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우리들의 엄마 시인, 이해인 수녀 집 없어서 집이 많은 나는 오늘도 시를 씁니다
삶과 시간 속에 묶인 인간, 자연 모두를 가엾이 여기는 이해인 수녀. 그는 수도생활 40년 만에 나서지 않고도 사랑하는 법 을, 뒤에 숨어서도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이제 수도자의 길이 예술 작품 같다고, 모든 이가 내 친척 같고 애인 같으니 이런 예술이 어디 있겠느냐며 뭉게구름 같은 얼굴로 웃었다. 최정상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록되는 그는 시인 생활 30년 만에, 쓸수록 쓸 말이 적어져 가장 단순한 침묵이 되니 이참에 삶이 시가 되는 예술을 만들어볼 참이다.

목단 꽃나무 둘레를 몇 번이나 서성이며 돌았던지 향기가 옷에 가득, 그림자도 옷에 가득합니다. 광안리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수도원 뜰 가운데 서서 이해인 수녀의 시 ‘꽃 멀미’를 읊어 봅니다.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서두르지 않는 호흡으로 점자책을 읽듯이 짚어 내려가던 그때, 그가 우리 앞에 섰습니다. 생각보다 조금 작은 몸피와, 꽃을 보면 코부터 들이대며 슬쩍 꺾어 들고는 ‘꽃도둑!’ 외치는 사랑스러운 습관과, 눈매를 조금 육중하게 만드는 안경과, 솔#의 음으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투와…. 새싹에 물 주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그 앞에서 3초 만에 애정이 불끈 샘솟습니다.
어쩌면 수도자의 시간에 개입하는 건 수월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날들은 밀폐돼 있고, 삶의 몇 가지 목록과 무관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수도자로 시인으로 감수해야 했던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행운이겠다고, 중뿔나게 욕심을 부려봤습니다. 올해로 수도 생활 40년, 시인 생활 30년을 맞이한 이해인 수녀의 2008년 봄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부디, 종부세· 꼼꼼하고 쫀쫀한 대통령·토익 시험 같은 단어는 밀쳐두고 시를 노래하는 마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뚜뚜뚜뚜 아홉 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뉴스가 나오는 이상한 공화국 시대에서 이해인 수녀의 글은 어떤 트임을 주었나, 기억해보세요. 1976년 그의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이래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1999), <작은 위로>(2002), <작은 기쁨>(2008), 산문집 <꽃삽>(1994), <기쁨이 열리는 창>(2004)….
서른 권이 넘는 책을 통해 그가 세상에 들이민 여백 같은 진실 말입니다. 삶과 시간 속에 묶인 인간, 자연 모두를 훼손된 존재로 가엾이 여기는 시인 앞에서 돌아온 탕자들은 무릎을 접고 와락 안겨왔습니다.

