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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기울여 들어보니]목수가 된 배우 천호진 씨 무심한 남자의 진심 투박한 나무의 온기
강한 사내의 어깨와, 상처받은 사내의 굽은 등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배우 천호진 씨. 무뚝뚝함과 온기를 함께 지닌 이 배우가 10년 전부터 가구 만드는 일에 빠져 있다. 손맛 나는 그의 가구는 투박하지만 척박하지 않은 그의 연기와, 단단한 나무 같은 그를 닮았다.


기압이 낮은 날이었고, 열기가 손가락 사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희부연 역광 속에서 독특하게 몸을 꼰 포즈로 서 있었다. 모랫빛이 섞인 머리칼, 꺼실한 수염, 색 바랜 셔츠에 낡은 청바지, 등산용 워커…. 역광을 받아 더 왜곡된 그 실루엣은 술배가 큰 노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톱밥을 눈처럼 뒤집어쓴 채 그가 방심한 낯빛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누구하고 악수할 때 손이 주는 느낌이 중요해요. 손이 거칠거칠하고 남자 손 같으면 괜히 그 사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죠. 내 손은 굉장히 ‘노가다’ 손이거든요. 내 손이 이렇게 변해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나무 만지는 거, 이거 굉장히 힘든 노동이에요. 노동하면 마음이 편해요.” 실제로 그가 부두 노동자 같은 손으로 커피 잔을 쥐는데 잔이 장난감 같았다.
저 푸석한 머리와 대충 걸친 옷차림에는 우리 아버지 또는 아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투박하지만 척박하지 않은 야성의 사내. 순간 그가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Old & Wise’를 부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카메라를 한 번도 응시하지 않은 채, 가사가 나오는 노래방 화면도 쳐다보지 않고 그가 노래를 불렀었다. 그 무심한 진심. 어린 남자는 품을 수 없는 그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황놀부 집 막내 아들도 오버랩됐다. 사회에 불만이 많지만 전통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젊은 농부의 모습.

배우 천호진 씨.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주먹이 운다> <혈의 누> <좋지 아니한가> 같은 ‘웰메이드 영화’를 거치며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난 배우’라는 갈채를 받는 그다. 하지만 늘 조연의 자리가 더 낯익은 배우. “나이가 든다는 건 인생을 조연의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어요. ‘사람이 보이는’ 영화라면, 휴머니즘이 있는 영화라면 난 언제든 할 거예요.” 신은 나이 든 사람에게 관찰자적 감정을 먼저 선물로 주고, 더 나이 먹으면 전지적 가슴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학교를 뛰쳐나온 아들(권상우 분)에게 그가 툭 건네는 말이 있다. “그래… 꼭 대학 나와야 사람 되냐? 근데, 이소룡이는 대학 나왔데냐?” 그의 말대로 조연의 눈으로 인생을 보게 된, 그래서 전지적 가슴으로 아들을 대할 수 있는 아버지만이 가능한 대사다. 바로 사람의 가슴을 데우는 휴머니즘. “나는 때리고 부수고 맞고 욕하고 이런 영화를 너무 싫어해요. 주먹질하더라도 사람은 죽이지 말아야 하고, 조직폭력배, 사기꾼은 나오지 말아야 하고, 이런 고집이 있어요. 아,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에 조폭 나온다고요? 그건 처음에 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는데 제작자인 차승재 대표가 고등학교 동창이어서 했지. 그런데 거기서도 뭐, 어린 친구들이 이 영화 보고 조폭 싫어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었어요.”

