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스무 살이었던 노라노 씨는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군 폭격기 B-27을 개조한 노스웨스트 항공사 여객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혼의 아픔을 안고 결정한 일이었다. 당시 ‘노명자’가 ‘노라노’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날 때처럼 천둥이 꽝꽝 치는 엄청난 일이었다. 지금이야 미국 여행이 어렵지 않지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57달러였던 그 시절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편도 티켓이 무려 1천 달러였다.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두 번째 한국인 여성 승객이었다. 물리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아녀자가 홀홀단신 미국 유학길에 오를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혁명적이었다. 어쩌면 집이라는 굴레를 벗고 자기 인생을 찾으러 떠난다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 이야기의 후속편을 노라노 씨가 완성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든한 살이 된 지금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 현재진행형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최초’를 의식하지 않았고 ‘최고’도 목표가 아니었다 지난해 노라노 씨가 여든 살을 맞아 발간한 자전적 에세이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황금나침반)를 읽고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염색한 미군 군복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계가 있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렇다. 1940년대 우리나라 문화에는 ‘패션’이란 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내려온 ‘멋쟁이 유전자’를 지닌 덕분에 남들보다 유난히 옷 매무새가 감각적이었던 노라노 씨를 한 외국 부인이 눈여겨보았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해보는 게 어때요?”라는 그 부인의 한마디가 노라노 씨의 패션 디자인 인생 60년을 연 셈이다.
황무지에서 출발했으니 그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최초의 유학파 패션 디자이너, 서울 반도 호텔에서 연 국내 최초의 패션쇼, 맞춤복이 전부였던 1966년에 개최한 국내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 이렇듯 패션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사실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국내에서 처음 활동할 때에는 요즘처럼 패션계의 거장이나 소위 ‘패셔니스타’들을 조망하는 잡지나 방송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나는 수줍음 많은 기술자일 뿐 사교적이거나 사회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디자이너 노라노 씨는 미국에서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한 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때 명동에 의상 숍 ‘노라노의 집’을 열면서 서울 시내에서 고급 부티크로 성공했다. 이런 전성기는 30~40대에서 그치지 않고, 50대에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한 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이어진다. 52세가 되던 1979년 뉴욕 맨해튼 7번가 패션 거리에 ‘노라 노Nora Noh’ 간판을 걸고 쇼룸을 열었다. 1949년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패션의 중심지 뉴욕 7번가에 정식으로 진출하는 데 30년이 걸린 셈. “쇼룸을 열자 뉴욕의 고급 부티크 바이어들로부터 주문이 쏟아졌어요. 첫날 주문량이 자그마치 7백 벌이더군요. 사무실 팩시밀리로 주문서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데, 멍하더군요.” 성공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결과가 굉장한 것인지도 몰랐단다. 신나서 전력투구했을 뿐이었다.
(위) 노라노 씨는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검정과 회색 옷을 즐겨 입었다. 출근할 때마다 구두와 백을 바꾸는 번거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의상은 촬영을 위해 몇 일 전에 직접 디자인한 정장이다.
1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6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던 손.
2 노라노 씨는 “과하지 않게 자신을 단장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1947
성공의 출발점은 가슴속의 분노였다. “여성에게 억압이나 제약이 많던 그 시절, 실패나 아픔으로 인한 분노는 성공의 씨앗이 되었어요. 제 분노요? 결혼해서 실패한 것이겠죠. 그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열심히 살게 된 것 같아 감사하지요.” 한번 떨어져봐야 그 충격으로 튀어 오를 수 있는 법이다. 그는 당시 여성에게 큰 오점과도 같은 이혼을 경험한 뒤 어린 나이에도 무서울 게 없어졌다. 잃을 게 없으니 용기가 생겼다.