“수도원에 입회할 때는 나도 내가 시를 쓸 수 있을지 몰랐어요. 기도 중에 쓴 시를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들레의 영토’라는 이름으로 묶어 낸 건데, 사실은 <민들레의 영토> 한 권으로 끝났었어야지.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지. 독자들도 처음엔 수녀가 썼다 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주님 하는 이야기밖에 더 있겠나 했지. 하하. 초창기의 시들이 문학적인 기법, 이런 데서 빠지는지는 몰라도 좀 뭔가, 특별한 색깔이라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준 건 사실인 것 같고. 계속 팬레터 오고 신문이나 잡지 여기 저기서 조명을 하고 했지. 원치 않는 비판도 나오고 그럴 땐 괜히 시집을 내서 골치 아픈 존재가 됐구나 싶었어요. 우여곡절과 감당해야 될 어려움도 많았어요. 손님이 한번 와도 더 오고 전화가 와도 더 오고 하니까 항상 수도원에 미안한 마음에. 처음엔 수도원에서도 불안하게 생각했어. 수도자가 대중에게 너무 알려지니까. 그런 경험을 안 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수녀님에 비해서 나는 이렇게 수도생활을 못하고 있구나, 시 쓰느라 이러고 있구나 하는 갈등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하고 그랬는데. 이젠 그런 거조차도 다 받아들이고, 다른 수녀님에 대해 열등감 느낄 건 느끼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인정하면서 사니까 행복하게 되더라고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걸로 그냥 만족해요. 교과서에도 나오고. 하하.”
동아일보가 지난 25년간의 서점가 실적을 조사해 보도한 적이 있는데, 한 해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의 기록으로 이해인 수녀가 열한 번, 법정 스님이 아홉 번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안전한 항구 같은 그의 시는 그렇게 최정상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경제적 소용과는 분리된 것들입니다. 시집·산문집·번역서에 시 낭송 CD까지 합쳐 최소 5백만 부는 팔렸을 거라지만, 그 인세는 모두 수녀원으로 돌아간답니다. 수녀가 된다는 건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군요. 인세도 받고 세금도 내야 해서 ‘이명숙(이해인 수녀의 본명)’으로 된 통장이 있긴 하지만 수녀원 경리 담당자가 관리한다는 그 통장을 직접 본 적도 없다네요. 신용카드조차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부자, 우리 수녀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 마법의 성에 온 지 / 수십 년이 지났어요 /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 사랑의 마법에 / 아주 단숨에 걸리지는 못해 / 삶이 조금은 고달팠어요 / (중략) / 목숨 걸고 선택할 만하네요 / 죽을 때까지 열심히 / 이 마법을 즐기렵니다 / 욕심을 버릴수록 마법은 /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 영혼의 자유가 주인인 / 이 마법의 성으로 / 당신도 오실래요?”(‘마법의 성에서’ 중)

골방에 숨어 사람 목소리가 어떻게 라디오 기계 안에서 들려오는지 원리를 고심하던 소심한 소녀 이명숙도, 달리아 꽃 가득한 청파동 금융조합 사택 정원에서 딸 명숙이를 그윽히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도, 물 아래 옥돌 같은 4남매를 두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아버지 이야기도, 부산 범일동 문걸이네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피난 시절도, 언니들이 빌려 오는 <학원> 잡지를 몰래 읽던 초등학교 2학년짜리 문학소녀도, 삯바느질로 네 아이를 키우며 딸아이들 놀잇감으로 꽃골무와 노리개를 만들어주던 어머니도, 대학을 중퇴하고 어머니 대신 살림을 꾸리던 언니가 가르멜 수녀원으로 들어간 그날의 훌쩍거림도, ‘아, 나는 그를 찾아 남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더욱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들 하건만’ 하고 카를 부세의 시를 읊던 중학생 이명숙도… 모두 그의 시와 산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원 뜰 안에서 40년을 살면서 그는 자신을 글 안에 모두 담았습니다.

“스무 살에 수녀원에 ‘시집왔잖아요’. 하하. 원래 내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가톨릭 세례를 받을 만큼 우리 집안이 독실했던 데다 언니 영향이 크지. 우리 큰언니 이인숙 수녀님이 봉쇄 수도원(바깥 세상과 일절 접촉을 금하는 수도원. 대개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한다)으로 들어가고 나서 언니를 만나러 가르멜 수도원에 다니곤 했는데 그때 이미 나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나 봐. 1964년에 수녀원에 들어와서 1968년에 첫 서원(청빈, 정결, 순명의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약속)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 오빠는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체념 때문에 억지로 수녀로 사는가 싶었대요. 1967년도에 오빠가 날 찾아와서 ‘너 수녀원 나오려면 지금 나와야 결혼이라도 하지. 내 친구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너무 나이 들어 나오면 골치 아프다’ 그러는 거지. 그때 내가 오기까지는 아니지만 ‘오빠, 내가 평생을 사는 건데 억지로 살겠어? 내가 살아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참 괜찮아. 조금만 더 살아보고 힘들면 이야기할게’ 그랬지. 그러다 보니 벌써 40년이네. 흐흥.” ‘움직이는 자료실’이라 불릴 정도로 초특급 기억력을 자랑하는 그는 클라우디아 수녀로 살면서 대학에서 영문학, 대학원에서 종교학도 공부했고 여러 개의 문학상도 받는 시인으로 양명의 터전에 서기도 했습니다.