때리고 부수는 영화를 싫어한다는 그를 두고 정두홍 무술감독은 액션 연기를 가장 만족스럽게 소화하는 배우로 꼽았다. 실제로 그는 태권도, 유도도 수준급이고 암벽 등반에도 한동안 미쳐 있었다. “아버지한테 고마워해야죠. 그런 피를 물려줘서. 그래도 난 싸움은 잘 못해요.” 왕년의 프로레슬러 천규덕 씨가 그의 아버지다. ‘박치기 왕’ 김일, ‘비호’ 장영철과 함께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당수 왕’ 천규덕. 그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장충체육관과 문화체육관 앞이 장사진을 이루곤 했다. “난 우리 영감을 아주 좋아했어요. 운동선수들이 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인데 자기 직업을 평생 동안 참 열심히 했죠. 나중에 잘 끝내기도 하셨고. 늘 내게 ‘돈 못 벌어 미안하다’고 했지만 뭘…. 나도 아버지처럼 식솔들 밥줄 안 끊게 하면서 평생 잘 해내고 싶어요. 연기가 내 밥줄이죠. 드라마 찍고 영화 찍고 돈 벌어서 자식들 대학도 보내고 그러다 힘들면 대출도 받고. 뭐 그렇게 사는 거죠. 하하. 나도 통장에 돈 떨어지면 안절부절하고 마이너스 통장 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니까.” 감정의 침입이라곤 한 치도 없는 눈으로 말하던 그가 아버지 이야기에서 마침내 발열하며 웃었다.


김포시 대곶면의 그의 가구 공장(그는 ‘작업실’이라는 말 대신 ‘공장’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에서. 공장에서 키우던 애견 똘똘이가 길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개 누리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 이후로 이 공장 식구가 됐다.

고등학교 때 본 <디어 헌터>로 배우의 꿈을 꾸게 된 소년, 로버트 드니로가 베트남전 끝나고 돌아와 메릴 스트립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여관방 들어가서 앉을 때 흐르던 그 ‘카바티나’ 연주에서 그만 마음을 놓은 그, ‘음악, 연기, 감정, 이런 게 한데 어울리면 이런 필이 오는구나’ 충격 받고 배우 하기로 결심한 남자, 배우라면 ‘딴따라’라고 보던 시절이니 일단 대학 입학만 하자고 결심하고 들어간 인하대 화학과 1학년생, 휴학하고 군대 다녀와 바로 붙은 MBC 14기 탤런트 시험, 남산 영화진흥공사 지하 녹음실에서 ‘준비, 땅!’ 하면 혹시 한 글자라도 틀릴까(한 군데 틀리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조마조마하며 몰두한 후시녹음 시절, 첫 영화 <욕망의 거리> 하면서 출연료로 어음 받던 사연, 이규형 감독과 일 년 반 동안 여관에서 지내면서 만든 <청블루스켓치>로 일약 청춘스타 반열에 올랐던 시절, <공포의 외인구단>에서의 마동탁 역, 코미디언 김미화 씨와 함께 했던 <코미디 세상만사>의 시트콤, “나쁜 놈들아, 다시 내가 영화판으로 돌아오나 봐라” 하며 떨치고 돌아와서 한동안 탤런트로 살았던 배우, 그리고 13년 만에 다시 돌아와 찍은 <2009 로스트 메모리즈>, 테러 진압 요원으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장동건보다 더 멋져”라는 환성을 휘몰았던 그, 이후 이어진 ‘천호진표’ 눌러 담는 듯한 영화 연기의 작렬, 그리고 한국 나이로 올해 마흔아홉 살의 남자, 이게 배우로 살아온 ‘천호진’의 이력이다. 다른 행성에 살도록 운명 지워진 스타처럼 보이지 않는, 그의 투박한 과거가 마음을 끈다.
다시 영화판에 돌아와 선보인 많은 작품에서 그는 ‘저지르고 날뛰는’ 아들을 일으켜주는 전지적 가슴의 아버지거나, 표정 하나에도 ‘세월이 있는’ 아재였다. <주먹이 운다>에서 거리의 매 맞는 복서 최민식에게 다가가 뜨끈한 우동 한 그릇을 내미는 사내 천호진이 그랬다. 숨은 명작이라고 할 만한 <좋지 아니한가>에서 밥상머리에서도 아내에게 한편으로 밀려나 있고 심인성 발기불능으로 아내에게 면박당하는 모습에서는 입 안 가득 쓴맛만 남는 쓸쓸함이 몰려왔다. 그의 연기는 강한 사내의 어깨와, 상처받은 사내의 굽은 등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가 라디오에서 듣고 즐겨 써먹게 됐다는 소설가 박범신 씨의 말, “어떻게 글을 쓰냐고요? 나를 상당히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놔두면 글이 나와요”가 떠올랐다. 그가 만들어낸 차갑거나 애틋한 연기도 다 이 줄기와 비슷한 것이리라 싶었다. 굳세지만 또 한편, 달걀 속껍질처럼 얇은 막의 외로움이 비치는 그의 연기. 그리고 ‘저 남자의 사연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하는 그 눈빛.