“건달 정신으로 살아요” 패션 중심지에서 원 없이 전성기를 누렸다면 이쯤 되어 쉬고 싶지 않을까? 대체 노라노 씨를 60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글쎄,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여전히 의욕이 있고 건강하니까 계속 일을 즐겨 하지요.”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던 게 잘못이다. 그인들 80세까지 일할 줄 알았겠는가. “성공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목적의식 가지고 일에 임하지 말라’고요. ‘무엇을 얼마큼 달성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해 전력투구하라고요. 그러면 좋은 작품이 절로 나와요.”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철들지 않아서 젊은 것 같다’며 웃는다. “저는 건달이에요, 고급 기술을 가진 건달.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것도 하고 싶어서 한 거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요. 제 열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아요.” 그는 ‘돈을 벌겠다’ ‘출세하겠다’ ‘지위를 얻겠다’ 따위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농담조로 말했지만, 기실 ‘건달 정신’을 갖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평생 뭔가를 소유하며 산 적이 없다. 그의 집은 마치 여행지에서 장기 투숙하는 오피스텔처럼 심플하다. 회사 경영권도 동생에게 있기 때문에 노라노 씨는 지금껏 사장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았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적도 없고, 딱히 돈을 쓸 곳도 없었다. “돈의 쓰임은 세 가지면 될 것 같아요. 우선 생계를 위해 먹고살아야 하고, 둘째 병이 나면 고칠 수 있어야 하고, 셋째, 공부할 학비가 있어야 하지요. 그다음에 여유가 된다면 집을 마련하는 데 쓰면 되지요.”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일곱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 뒤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평소 걸음걸이처럼 인생 또한 훨훨 자유롭다.
이마에 팔자 주름 없는 80대 그래서일까, 노라노 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마에 팔八자 주름이 없다. 유심히 관찰하면 젊은 사람들 중에도 말할 때마다 미간에 주름이 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80대인 그는 눈가의 진한 주름이 눈에 띌 뿐 팔자 주름이 없다. 단연코 성형수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말이다. “제게 팔자 주름이 없나요? 몰랐네요. 하긴 그래요. 저는 찡그려본 적이 없거든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워요.”
그렇다고 인생을 쉽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일이란 당연히 힘든 거예요. 쉬운 일은 없어요. 다만 저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요. 스트레스란 내가 할 수 있는 깜냥보다 더 많이 해내려고 할 때 생겨요. 잘났든 못났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그 이상을 가지려고 욕심 내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지요.” 물론 인생에서 ‘플러스 알파’라는 게 있다. 가령 달리기를 할 때 자기 능력치 이상으로 빠른 속도가 나오기도 한다. 실력이 아주 많이 누적되었을 때 어느 순간 딱 넘쳐서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보너스를 받은 듯 즐겁다.
욕심 내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니 정신이 건강하다.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도 열심히 돌본다. “누군가 묻더군요. 젊을 때 무슨 운동을 했냐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젊을 때 무슨 운동을 해요, 춤추고 놀면 그게 운동이지.’ 그렇게 매사 신나게 살다가 50대부터 몸 관리를 했어요. 처음으로 등산을 시작했고,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지요.” 매주 일요일 새벽 서울 근교의 산 정상에 올라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내려와서 제인 폰다가 출연하는 에어로빅 비디오를 보고 동작을 따라 했다. 30년 동안 하루 최대 두 갑 정도 피우던 담배는 50세에 끊을 결심을 하여 60세가 되었을 때 영영 이별했다.
요즘 그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서 아침 식사로 수프 한 그릇, 사과 반 쪽, 바나나 반 쪽, 토마토 반 쪽, 고구마나 빵 또는 와플 하나, 물 한 잔, 커피 한 잔을 먹는다. 식사한 뒤에는 매일 운동을 한다. 스트레칭 40분, 아령이나 자전거 운동 40분, 그리고 근처 도산공원 산책 40분 등이다. 50대부터 꾸준히 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허리가 곧고 걸음걸이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힘차다.
1 일은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숙제하듯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노라노 씨는 자신이 원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딸이나 며느리로 이어지는 그의 오래된 고객들, 그리고 의상 숍 가족과 모든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내년에 큰 행사를 열 예정이다.
2 청담동 노라노 씨의 숍(02- 542-2793) 위층에 있는 그의 자택. 꼭 필요한 것만 갖추어놓아 간소하다.
3 젊을 적 그는 모델 못지않게 늘씬하고 스타일리시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물세 살의 그는 블라우스와 개버딘 스커트 차림에 핸드백을 걸치고 피란을 떠났을 정도.
