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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신명이 넘쳐나는 노래, 노래, 노래 남도 들노래의 본고장, 진도 소포리 사람들 이야기
진도 섬 서쪽 바닷가 마을, 지산면 소포리 사람들은 겨우내 봄보다도 먼저 봄노래를 부른다. 진도 들노래, 육자배기, 흥타령, 둥덩애타령이 들판에서, 집 안에서 울려 퍼지는 들노래의 근원지가 이곳이다. 소포리 사람들이 남도에서 깨운 봄바람, 살아 있음을 알리는 들의 노래가 벌 떼를 몰고 유채꽃과 함께 북상할 것이다.


1, 3, 4 푸른 잎으로 겨울을 보낸 배추, 파 등속이 들판에 봄소식을 전하는 남도의 들녘. 그 풍경의 주인공은 둥싯거리며 노래하는 어머니들이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모두 흥에 겨워 노래와 춤으로 화답한다. 이 모습은 사진을 위한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이다.
2 한국 노래방의 원조라 할 만한 ‘소포어머니노래방’.

노래봄은 소리들이 깨어나는 계절이다. 겨우내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만물이 저마다 신호를 보낸다. 산속에서는 곰들이 길게 하품을 하며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땅속에 있던 개구리도 두 눈을 씀벅이며 짧게 목울대를 떨어본다. 계곡에서는 얼음이 녹아 졸졸졸 흐르고, 그 물을 마시던 새는 까닭 모를 충동으로 날갯짓하며 운다. 그뿐인가. 고로쇠나 단풍나무 가슴에 귀를 대보면 펌프질하듯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나무가 꽃눈과 잎눈을 밀어 올리느라 분주하다. 생강나무며 산수유가 폭죽처럼 꽃망울을 터트릴 즈음 까치집도 움틀 기세이고, 바위도 언 흙이 꺼지자 궁둥이를 털썩 내려놓는다. 소리는 살아 있음의 증거다.

초목에 싹이 돋고, 동면하던 짐승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에 남쪽의 섬 진도로 향했다. 여섯 시간을 달려 진도에 들어서자 막 상륙한 봄과 이마를 마주쳤다. 봄은 농부들이 갈아놓은 논밭의 흙덩이 사이에 막 아지랑이 불을 지피고 있는 중이었다. 봄이 빙그레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곧 알아채고 바삐 달려갔다. 그곳에 봄보다 먼저 봄을 열어젖히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차를 달려 당도한 곳은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다. 태극기와 새마을 기가 찢길 듯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마을회관으로 들어섰다.
소포전통민속전수관장이자 전임 이장인 김병철 씨가 취재진을 맞는다. “남도 들노래의 본고장인 소포리 사람들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5 소포리 전경. 염전과 포구로 유명했던 시절엔 1천5백 명이 이 마을에 살았으나, 지금은 3백50 명 내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잘 오셨습니다. 이곳은 우리 민족 고유의 놀이와 노래, 일이 서로 유리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지금 1백50가구에 3백50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자연부락으로는 꽤 큰 편입니다.”
김병철 씨는 친절하게 소포리 주민들이 이루고 있는 마을 조직부터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소포리에는 이장이 주관하는 소포 마을회가 있고 노인회, 청년회, 부녀회가 있다. 농촌의 노령화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온 바 있지만 노인회는 65세 이상, 청년회와 부녀회는 60세 미만으로 구성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실감이 났다. 40대 중반인 필자는 이곳에서는 아직도 사춘기 소년인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각종 전통문화 보존회가 있습니다. 소포 걸군농악 보존회, 베틀노래 보존회, 세시풍속 보존회, 강강술래 보존회가 있고, 유서 깊은 어머니노래방이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운영되고 있는 보존회 이름만 들어도 과연 전통문화 마을의 명성에 걸맞구나 싶다.
“제가 이장이었을 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고령화된 어르신들을 외롭지 않고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끼니를 걱정하는 분은 계시지 않았지만, 항상 외로움을 타는 것이 어르신들입니다. 성취감을 느낄 만한 일이 없고, 외로울 때 죽음에 이르기 쉽습니다. 더러 집 안에 독한 약초를 간직해두고 계신 분도 있었습니다. 어른들께 ‘무얼 도와드릴까요’ 하고 여쭈어보던 중 ‘소리나 좀 원 없이 듣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 이것이 답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국립창극단에 잘 아는 소리꾼이 있었다. “여보게,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소리 ‘부주’나 좀 해주게. 돈은 없네. 전용 고수 대신 이곳에 아마추어 버금가는 고수가 있으니 수고 좀 해주시게.” “소리꾼이 장단에 맞춰야 소리꾼이지. 걱정 말게, 내려감세.”


1 소포리 노인회 회장님. 유행가를 소리로 진화시키는 특출한 재주를 가진 이다.
2, 5 한남례 씨가 이끄는 ‘소포어머니노래방’에 모인 할머니들. 주로 흥타령, 육자배기 등을 배우고 노래한다.
3 어르신들의 대단한 컬러 감각으로 페인트칠한 소포리 정미소 앞길.