“나는 배우가 적어도 자기 나이보다 7~8년은 차이를 두고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흔 살 배역을 마흔일곱 살 배우가 하고. 그 시절을 경험해본 사람이라야 더하고 빼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니까. 그럼 무의식적으로 표정 나오게 돼 있다니까. 손만 나오는 장면이어도 나이 먹은 배우는 어딘지 모르게 차이가 나요. 그런 디테일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나이배기의 힘이지.”
실제로 그는 연기가 머리에서 나오는 재주가 아님을, 오래 걸어온 발바닥의 굳은살이나 개울을 건너다 넘어져 생긴 상처에서 나오는 것임을,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젊었을 땐 내 눈이 뭔가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빛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그땐 욕망도 열망도 커서 그 고통이 눈으로 다 나왔던 거죠. 근데 지금은 좀 낫지 않나? 흐흐흐. 좋은 얼굴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나이 들어 그 얼굴이 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진짜 삶이 만들어낸 눈가의 주름이 그에게 있다. 그가 꾹꾹 눌러 말하는 ‘나이배기의 힘’이 만들어낸 주름.
농촌에서 벼 익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았다는, 그래서 TV 드라마로는 자신이 10년 6개월을 했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요즘 김포의 고추밭 옆 대형 컨테이너 박스(그는 ‘공장’이라고 부른다)에서 나무를 다듬으며 살고 있다. 전직이 목수인 해리슨 포드는 아직도 완벽한 도구가 갖춰진 목공실에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쓴다던데, 그와 해리슨 포드의 목공 실력을 견주면 누가 이길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쳐 갔다. 10년 전 취미 삼아 시작한 그의 목공예는 치열한 독학으로 이어졌다. 이젠 생활 목공 DIY 회사 ‘만들고’의 어엿한 ‘대표이사’ 직함도 갖게 됐다. 무심함 속에 진심이 담긴 그와 투박하지만 손맛 나는 나무. 잘 어울리는 조합 같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구는 그의 품성처럼, 그의 연기처럼 수수하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한번 슥 쓰다듬어주고 싶은 가구다. ‘셰이커 스타일’이라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그보다는 컨트리 스타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배우는 자유 직업이기 때문에 취미가 없으면 굉장히 허망해져요. 집중할 곳이 필요해서 시작한 건데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내 성격하고도 맞았나 봐. 가구 만들다 보면 기계 쓸 일이 많은데 활달한 성격은 다치기 쉬워요. 또 손맛 좋아하는 성격하고도 맞나 봐요. 이거 잘못 말하면 몰매 맞을 얘긴데, 기계 문명이 발달한 서양에서도 사람 손으로 직접 하는 건 항상 가치가 유지돼요. 근데 우리나라는 ‘명인’ ‘장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지, 손맛을 귀중하게 여기는 문화 자체는 거의 없어진 것 같아. 오히려 장인보다 달인을 더 원하는 사회 같아요. 사람이 중요한데….” 이 말에서 그의 유리알 같은 눈이 유난히 번뜩였다.
“시작한 지 한 10년 됐는데 처음엔 뭘 어떻게 배우는지도 몰라 그냥 외국 책과 외국 동영상 보면서 독학했어요. 나무를 만지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노동하는 농부의 느낌인 것 같아요. 내 성격에 그런 게 있나 봐요. 땀 흘려 노동하는 거 즐기는. 하하. 이 나무 일도 끈기 없으면 못해. 어휴. 하나하나 얼마나 힘든데요. 근데 연기도 마찬가지지. 연기한 지 한 25년 됐나? 근데 할 때마다 힘들어서 골백번도 더 그만두고 싶은걸요. 산다는 게 다 힘든 거죠, 뭘.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데 도대체 왜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칠을 해보고 싶어서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과정은 너무 힘든데 다 마무리해놓고 화장 입히는 거잖아. 그땐 좀 흥분되죠. 근데 나는 끈기가 좀 있어요. 옛날에 애들 컴퓨터 가르쳐준다고 컴퓨터 한 대를 샀는데 뭘 알아야 말이지. 책을 들여다보는데 통 모르겠어서 출판사까지 찾아갔어요. 이거 배우면 재밌을 거 같은데 좀 가르쳐달라고. 그래서 나는 모뎀 시절부터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됐죠.” 옹골진 끈기로 나무 만지는 남자, 천호진 씨.