“내가 예전에 별명이 석고상이었어, 응. 한번 삐치면 잘 풀어지지도 않고, 인생 고민 다 짊어진 것처럼 침울했다고. 그런데 그렇게 새침하면 수도 생활이 참 힘들어요. 달라지려고 노력 많이 했지. 요즘엔 나보고 사람들이 ‘명랑 수녀’라고 그런다니까. 하긴 근데 내가 명랑한 걸 보면 우리 독자들이 많이 낯설어 해. 내가 이렇게 덜렁대고 안 다린 옷도 막 입고 올 풀어진 스타킹도 막 신고 다니고 이것저것 흘리고 다니는 걸 알면 놀랄걸.
흐흥. 삶을 ‘오늘밖에 없는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살다 보니 즐겁고 명랑한 마음이 생기더라고. 내가 기쁨발견연구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하면 돼. 하하.
근데 내가 수녀가 되는 데 우리 인숙 수녀님이 많이 도와줬어요. 늘 좋은 생각만 하며 살라고 좋은 말들을 골라 친필로 적은 수첩도 보내고, 충고가 담긴 편지도 숱하게 보내주고. 민들레 노란빛 있잖아, 그거랑 잎사귀빛 섞어 손수 뜨개질해 만든 이불 보내면서 ‘민들레 이불’이라고 부르라 했지. 언니 수녀님은 나에겐 현명한 스승 같고, 어진 친구 같아요. 박완서 선생님이 언니 수녀님을 한번 만나고서 그 모습이 꼭 성모 마리아님과 보살님을 합해놓은 것 같다고 하시대. 나 시 쓰는 것도 우리 인숙 수녀님이 얼마나 도와준다고. 해마다 가을이면 시심 떠올리라고 탱자랑 모과를 보내주고, 가끔은 ‘취급주의’라고 쓴 플라스틱 통에 꽃씨나 민들레 솜털을 담아 보내주고 그래. 그 봉쇄 수도원에서 50년 넘게 살았으니 벌써 칠순이 훌쩍 넘었는데도 순진무구한 소녀 같아.
간호 수녀님이 준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먹는 방향을 몰라 뾰족한 끝부터 먹기 시작했다고, 나중에 그게 아니더라고 막 웃으시더라고. ‘내가 사용법을 몰라 보내니 네가 쓰렴’ 하고 가끔 보내주시는 볼펜도 실은 누르거나 돌리면 되는 단순한 건데도 새것을 보면 지레 겁부터 내시는 양반이지.” 세상을 떠나 ‘마법의 성’에서 40년을 산 이해인 수녀. 나서지 않고도 사랑하는 법을, 뒤에 숨어서도 위로하는 법을 배운 그는 이제 수도자의 길이 예술 작품 같다고, 긴장미·절제미·여유를 다 갖췄으니 이런 예술이 어디 있느냐고, 이렇게 살고 나니까 모든 사람이 내 친척 같고 애인 같다고, 범죄자에게도 연민의 정이 샘솟는 걸 보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거 같다고 뭉게구름 같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오랜 세월 / 사람을 사랑할수록 / 할 말은 적어지고 // 오랜 세월 / 시를 쓸수록 / 쓸 말은 적어지고 // 많은 말 남긴 것을 / 부끄러워하다가 / 마침내는 / 가장 단순한 침묵이 되어 / 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 긴 기다림 끝의 / 자유를 얻게 되나 보다”(‘침묵이 되어’ 전문)