4 패션 잡지에 실린 그의 컬렉션 광고들.
내 인생 최고의 유행은 열정과 도전 50대에는 원숙한 디자이너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했다. 그는 출장 때문에 세계 일주를 일 년에 네 번이나 한 적도 있다. 60대 초반까지도 뉴욕과 홍콩, 일본 등지에 법인을 설립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70대부터 일을 줄였다. 대신 패션 역사의 산증인으로 후학을 위해 강연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80대가 된 요즘은 마무리 작업을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벌여온 일도 정리하고, 패션계를 위해 기록에 남겨야 할 것들은 챙겨놔야 한다.
“10년마다 인생을 ‘리폼’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무래도 몸이 먼저 ‘날 좀 신경 써줘’라고 외치거든요. 그에 맞게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일의 활동 반경을 변경한 것처럼 몸 관리도 10년 주기로 조금씩 철저하게 다져나갔다.
그럼 노라노 씨는 언제까지 현역에서 뛰고자 할까? “강연할 때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코코 샤넬이 활동을 접었다가 71세에 패션계에 컴백해 88세까지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지요. 그럼 난 90세까지만 일하면 코코 샤넬의 기록을 깬다고요.” 언제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숨 쉬는 동안에는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이고, 그렇기에 패션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산다는 게 뭔가요. 산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할 일이 없으면 봉사라도 해야지요. 앉아서 놀고 먹으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저 역시 건강이 나빠지고 기억력이 쇠퇴하게 되면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한 번도 ‘늙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요즘 때때로 기력이 조금 약해졌다는 변화를 느낀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나니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점이 좋다. 젊었을 때라면 자서전을 못 썼을 것 같다. 자서전을 낸다는 것은 발가벗고 남 앞에 서는 일인데, 남의 비판으로부터 다치기도 하던 젊을 적에는 엄두도 못 냈던 일이다.
노라노 씨는 “내 인생에서는 오직 열정과 도전이 최고의 유행처럼 들고 났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열정과 도전은 많은 이들의 도움 없이는 꺼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을 돌아봤을 때 단 한 가지 깊이 반성하는 게 있습니다. 사느라고 바빠서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인사를 못했어요.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 하고 돌아보면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시더라고요. 무척 마음이 아파요. 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건 제가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스미스 씨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성장한 것을 지켜본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니, 넌 나에게 빚이 없다. 그런데 만일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들거든 다음 세대에게 갚거라….’”
‘최초’를 의식하지 않았고 ‘최고’도 목표가 아니었다 지난해 노라노 씨가 여든 살을 맞아 발간한 자전적 에세이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황금나침반)를 읽고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염색한 미군 군복바지를 입고 다니던 전후의 그 극빈한 시절에도 어딘가에 패션계가 있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렇다. 1940년대 우리나라 문화에는 ‘패션’이란 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내려온 ‘멋쟁이 유전자’를 지닌 덕분에 남들보다 유난히 옷 매무새가 감각적이었던 노라노 씨를 한 외국 부인이 눈여겨보았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해보는 게 어때요?”라는 그 부인의 한마디가 노라노 씨의 패션 디자인 인생 60년을 연 셈이다.
황무지에서 출발했으니 그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최초의 유학파 패션 디자이너, 서울 반도 호텔에서 연 국내 최초의 패션쇼, 맞춤복이 전부였던 1966년에 개최한 국내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 이렇듯 패션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사실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국내에서 처음 활동할 때에는 요즘처럼 패션계의 거장이나 소위 ‘패셔니스타’들을 조망하는 잡지나 방송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나는 수줍음 많은 기술자일 뿐 사교적이거나 사회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디자이너 노라노 씨는 미국에서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한 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때 명동에 의상 숍 ‘노라노의 집’을 열면서 서울 시내에서 고급 부티크로 성공했다. 이런 전성기는 30~40대에서 그치지 않고, 50대에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한 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이어진다. 52세가 되던 1979년 뉴욕 맨해튼 7번가 패션 거리에 ‘노라 노Nora Noh’ 간판을 걸고 쇼룸을 열었다. 1949년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패션의 중심지 뉴욕 7번가에 정식으로 진출하는 데 30년이 걸린 셈. “쇼룸을 열자 뉴욕의 고급 부티크 바이어들로부터 주문이 쏟아졌어요. 첫날 주문량이 자그마치 7백 벌이더군요. 사무실 팩시밀리로 주문서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데, 멍하더군요.” 성공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결과가 굉장한 것인지도 몰랐단다. 신나서 전력투구했을 뿐이었다.