그렇게 서울에서 먼 길을 달려온 소리꾼은 마을 전수관에서 세 시간 가까이 완창을 했다. 너도나도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룬 마을 사람들이 신명이 나서 어깨춤을 추며 주름살을 활짝 폈다.
“아, 이게 우리 마을의 에너지로구나 싶었습니다. 주민도 저도 농사꾼이지만, 먹어서 배부른 농사를 짓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농산물 하나에도 농부의 삶과 철학, 열정과 땀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농산물에는 육자배기와 흥타령이 스며 있습니다. 하회마을은 대한민국의 양반 문화를 대표하지만, 우리는 서민 문화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진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성한 ‘진도학회’ 사람들이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을 모아 ‘판’을 만들었다. “촛불을 켜고, 다듬이소리가 잦아들면, 어머니 한 분이 비손을 합니다. 마침내 불이 켜지고, 지아비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주머니가 ‘푸른 풀 우거진 곳에 내 사랑이 누워 있네. 잔을 들고 술 권해도 잔 들 손 뻗지 않네~’ 노래를 하자 사람들이 우는 겁니다. 어떤 장르든지 눈물을 흐르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대단한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요. 우리 어머니들의 노래에 엄청난 기운과 에너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벌인 ‘판’은 입소문이 났다. 인터넷 블로그에도 오르고, SBS의 기획 프로그램으로도 다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소포리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소포리 주민들 자신이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4 , 6, 7 진도 다시래기 전수 조교인 이민석 씨는 밤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소리를 가르친다. 50대 아낙부터 70대 노인까지 자발적으로 소리를 배우고 익히며 밤 11시가 넘도록 그 흥을 이어나간다.

“문화라는 것이 삶의 전반인데, 전통문화가 한쪽에 치우친 액세서리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경제 논리에 무너져가는 우리 문화를 복원시키고 싶습니다. 중모리 장단 하나라도 익히고,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 우리 어머니들이 부르는 소리에 얼마나 전율이 이는지 한번 들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 했겠다. 냉큼 짐을 챙겨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는 파밭으로 향했다. 진도 대파는 아주 유명하다. 진도 대파는 고깃국에 넣어 끓여도 좀체 풀이 죽지 않는다. 끈끈하고 진한 향의 액이 많이 나와서 풍미를 더한다. 검정쌀, 월동 배추 등과 함께 진도의 특산물로 손꼽힌다.

대파 작업을 하는 커다란 비닐하우스 앞, 밥집으로 쓰는 작은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남정네들이 서넛 모여서 약주를 들고 있다. 손짓하며 약주를 권하는데 식탁에는 펄펄 뛰는 숭어회가 담겨 있다. 이미 아침 일찍 밭에서 파를 뽑고, 차에 싣고, 부리는 된 일을 다 끝내놓고 쉴 참인 모양이었다. 슬며시 어깃장을 놓아본다.
“아주머니들은 열심히 파 다듬느라 여념 없으신데 남자들은 여기서 낮술 드셔도 되나요?”
“음, 우리는 파 까는 것보다 더한 걸 하지. 자, 한 잔 받으시게. 술 속에 예술 있고, 예술 속에 술이 있거든.”
구릿빛 얼굴에 자줏빛 모자를 쓰고 체크무늬 목도리를 두른 사나이가 말한다. 소개를 들어보니 진도 다시래기 전수 조교인 이민석 씨다. “한 소리 해요. 아, 맛뵈기 좀 해보쇼.” 주변의 청에 못 이겨 청을 가다듬는다.
소리 한 자락과 펄펄 뛰는 숭어와 소주 한 잔이 못내 아쉽지만 할 수 없이 자리를 떴다. 대파를 다듬고 있는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매운 내가 진동을 한다. 20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파를 다듬고 있다. 이렇게 매운 데서도 소리를 할까? 한 아주머니께 소리를 청하자, 사양하는 법 없이 진도아리랑이 흘러나온다.
“청명한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이내야 가슴속에는 수심도 많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 아라리가 났네. 맹감은 고와도 수풀 속에서 놀고, 유자는 얽었어도 한량 속에서 논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흥~ 아라리가 났네~.”

‘좋다’ ‘참말로’ ‘얼씨구’ 아주머니들의 추임새가 섞여든다. 아주머니 한 분이 육자배기를 들고 나온다.
“사랑이 모두 다 무엇인지 잠들기 전에 응 못 잊겄네. 잊으리라, 잊으리라. 베개 베고 누웠으니 내 눈에 얼굴이 삼삼하여서 나는 못 잊겠네. 세상이 모두 다 무엇인지 잠들기 전에 응 못 잊겠네. 잊으리라, 잊으리라. 베개 베고 누웠으니 내 눈에 얼굴이 삼삼하여서 나는 못 잊겠고나~.”
“노랫말 같은 사랑 해보셨어요?”
“내가 못 해봤겄어요? 사랑이 꿈처럼 가부렀다오.”
다시 흥타령을 들고 나온다.