일과가 끝난 밤, 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는 잠옷 입고 침대에 엎드려서, 신문 사이에 끼어 들어오는 광고 전단지 뒷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시를 씁니다. 거친 모서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입으로 읊조려야 제 맛이 살아나는 ‘이해인 표’ 시를 씁니다. 그의 시는 분노, 성적 욕구불만, 호전성에 몰두하는 요즘 시에 휩쓸리지 않은 채 청결함과 참회와 박애주의자로서의 고백에 마중 나가 있습니다.
처음에 나온 그의 시를 두고 평론가 무리들이 ‘사상과 문제의식이 없는 맹물 같은 시’ ‘소녀 취향의 잘 팔리는 시’라고 폄하했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의 시에 대해 선택적 청각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회초리처럼 읽는 이를 품고 핥고 보듬는 그 시의 울림. “초기에 나온 시는 내가 봐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감성을 주체 못한 작품이 많았던 것 같고. 그래서 외려 독자들에게 더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 그치? 평론가들의 평가에 엷은 상처를 받아서 한동안 시를 출판하지 않기도 했는데. 피천득 선생님, 김광균 선생님이 ‘고운 시를 쓰고 있으니 괜히 열등감 갖지 말라’고 북돋워주셨어요.” 아, 갑자기 그가 펴낸 오래된 1970년대 시집이 다시 보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요?
그의 시가 결코 공기 중엔 아름다움만 가득하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삶을 사는 자의 진물 같은 눈물, 기쁨과 슬픔에 대한 고담준론들이 그에 시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시가 그렇지요.

“어차피 때가 되면 /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 아직도 살고 싶으냐 /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 더 살고 싶다고 하면 /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 어서 죽고 싶다면 /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 테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 나의 숨은 비애를 /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 이기적인 추한 모습 /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 (이하 생략)”(‘어느 노인의 편지’ 중)

“떠나서 물러서서 살지만,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세속에 애착하거나 수도 생활을 방해하는 게 아니고, 서로 교류하다 보면 이런 분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되겠다 하는 게 눈으로 막 들어오잖아.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이웃의 아픔을 대변하는 시도 쓰게 됐고. ‘어느 노인의 편지’ 보고 어떻게 우리 입장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노인복지관에서 되게 좋아하거든. 난 시장에 자주 나와요.
선물 가게 엘프, 능소화 소품집, 삼성도서, 엄지약국, 한독사진관, 필립보 양화점, 한승표빵집… 다 내가 세상 구경하다 만난 곳들이야. 눈으로 보면 피부로 다가오잖아. 물질적으로 많이 못 도와주더라도 손 한번 잡아주고 따습게 한번 안아주고. 그리고 난 부산일보를 열심히 본다고.
부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는 것이 부산 시민으로서의 도리인 것 같아서. 하하. 내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요약해서 시로 써줄 때 독자들이 어떻게 살아야겠다 자극을 받을 수 있잖아요. 그게 또 시인의 역할인 거 같더라고. 인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요. 응.” 이런 그의 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안식을, 멀리 집 떠난 언니나 이모가 보내오는 편지 같은 마음을 안겼고, 그 친근함이 지나쳐 수도원으로 불쑥 찾아오는 이들도 숱하다고 합니다. 꽃 들고 찾아와서 결혼해달라고 떼쓰는 청년도, 무이자로 돈 빌려주면 꼭 성공해 갚겠다고 조르는 이도, ‘순결하게 살아오신 수녀님께 이런 말씀을…, 실은 제가 불륜을 저질렀어요’ 하고 고백하는 이도, ‘시에선 사랑만 읊더니 찾아와도 만나주지는 않느냐’고 욕하는 이도 있다는군요. 그럼 그는 그냥 미안하다고, 매일 그렇게 빌고 산답니다.