(위) 노라노 씨는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검정과 회색 옷을 즐겨 입었다. 출근할 때마다 구두와 백을 바꾸는 번거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의상은 촬영을 위해 몇 일 전에 직접 디자인한 정장이다.
1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6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던 손.
2 노라노 씨는 “과하지 않게 자신을 단장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1947
성공의 출발점은 가슴속의 분노였다. “여성에게 억압이나 제약이 많던 그 시절, 실패나 아픔으로 인한 분노는 성공의 씨앗이 되었어요. 제 분노요? 결혼해서 실패한 것이겠죠. 그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열심히 살게 된 것 같아 감사하지요.” 한번 떨어져봐야 그 충격으로 튀어 오를 수 있는 법이다. 그는 당시 여성에게 큰 오점과도 같은 이혼을 경험한 뒤 어린 나이에도 무서울 게 없어졌다. 잃을 게 없으니 용기가 생겼다.
“건달 정신으로 살아요” 패션 중심지에서 원 없이 전성기를 누렸다면 이쯤 되어 쉬고 싶지 않을까? 대체 노라노 씨를 60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글쎄,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여전히 의욕이 있고 건강하니까 계속 일을 즐겨 하지요.”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던 게 잘못이다. 그인들 80세까지 일할 줄 알았겠는가. “성공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목적의식 가지고 일에 임하지 말라’고요. ‘무엇을 얼마큼 달성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해 전력투구하라고요. 그러면 좋은 작품이 절로 나와요.”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철들지 않아서 젊은 것 같다’며 웃는다. “저는 건달이에요, 고급 기술을 가진 건달.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것도 하고 싶어서 한 거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요. 제 열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아요.” 그는 ‘돈을 벌겠다’ ‘출세하겠다’ ‘지위를 얻겠다’ 따위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농담조로 말했지만, 기실 ‘건달 정신’을 갖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평생 뭔가를 소유하며 산 적이 없다. 그의 집은 마치 여행지에서 장기 투숙하는 오피스텔처럼 심플하다. 회사 경영권도 동생에게 있기 때문에 노라노 씨는 지금껏 사장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았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적도 없고, 딱히 돈을 쓸 곳도 없었다. “돈의 쓰임은 세 가지면 될 것 같아요. 우선 생계를 위해 먹고살아야 하고, 둘째 병이 나면 고칠 수 있어야 하고, 셋째, 공부할 학비가 있어야 하지요. 그다음에 여유가 된다면 집을 마련하는 데 쓰면 되지요.”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일곱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 뒤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평소 걸음걸이처럼 인생 또한 훨훨 자유롭다.
이마에 팔자 주름 없는 80대 그래서일까, 노라노 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마에 팔八자 주름이 없다. 유심히 관찰하면 젊은 사람들 중에도 말할 때마다 미간에 주름이 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80대인 그는 눈가의 진한 주름이 눈에 띌 뿐 팔자 주름이 없다. 단연코 성형수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말이다. “제게 팔자 주름이 없나요? 몰랐네요. 하긴 그래요. 저는 찡그려본 적이 없거든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워요.”
그렇다고 인생을 쉽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일이란 당연히 힘든 거예요. 쉬운 일은 없어요. 다만 저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요. 스트레스란 내가 할 수 있는 깜냥보다 더 많이 해내려고 할 때 생겨요. 잘났든 못났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그 이상을 가지려고 욕심 내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지요.” 물론 인생에서 ‘플러스 알파’라는 게 있다. 가령 달리기를 할 때 자기 능력치 이상으로 빠른 속도가 나오기도 한다. 실력이 아주 많이 누적되었을 때 어느 순간 딱 넘쳐서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보너스를 받은 듯 즐겁다.
