가 있었고 8백 명 넘는 초등학교 전교생은 오전?오후반 수업을 했다. “‘별표연탄’을 생산한 옥동광업주식회사에서 경영하는 광산이 근처에 두 곳이나 있었거든요. 그러다 1989년 폐광된 이후 주민들은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고요. 폐가가 난무해 전쟁통에 폭격 맞은 동네 같았습니다.” 두 살부터 살았고 부모님 산소도 모신 이곳을 김흥식 이장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이 산골 노총각은 교회 유치원 선생님으로 온 안동 아가씨의 옷깃을 붙잡아 앉히지 않았던가. 지금의 아내 손복룡 씨다. ‘폐광촌에서 뭘 해 먹고 사느냐’는 부인에게 ‘어디에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설득했다. 선녀의 날개 옷을 감춰서라도 이곳에 눌러살게 하고픈 생각이었다.

신문물이 닿지 않는 동네면 어떠랴. 맨발로 종일 뛰놀던 뒷산이 있고, 피가 끓는 사춘기에 이유 없이 분지르곤 했던 나무가 든든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고향을 버리는 것은 나를 벗어버리는 일이다. 김흥식 이장은 눈에 띄지 않게 마을을 가꾸어오다가 지난해부터 정부와 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시내에 있는 기획사에서는 집집마다 새 목재 간판을 다는 데 1천만 원 달라고 하더군요. 젊은 화가들에게 벽화 작업을 의뢰할까 했지만 역시 값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나섰습니다.” 유치원 교사인 아내가 동화책을 보고 집 외벽에 밑그림을 그리면 동네 어른, 아이들이 모여 색을 칠했다. 주민들의 숨겨진 장기가 하나 둘 발휘되었다. 이장의 형 김윤식 씨는 마을 어귀의 건물 옥상에 바람 불면 춤을 추는 비행기 모양 바람개비를 달았다. 이장과 손재주 좋은 그의 아들은 폐 나무판을 구해 물레방아와 목재 다리를 만들었다. 이렇듯 단합하는 날이면 이장은 동네 스피커로 ‘뽕짝’을 틀었다. ‘오늘은 일 하는 날’이라는 신호다. 이어지는 이장님의 멘트. “주민 여러분, 오늘은, 꽃밭을, 매어 보드라고요~.”
길에도, 담벽에도, 주민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자 동네를 거닐어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부부이자 단 하나뿐인 교회 ‘옥광 교회’의 한상구 목사와 아내 김희숙 씨는 그 변화가 신기했다. “폐가와 잔해들이 싹 정리되고 나니 동네가 원래 모습을 찾은 것 같아요. 30~40년 전 탄광 마을의 애환을 기억하는 분들이 오시면 특히 반가워합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동네가 예뻐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벽화와 꽃길은 사람들을 환기시키는 ‘마중물’ 같은 셈이다. 더 중요한 점은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유년 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는 모운동은 이제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3 모운동 마을 입구에 있는 ‘모운자료관’ 꼭대기에 김윤식 씨가 바람개비를 만들어 달았다.


모운동에 찾아가려면 영월역에서 주문리 가는 버스(번호가 없으니 꼭 물어봐야 한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모운동이 나온다. 숙박 마을 경로당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사람 수 관계없이 하룻밤에 5만 원. 한편 전망 좋은 위치에 있는 폐교를 아기자기하게 리모델링한 ‘하늘아래펜션’(033-374-8866)도 있는데, 심플한 외부와 달리 방은 고풍스러운 가구로 꾸몄다. 방 크기와 인원에 따라 10만~25만 원이며 비수기에는 30% 할인. 여행 코스 침엽수가 쭉쭉 뻗은 이국적인 숲길을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가 있는데, 가파르지 않으며 영월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한 시간쯤 가면 절벽에 있는 암자인 만경사를 만난다. 근처에 ‘모운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아찔한 낭떠러지 골짜기도 있다. 기타 마을에는 아직 슈퍼와 식당이 없다. 내년 초 주민들이 토속 음식을 판매하는 음식점을 열 예정이다. 문의 033-374-9549, www.moundong.com


1 올해는 복을 가져다 준다는 ‘칠복신’ 중 두 캐릭터를 논에다 그렸다. 왼쪽은 쌀 포대 위에 앉은 다이고쿠, 오른쪽은 어부들의 수호신 에비수로 경기 회복과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2003년에 그린 모나리자.

라이스 아트가 장관을 이룬 일본 이나카다테 마을
농부들이 논에 명화를 심었다
오랫동안 벼농사를 지어온 전형적인 농촌인 이나카다테 마을. 어느 날 문득 주민들은 ‘이곳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마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1987년 ‘우리마을에 오세요 추진협력위원회’를 만들었다. 여느 마을처럼 다양한 특산물을 선보이는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웬일, 몇 년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다시 고민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제안했다. “일단 우리가 스스로 기분 좋아지는 예쁜 마을을 만듭시다.” 그러자 어떤 어르신의 반론. “태어나서 내가 할 줄 아는 일은 벼농사밖에 없는데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잠시 침묵. 그리고 누군가 낸 아이디어로 온 마을은 신이 났다. “논을 캔버스 삼아 벼 이삭으로 그림을 그리자!”라는 의견이었다. 각기 다른 벼 품종으로 모내기를 하면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 노랑·보라·초록색 품종을 기본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 빨간색과 흰색 품종을 더했다. 그리하여 마을 주민들은 1993년 첫해에 2500㎡의 논으로 시작해 몇 년 뒤 1만 5000㎡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회화 작품을 만들어냈다.
동그라미나 세모 따위의 단순한 무늬 정도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호쿠사이의 명작 ‘후지 산의 36개 풍경’ 목판화 시리즈를 그려냈다. 사진을 언뜻 본 사람들이 ‘합성이겠지!’ 말할 만큼 놀랍도록 정교하다.