“‘수녀님이 보내주신 / 성탄 카드에 붙인 별 스티커에 / 우리 방 사람들 모두 환호하며 / 그 별을 하나씩 떼어 가졌답니다’ // 이 구절에 감동받은 나는 / 다시 별 스티커와 / 향기 나는 우표를 들고 / 면회를 갔지만 / 다는 만날 수가 없어 / 안타까웠다 // ‘아주 작은 것에도 / 우린 서로 감사하며 삽니다 / 서로의 죄는 묻지 않고 / 격려만 해주어요’ // 한 사람이 편지를 쓰면 / 편지지에 고운 꽃과 새를 그려주기도 하면서 / 서로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 / 어둡게 닫힌 감방 안에 / 사랑으로 열려 있는 / 마음과 마음들 사이로 / 나는 스티커가 아닌 / 진짜 별들을 많이 달아주고 왔다”(‘담 안에서 온 편지’ 전문)

우리들의 ‘명랑 수녀님’은 산타클로스와 한 몸이라기도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길 좋아합니다. 그의 집필실인 ‘해인글방’엔 카드, 그림엽서, 조가비, 돌맹이, 연필, 색종이 상자,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글귀나 그림, 꽃, 사진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이게 모두 사람들에게 나눠줄 선물이랍니다. ‘수녀님, 친구에게 보낼 멋진 시 한 편 골라주세요’ ‘어린이에게 어울리는 카드 있으면 한 장 주세요’ 이런 부탁을 받을 때마다 힘 안 들이고 기쁨을 파는 선물의 집 주인이 된 것 같아 마냥 흐뭇하답니다. 그는 책에 해주는 사인도 글씨와 글씨 사이에 색연필로 선을 긋고 스티커를 붙여 보는 이를 벙싯거리게 합니다. ‘걸어 다니는 선물의 집’이라는 별명은 허투루 붙여진 게 아니군요.

“내가 굉장히 인상적인 선물 한 것 중 하나가 피천득 씨 살아 계실때, 그분에게 자주 편지하는 독일의 김효정이라는 여자분이 계셨는데, 선생님이 연로하시니까 손이 떨려서 그 여자분한테 카드 하나 보내고 싶어도 못할 거 같애. 그래서 내가 독일 가는 국제우편 봉투 스무 장 정도랑 크리스마스 우표를 종류별로 딱 사갖고 주소까지 써서 보냈다고. 선생님은 내용만 써서 보낼 수 있게.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허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아무도 그런 선물을 나한테 보내는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는 무언가, 그거 참 좋은 선물인 거 같아 보낸 거거든. 우리 독자들은 나한테 선물도 정말 다양하게 해. 헝겊 주머니 같은 거 1백 개를 백일기도하는 마음으로 박아서 보내는 아줌마도 있어. 이번에 교보문고에서 사인회 하는데 줄 섰더라고. 얼굴은 몰랐는데 소포에 만날 쓰인 이름 생각 나서 내가 ‘권순자 씨죠?’ 그랬더니 몹시 기뻐하는 거야. 농부 아줌마가 수녀님 맛보시라고 찹쌀, 콩 그런 것들 보내주고. 할미꽃 모종 같은 거 선물하는 분도 있고. 참,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 인터뷰하면서 자갈치 시장에서 어떤 아줌마랑 사진을 찍어 냈는데, 생각하니 그 아줌마가 너무 고마운 거야. 그래서 그 다음 날 복숭아 깡통이랑 싸들고 일부러 택시 타고 찾아갔어요. 며칠 후에 그 아줌마 딸내미가 박스에 카드랑 편지 봉투를 한가득 싸서 보냈더라고. 자기가 내 열렬한 독자인데 우리 엄마를 이렇게 기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돌고 돌아서 이어지는 선물, 만남. 세상이 그렇게 연결됐으면 참 좋겠어요. 선물 고리처럼. 그러면 나는 보상을 다 받았다고 생각해. 자갈치 아줌마 딸한테 보낼 선물도 다 생각해놨거든. 이거 보면 기뻐할 거야, 하면서. 하하하.” 이해인이라는 단편집의 주제는 바로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공허가 목욕탕 수증기처럼 자욱한 세상에 그가 보내는 선물은 시집 제목처럼 ‘작은 기쁨’ ‘작은 위로’입니다.

