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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_일러스트와 만화로 떠나는 여행 내 손으로 추억하는 그림 견문록
백과사전에서 검색한 파리의 여행 정보보다 자기 색 강한 누군가가 읊은 일기형 여행기가 인기 있는 요즘이다. 그림으로 치면 엽서 같은 전형적인 구도의 사진보다는 상상력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만화나 일러스트가 반갑다는 뜻이다.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기록한 견문록에서는 2층 건물보다 처음 보는 낙타가 더 크고 황톳길이 빨갛게 이글거린다. 여행을 간다면 이들처럼 상상하라.생각의 경계가 국경을 뛰어넘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 경연미 씨의 인도 여행
일러스트레이터 경연미(www.yunmee.com) 씨는 인도를 추억하면 색이 먼저 떠오른단다.
“형광 주황색 조끼에 흰색 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를 만났어요. 머릿기름을 발라 옆으로 넘긴 머리에 진초록색터번을 두르고 목에는 핫 핑크색 스카프를 했더군요. 건물 벽면도 빛 바랜 올리브색, 코발트색, 황토빛 등 다채로웠는데, 좀 떨어져 서서 겹쳐서 보면 더욱 장관이었지요.” 특히 건물 밖에 어지러이 널린 빨래 사이로 저녁 노을이 스며들면 황홀할 지경이었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즈음에는 ‘인도의 햇살은 오렌지색이 아닐까?’라고 의심해보기도 했다. 찬란한 색으로 남은 인도 여행을 반추하니 코끼리나 낙타, 소 무리가 자동차, 오토바이, 사람들 사이로 한가로이 거닐던 풍경이 떠올라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수도 델리의 도심 풍경과 사막 자이살메르의 풍경이 공존한다. 특히 인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아!’ 하고 떠올릴 만큼 치열하게 흥정하던 릭샤 기사들, 사진 찍히고 싶어 하던 아이들의 하얀 웃음, 길가에 쪼그려 앉은 아저씨의 비쩍 마른 다리 같은 에피소드로 가득한 그림이다. 런던, 뉴욕, 한국을 오가며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틈틈이 여행을 즐기는 그의 일러스트 여행기를 조만간 홈페이지에서 만나길 기대해본다.




박재동 화백이 스케치한 실크로드 기행
한겨레신문의 만평 ‘한겨레 그림판’으로 유명한 만화가 박재동 화백은 34일 동안 실크로드를 여행하며 펜으로 5백여 장의 스케치를 그렸다. 여기에 탁월한 유머가 깃든 에피소드와 고고학적 지식이 담긴 글을 더해 책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1, 2>(한겨레출판)로 묶었다. 영화감독 장선우 씨와 함께 장편 애니메이션 <바리데기>를 준비하기 위해 바리데기 공주가 지나간 길과 중첩되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로 취재차 떠난 여행이었다. 중국 자금성에서 출발해 서안, 난주, 돈황, 투르판, 옥문관, 타클라마칸 사막, 율두스 초원, 인도 델리 등을 돌며 인상적인 풍경과 사람들을 펜 하나로 그렸다. “감흥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일행들이 쉬거나 노는 동안 혼자 쪼그려 앉아 계속 그렸어요. 가져간 펜이 동나서 일행의 펜을 얻어 써야 했을 정도였죠.” 처음에는 신선이 노닐 법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압도되었는데, 다시 볼 일 없을 그에게 지극한 인정을 베푼 유목민들의 인정에 차츰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사람의 살 덩어리 같은 사막의 모래 언덕’처럼 아스라한 풍경 그림도 인상적이지만 바람을 맞아 머리가 헝클어진 그에게 헤어밴드를 건넨 가난한 소녀, 그림 그리는 그를 졸졸 쫓아온 소년 등 그와 우정을 나눈 이들의 인물 그림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문다. 단번에 핵심을 잡아내는 화백의 펜 선에서 구두 고치는 성자, 양탄자 짜는 장인 등을 바라보는 그의 겸허한 시선이 묻어난다.


디자이너 전용성 씨의 산티아고 순례기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전용성 씨는 반 고흐가 왜 그토록 눈부신 원색으로 프로방스를 그렸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제게 스페인은 원색의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한 듯 깊고 쨍쨍하게 보였어요. 고흐도 보이는 대로 그렸을 거예요.”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는 디자이너 전용성 씨는 프랑스 남부의 국경 지대인 생장피드포르부터 스페인 북서부의 성지인 산티아고까지 1200km에 이르는 길을 35일 동안 걸어서 횡단하면서 매일 그림일기를 남겼다. 크레파스,4B연필, 붓펜 등으로 거칠고 단순하게 그렸다. 이렇게 그린 일러스트를 동행한 사진가 황우섭 씨의 사진과 한데 모아 <두 남자의 산티아고 순례 일기>(한길사)를 냈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고 또 걸었으니, 그의 그림에는 걷는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인생이 곧 길 위의 여행과도 같지만, 사람은 편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마련인지라 익숙한 것에 기대며 살아가죠. 그래서 저는 집을 떠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먼 길로 저를 내몰았어요.” 그러자 ‘익숙함’이란 놈의 등 뒤에 간사하게 숨어서 보이지 않았던 자아가 드러났다. 산티아고 순례는 쉰 넘어 제일 잘한 일임이 분명했다. 이를 기릴 겸, 돌아온 뒤 다시 한 번 여행을 반추하는 우드컷 페인팅(목판화) 작품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다.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정우열 씨의 도쿄 여행
강아지 올드독Olddog은 말하자면 TV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옆에서 조근조근 웃긴 이야기를 쏟아내는 친구녀석 같은 캐릭터다.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인 정우열 씨는 사람 대신 이 올드독의 입을 통해 일상다반사를 말하는 만화 <올드독 다이어리>(blog.naver.com/hhoro)를 연재하고 있다. 그가 아내와 함께 도쿄에 다녀와 그린 <올드독의 여행 노트>(tokyo.freemode.com/Story)는 여행지를 망원경 대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한 만화여행기다. 도쿄의 다이칸야마, 시부야, 에도 도쿄 다테모노엔 등에 간 그는 올드독식의 수다 만평을 아기자기하게 펼친다. “여행 정보는 책에 잘 나와 있잖아요. 저는 여행자인 제가 제일 재미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를 뽑아서 그렸어요.” ‘시부야~ 시부야아~’라는 지하철 안내 방송 멘트가 시골 할아버지의 음성을 닮아서 인상적이었다는 올드독의 감수성에 접속한 블로그 방문객들은 자신의 여행 기억을 새삼 끄집어낸다. 5편을 읽으면 어쩐지 도쿄의 만물 가게인 ‘도큐핸즈’에 반드시 가봐야 할 것 같다. 친구의 꼬드김처럼 구체적이고 위트 있다. 그 유혹은 매장 사진이 담긴 여행 책자를 읽을 때보다 강렬하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