욕심 내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니 정신이 건강하다.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도 열심히 돌본다. “누군가 묻더군요. 젊을 때 무슨 운동을 했냐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젊을 때 무슨 운동을 해요, 춤추고 놀면 그게 운동이지.’ 그렇게 매사 신나게 살다가 50대부터 몸 관리를 했어요. 처음으로 등산을 시작했고,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지요.” 매주 일요일 새벽 서울 근교의 산 정상에 올라가 아침 식사를 하고, 내려와서 제인 폰다가 출연하는 에어로빅 비디오를 보고 동작을 따라 했다. 30년 동안 하루 최대 두 갑 정도 피우던 담배는 50세에 끊을 결심을 하여 60세가 되었을 때 영영 이별했다.
요즘 그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서 아침 식사로 수프 한 그릇, 사과 반 쪽, 바나나 반 쪽, 토마토 반 쪽, 고구마나 빵 또는 와플 하나, 물 한 잔, 커피 한 잔을 먹는다. 식사한 뒤에는 매일 운동을 한다. 스트레칭 40분, 아령이나 자전거 운동 40분, 그리고 근처 도산공원 산책 40분 등이다. 50대부터 꾸준히 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허리가 곧고 걸음걸이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도록 힘차다.
1 일은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숙제하듯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노라노 씨는 자신이 원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딸이나 며느리로 이어지는 그의 오래된 고객들, 그리고 의상 숍 가족과 모든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내년에 큰 행사를 열 예정이다.
2 청담동 노라노 씨의 숍(02- 542-2793) 위층에 있는 그의 자택. 꼭 필요한 것만 갖추어놓아 간소하다.
3 젊을 적 그는 모델 못지않게 늘씬하고 스타일리시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물세 살의 그는 블라우스와 개버딘 스커트 차림에 핸드백을 걸치고 피란을 떠났을 정도.
4 패션 잡지에 실린 그의 컬렉션 광고들.
내 인생 최고의 유행은 열정과 도전 50대에는 원숙한 디자이너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했다. 그는 출장 때문에 세계 일주를 일 년에 네 번이나 한 적도 있다. 60대 초반까지도 뉴욕과 홍콩, 일본 등지에 법인을 설립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70대부터 일을 줄였다. 대신 패션 역사의 산증인으로 후학을 위해 강연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80대가 된 요즘은 마무리 작업을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벌여온 일도 정리하고, 패션계를 위해 기록에 남겨야 할 것들은 챙겨놔야 한다.
“10년마다 인생을 ‘리폼’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무래도 몸이 먼저 ‘날 좀 신경 써줘’라고 외치거든요. 그에 맞게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일의 활동 반경을 변경한 것처럼 몸 관리도 10년 주기로 조금씩 철저하게 다져나갔다.
그럼 노라노 씨는 언제까지 현역에서 뛰고자 할까? “강연할 때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코코 샤넬이 활동을 접었다가 71세에 패션계에 컴백해 88세까지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지요. 그럼 난 90세까지만 일하면 코코 샤넬의 기록을 깬다고요.” 언제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숨 쉬는 동안에는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이고, 그렇기에 패션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산다는 게 뭔가요. 산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할 일이 없으면 봉사라도 해야지요. 앉아서 놀고 먹으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저 역시 건강이 나빠지고 기억력이 쇠퇴하게 되면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한 번도 ‘늙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요즘 때때로 기력이 조금 약해졌다는 변화를 느낀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나니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점이 좋다. 젊었을 때라면 자서전을 못 썼을 것 같다. 자서전을 낸다는 것은 발가벗고 남 앞에 서는 일인데, 남의 비판으로부터 다치기도 하던 젊을 적에는 엄두도 못 냈던 일이다.
노라노 씨는 “내 인생에서는 오직 열정과 도전이 최고의 유행처럼 들고 났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열정과 도전은 많은 이들의 도움 없이는 꺼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을 돌아봤을 때 단 한 가지 깊이 반성하는 게 있습니다. 사느라고 바빠서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인사를 못했어요.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 하고 돌아보면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시더라고요. 무척 마음이 아파요. 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건 제가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스미스 씨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성장한 것을 지켜본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으니, 넌 나에게 빚이 없다. 그런데 만일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이 들거든 다음 세대에게 갚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