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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서양화가 류제비 씨 박하사탕 맛 정물화

8월호 표지 작품 ‘바람의 숨결’(2008)에 류제비 씨의 모습을 더해 이미지를 재구성했습니다.
테이블 위의 작품은 ‘파프리카’(2008)와 ‘바람의 숨결’(2008) 작품 중 일부입니다.


* 서양화가 류제비 씨는 197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94년 영남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2001년 대구 삼성금융플라자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난 5월 동원화랑의 전시 <정물산책>에 이르기까지 개인전과 단체전을 20여 회 열었다.


작열하는 색! 류제비 씨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눈이 부셨다. 이글거리는 색이 다른 원색과 강렬하게 부딪히면서 면을 이루는 그림. 이러한 화면 구성이 하도 낯설어 당황스러웠다.
“저도 그랬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고상한 색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 작품을 보면 처음엔 ‘색상이 참 촌스럽다’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바로 이런 반응이야말로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해요.”
그 카타르시스는 청량감과 닿아 있다. 박하사탕을 빨다가 ‘호오’ 하고 숨을 들이켰을 때 느낄 수 있는 상쾌한 기분. 자꾸 들여다볼수록 류제비 씨의 팽팽하게 대결하는 원색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낯선 기분은 눈에서 그간 익숙했던 색의 기준이 벗겨지면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색이 그토록 강렬한 것은 그가 모든 현상을 색으로 보고 색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형태를 되도록이면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다 보니 회화에서는 색으로 대비를 주어야 의미가 전달되더라고요.” 그러나 그가 원색을 가볍게 쓰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대학교 때에는 인생을 워낙 진지하게 살아서 색이 칙칙했다. 예술이란 저 멀리 있는 줄로만 알고 헤매느라 그랬다. 괴로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황당했다. 찾으려던 그 예술은 밖에 있지 않았다. 이미 그의 안에 있었다. 지난한 고민 끝에 ‘예술은 종소리’임을 깨달았다. “봤을 때 ‘땡’ 하고 바로 감이 와야, 종소리가 번지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좋은 작품이죠. 느끼는 데 설명이 필요하다면 좋은 작품이 아닙니다.” 관념 속에서 한껏 심각하고 숭고해져 있던 예술을 벗으니 비로소 그림에서 박하사탕 맛이 선연히 번졌다.

류제비 씨가 정물화에 천착한 이유도 ‘파랑새’ 이야기와 같다. 치기 어린 시절, 새로운 세상을 찾아 여행을 다니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였다. 당시는 모든 것을 밖에서 구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파랑새는 집에 있었다. “태초에 인간이 떠오르는 태양이나 풀잎, 이슬을 보고 얼마나 경이로웠을까요. 우리도 익숙한 일상을 늘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삶이 총천연색으로 보일 테지요.” 어느 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유리그릇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날로 정물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 노트에 썼다. “실내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세상은 다시 태어나고, 움직임 없는 정물마저 생동하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빛은 사물의 모습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묘한 리듬이 정물을 감싸며 밝고 단순한 이미지가 방 안을 맴돈다.”
8월호 표지 작품인 ‘바람의 숨결’을 비롯한 그의 정물화에는 늘 유리그릇이 놓여 있다. “유리그릇은 뚝배기와 달리 빛과 색을 투과하면서도, 원래 색과는 다르게 일그러뜨리는 역할을 하지요. 가령 물에 손가락을 넣으면 왜곡되어 보이듯 말이죠. 우리네 삶도 그래요. 인생도 밖에서 바라볼 때와 안에 들어가서 볼 때가 달라요.” 그는 유리그릇을 통해 왜곡된 단면을 보면서 거꾸로 실재를 떠올린다고 말한다.
꽃을 많이 그리는 이유는 꽃잎보다는 쭉쭉 뻗은 줄기에 반했기 때문이다. 특히 줄기가 굵고 길게 뻗은 카라를 좋아한다. “제 그림 속 꽃은 일반적인 꽃꽂이 방식을 따르지 않아요. 저는 얌전한 꽃꽂이보다는 툭 던져놓은 듯 자유분방한 꽃꽂이가 좋아요.” 두서없이 사방으로 얼굴을 향한 꽃이 참 씩씩해 보인다. 예술가들이 대개 ‘꽃’ 하면 만개한 뒤 사라지는, 유한성의 심벌로 표현하는 데 비해 류제비 씨의 꽃은 처연하거나 야들야들하기보다는 드세고 힘이 있다. 야생의 기운을 품은 꽃이다.
그러고 보면 생명성은 아마존 정글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처럼 화훼 시장에서 산 카라 한 다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디에 살아도 생동할 수 있게 된 계기는 그에게 시심詩心을 열어준 랭보의 시 ‘감각’이다. “여름 아청빛 저녁, 보리 날 쿡쿡 찔러대는/오솔길 걸어가며 잔풀을 내리 밟으면/꿈꾸던 나도 발밑에 그 신선함 느끼리/바람은 내 맨머리를 씻겨줄게고.(후략)”

* 8월호 표지 이야기는 동원화랑의 협조로 진행되었습니다. 류제비 씨의 작품은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KIAF의 동원화랑 부스에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문의 053-423-1300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