그가 운영 중인 생활 목공 DIY 회사 ‘만들고’는 8월 말 인터넷 쇼핑몰(www.mandulgo.com) 오픈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동할 계획이다. 대부분 좁은 베란다에서도 드라이버 하나로 조립할 수 있는 집성 판재 소재의 반조립 제품을 판매할 예정이다. 그는 10여 년 동안 쌓은 목공 지식을 ‘만들고’ 블로그(blog.daum.net/mandulgo)에서 직접 동영상으로 강의하고 있다.

급커브를 튼 것처럼 갑자기 그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바라는 거, 거창한 거 아니에요. 영화 끝나고 집에 가서 웅크리고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거나 밥 먹다가 불현듯 ‘아, 그런 얘기가 있었구나’ 하고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런 영화, 그런 연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초원의 집>을 좋아한다니까. 뭐 내가 만드는 가구도 그런 거 아니겠어요? 우와, 촌놈 같죠?” 모름지기 남자는 꿈과 이상으로 ‘남자’가 유지된다. 꿈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엔 바람이 잔뜩 침입해 있다.
“가족이요? 기자님도 결혼해봤으니까 알잖아요.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다 보면 어느 날 ‘어, 왜 내가 엄마랑 똑같이 살고 있지?’ 하는 때가 있잖아요. 분명히. 니도 내도 튀어봤자 벼룩이다, 사는 거 다 한끗 차이다, 그렇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거, 그게 사는 거고 가족이고 그렇죠, 뭘. 자식이 연기하겠다면요? 어이구, 그럼 갖다 묻어버려야지. 하하. 난 운이 좋은 배우예요. 운이 나쁜 경우가 더 많은데 어떻게 자식한테 이 일을….”
그러고 보니 그의 말 중 반은 ‘운이 좋았어요’ ‘미안해요’였다. 자신이 땀 흘려 얻어낸 것도 결국은 알 수 없는 힘의 그분, 운명이 도와준 거라는 그 사람. 그리고 무뚝뚝하고 거칠거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성품의 모범생 기질이 그에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촬영하는 내내 “활동사진 안에서 움직여야 배우지, 그 밖에서 다 까발려지는 건 배우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사진 안 찍고 인터뷰 안 하고 싶었는데, 괜히 한다고 약속해가지고, 어이구. 나는 영화 안 할 땐 그냥 필부일 뿐이에요”라며 스틸 카메라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그 남자. 그를 보며 배우 허장강 씨 부인의 명언 “배우가 분 바를 때 배우지, 분 안 바르면 배우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바람 부는 거리로 그를 떠나오는데, 다듬지 않은 생나무처럼 거칠거칠한 사나이의 온기가 가슴에 남았다. 웃어 보이지만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특유의 표정으로 그가 공장 안으로 걸어갔다. 그 뒤통수에 대고 난 웃어 보였다. 그것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는 것처럼.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