“훌쩍 짐 싸들고 이사를 가듯 / 나의 어머니가 / 저쪽 세상으로 / 집을 옮기신 이후 // 나도 어머니의 집에 / 세 들어 살고 싶은 그리움으로 / 날마다 잠을 설쳤다 // 서둘지 마 / 좀 더 기다리면 되지 / 언젠가는 나처럼 / 아주 이사를 오게 되지 // 차가운 침묵의 방에서 / 따뜻한 말로 / 나를 위로하시는 어머니”(‘이사’ 전문 )

“어머니가 두 수녀 딸을 만나시러 부산엘 오셨는데, 무거운 짐 있으면 내어놓으시라고 했더니 48년을 지니고 계시던 옛 성서 한 권을 주시며 결국은 유품이 될 것이니 기념으로 가지라고 하시대. 언니 수녀님에겐 그만큼 오래된 묵상 책을 주신다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머니 뒷모습을 보며 ‘앞으로 딸들 만나러 얼마나 더 오실 수 있을까?’ 헤어짐에 대해 생각이 들대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지요. 그런 어머니가 작년에 아흔 네살 잡숫고 돌아가셨어. 어머니가 해인 수녀 주라고 남긴 골무 20개를 보면서 또 울었네. 어머니의 꽃골무는 내 보물 1호야.” 단구인 채 장대높이뛰기 선수도 닿지 못할 만큼 키 큰 세상에 다다른 그이지만, 어김없이 그도 예순 셋에 당도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잠자듯이, 당신 잠자리에서 가셨거든. 동생이 돌아가신지도 몰랐대. 나도 그렇게 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꿈을 갖는 것도 허영일 수도 있겠지. 너무 좋은 모습으로 죽고 싶은 그런 거. 죽음이란 게 육체적인 죽음도 있지만 누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말대꾸하고 싶을 때 그걸 참는 작은 죽음, 스몰 다잉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마치 바늘 끝으로 날 쑤시는 것 같은, 말 그대로 ‘바늘 치명’인 거지. 큰 고통은 아니더라도 매번 그렇게 자기를 꺾으려면 그게 참 쉬운 게 아니라니까. 작은 죽음을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 크게도 잘 죽을 수 있겠구나 싶어요. 얼마나 인간이 자존심이 강하면 숨이 멎고 나서도 15분간은 살아 있대요.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인간이 자아가 강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정말 잘 죽으려면 자기 성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순하게 누그러뜨리는 연습을 하면, 그런 기회가 올 때 스몰 다잉 연습을 하면, 나중에 큰 죽음이 올 때도 잘 되지 않을까. 그런 수련법을 내가 요즘 하고 있거든요. 작은 죽음이 일상생활 안에서 필요하다 싶어요.”
한번도 소원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그가 말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은 오래 남을수록 죄가 많다는데, 다음 생에서 갚을 일이 큰일이라는데,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세상을 밝히는 그만큼은 오래 남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왜 사람들은 힘겨운 날들 중에서도 종말까지 견디는 걸까, 그 답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와의 찰나 같은 만남이었습니다.

이젠 저 참나무 밑둥 같은 세상 속으로 밀려 들어가야겠지요. 부산역까지 배웅 나와 호호 할머니처럼 웃는 그에게 돌아가 안기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려고 헛기침을 내뱉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난 다시 그가 만든 시를 가만히 낭송해봅니다. 그 시는 청결한 거즈로 내 환부를 덮어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것으로 족합니다. 정말.

“누구나 가는 길 / 함께 가면 가깝고 / 혼자 가면 / 더욱 먼 길 // 가족들이 모여서 / 불을 밝히고 / 기다리는 집 // 나에겐 /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 다 가족이었지요 // 가족들이 많아 / 때로는 쓸쓸하였지요 / 불빛도 잘 보이지 않았지요 // 그래도 / 집으로 가는 길은 늘 행복하다고 / 집 없어서 집이 많은 나는 /오늘도 웃으며 말을 하네요”(‘집으로 가는 길’ 중)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