3 지난 10월 5일 이나카다테 마을에서 추수 행사가 열렸다. 이날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은 곱게 익은 ‘그림’을 낫으로 베고 볏단으로 묶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해가 갈수록 ‘아티스트 농부’들의 기량이 향상되었다. 2004년에는 원근법을 표현하게 되었고, 2005년에는 애잔한 표정의 우키요에(서민들의 풍속화를 담은 목판화 장르)를 섬세하게 그려낼 정도가 되었다. 매해 업그레이드되는 작품을 보러 찾아오는 관광객 수도 계속 늘어났다. “2004년 3만 명 정도였는데 지난해에는 24만 명의 손님이 다녀갔습니다. 얼마 전 10월 5일 벼 베기 행사를 치를 때도 북새통을 이뤘어요.” 마을 주민 사이토 신 씨의 말이다. 모내기와 추수하는 날에는 관광객들도 참여할 수 있다. “관광객이 많아지니 활기차서 좋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벼농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어 기쁩니다.” 올해는 일본 설화 속 칠복신인 다이고쿠와 에비수를 그려 경기 회복과 밝은 미래를 기원했다.
이 작품들은 마을의 최고층 건물이자 전망대인 6층 건물 옥상에서 볼 때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데, 가령 헬기를 타고 바라보면 사진 속 광경을 옆으로 잡아 늘인 모양이다. 언제 가장 멋진 그림을 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사이토 씨는 이렇게 답한다. “글자의 경우 여름부터 형태가 나타납니다. 가을이 되어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요. 하지만 언제 보아도 나름의 개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나카다테는 1년 내내 살아서 변화하는 그림을 품은 마을이다. 지방마다 특색 있는 축제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이곳은 유일하게 1년 내내 축제를 하는 마을이다.

이나카다테 마을에 찾아가려면 이나카다테 마을은 일본 아오모리 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동네다. 관광 홍보를 하는 인력이 따로 없어서 주민들이 논에서 일하다가 번갈아가며 마을 방문에 대한 문의를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로 된 홈페이지(www.vill.inakadate.aomori.jp)를 참고.


1,2 직선을 혐오하는 화가 훈데르트 바서의 감각이 마음껏 발휘된 시영 아파트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심지어 아파트 옥상뿐 아니라 벽면까지 나무와 화초가 자리 잡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지금까지 이곳 주민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주민들
‘작품 아파트’에 ‘나무 세입자’를 들이다

성냥갑처럼 반듯하게 구획된 건조한 시멘트 아파트가 아닌 춤추듯 자유롭고 알록달록한 아파트. 오스트리아 빈 시가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에게 의뢰해서 지은 시영 아파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다. 건축이나 주거 구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순례지의 하나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지은 지 벌써 22년째, 이곳이 꾸준히 빈의 명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외관뿐 아니라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지키는 주민들 덕분이다.
빈에 살며 훈데르트바서 재단의 한국 에이전트로 일하는 베로니카 킴 하우저 씨는 ‘유럽은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인 데 비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주민들은 좀 남다른 점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공동체 단위로 일을 도모하는 경우가 잦지만, 유럽은 남의 일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반상회나 정기적인 주민 모임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은 아파트를 살기 좋게 가꾸기 위해 힘을 모은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는 여느 유럽 아파트와는 달리 주민이 공동으로 쓰는 커뮤니티 룸이 있다. 평소에는 이곳에 사는 어린이들이 놀이터로 쓰지만,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 관해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이곳은 회의실이 된다. 테라스 정원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부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가 관광객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 등에 대해 종종 의견을 나눈다. 그러니 한국 아파트 주민들처럼 옆집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일은 없다.
또 하나의 예는 옥상 정원을 꾸미고 곳곳에 심은 꽃나무를 가꾸는 일이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옥상 테라스를 정원으로 꾸몄으며, 아파트 내부에서 뿌리를 내려 밖을 향해 뻗어나간 나무를 내 식구처럼 관리한다. 김은수 씨는 “자기 소유의 공간도 아닌데 참 열심이지요. 무엇보다 나무와 화초를 그저 의무적인 관리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이 ”라고 말한다. 그것도 대대손손 물려줄 주택도 아닌, 임대 시영 아파트에서 말이다.
이는 훈데르트바서 주민들의 자연에 대한 남다른 태도 때문이다. 이들은 ‘나무도 이 아파트의 세입자’라고 생각한다. 나무와 화초가 데커레이션의 수단이 아닌, 주민과 함께 사는 이웃이라고 여기니 나무에게도 마땅한 공간을 내주고 보살피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어떤 인테리어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채색 작업이나 레노베이션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지은 지 22년 된 이 아파트는 나날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아파트에 자연을 심는 디자인을 창시한 사람은 훈데르트바서라는 한 명의 예술가였지만, 나무를 아파트의 공동 세입자로 인정하며 지금껏 무성하게 자랄 수 있도록 가꾸어온 것은 아파트 주민 모두다. 이 고마운 ‘나무 세입자’ 덕분에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주민들은 빈 시내에 있는 인근 아파트에 비해 소음은 훨씬 적고 산소율은 높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 찾아가려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주민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안타깝지만 바깥에서만 봐야 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슈베덴플라츠 역에서 내려 트램 N번으로 갈아타고 헤츠가세에서 내린다. 곳곳에 있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이정표를 따라가면 찾기 쉽다. 궁금한 점은 홈페이지(www.hundertwasserhouse.at)를 통해 문의하도록 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