1 어머니노래방을 지키는 진돗개. 주인인 한남례 씨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는 후덕하고 인정 많은 녀석이다.
2 , 6 어머니노래방을 이끄는 한남례 씨. 한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지만 수천 절에 달하는 남도 들노래를 기막히게 외우고 부르는 명창 중의 명창이다. 최근에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한다.
3 월동 배추를 뽑다 노래에 빠진 어머니들.

“푸른 풀 우거진 골짝 내 사랑이 묻혀 있네. 신이여, 내 사랑아, 자느냐 누웠느냐, 불러도 대답 없네. 어여쁜 그 모습은 어디 두고 땅속에 뼈만 묻혀 나오는 줄 모르네그려. 잔을 들어 술 부어도 잔을 잡지 아니하네~.”
아주머니 눈동자에 뿌옇게 이슬이 어리는 듯하여 사연을 물어보았으나, 묻지 않을걸 그랬나 보다.
“전에 방송국에서 취재 나왔을 때 이 노래를 부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생전 눈물을 몰랐는데 사는 게 힘들어져서 이 노래를 다 못 부르겠더라고요.”
임예심(66세) 아주머니다. 큰아들이 스물셋에 오토바이 사고로 먼저 죽고, 3년 뒤 남편마저 잃었단다. 설상가상으로 본인도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에 인공뼈를 넣고 일어났다. 의사가 만류하는데도 여기에 와서 하루 종일 일을 한다. 새벽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무려 17시간에 이르는 고된 작업이다.
“허리가 쏟아져뿔라 해요. 함께 사는 친정어머니와 손주 아그들만 없으면 이거 안 할 텐디.”
안쓰러운 마음으로 파 다듬는 일을 거드는 체해본다. 맨손에 진액이 묻어 금세 끈끈해진다. 시골 태생인 나로선 생소한 일이 아니나 취재 때문에 오래 도울 수 없다. 다시 모자를 쓰고 수건을 동여맨 옆 아주머니에게 꿀벌처럼 날아간다.

“파 때문에 눈물깨나 나지요? 노래를 언제 배우셨나요?”
“그다지 소질 없는데 어머니노래방에서 놀다 보니 배웠어요.”
안소심(67세) 아주머니다. 태가 곱고, 말씀도 얌전하기 그지없다.
“심심할 때 친구들과 한 자락씩 하면 참 재미있고 좋아요. 강강술래도 얼마나 재밌는지 모릅니다. 서울이며 광주 방송국에도 초청받아서 가봤지요. 작년 가을에는 서울 시청 앞에서도 공연을 했어요.”
비록 허드레옷을 입고 파 다듬는 농군 아낙들이지만 알고 보면 한 분 한 분 카메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문 소리꾼들이다. 다시 그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로 간다.


4 겨울철에도 땅이 얼지 않는 기후여서 3월 초에도 푸른 기운이 들판에 퍼져 있다.
5 요즘 소포리 어머니들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대파 까는 부업을 하는데, 역시 소리가 피로 회복제다.

“소리 잘하시죠?”
“소리 안 배웠어요. 바깥 어르신이 소리꾼인데 나는 안 해야지 했어요.”
그러자 옆 아주머니가 “에이,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이른다. 이름도 성도 없다더니 옆 사람이 성함을 잘못 이야기하자 얼른 고쳐준다. 한봉덕(65세) 아주머니이다. 바깥어르신이 누구신가 여쭈었더니 바로 바깥에서 뵌 이민석 씨란다. “바깥 어르신이 잘해주셔요?” 짓궂은 질문을 던졌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이 나온다.
“예, 잘해주고 말고요. 어머니한테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소리도 잘하시고, 옛날 한학을 배우셔서 글씨도 잘 쓰시고, 약주를 해도 실수하는 법이 없어요.”
진정으로 바깥어른을 아끼는 데서 우러나오는 말씨다.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사랑을 할까요?”라고 물었던 이조시대 어느 여인의 편지 글이 생각났다.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왔더니 나도 모르는 행선지가 기다리고 있다. 차를 타고 간 곳은 ‘차재익?박연실’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문패에 붙은 집이다. 이민석 씨를 비롯하여 김덕춘·김경식·노관민·차재익 씨 등 절친한 5인방 모임이란다. 방에 들어서니 상다리 없는 밥상 네 귀퉁이에 각각 진도 월동 배추 노란 고갱이가 통째로 올라앉아 있는 게 이색적이다. 집주인은 열심히 솥뚜껑 불판에 진도 흑돼지 삼겹살을 굽는다. 진도 홍주가 줄줄이 나온다. 진도 옛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옛날 이곳 소포리는 목포에서 오는 배가 정박하는 포구였고, 마을 사람들은 농사보다 주로 염전에서 일했단다. 노동하러 뭍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북새통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단다. 바다를 막아서 간척을 하고부터는 농사가 주업이 되었다. 처음 10여 년간은 짠물 때문에 고생이 많았으나 이제는 뭐든 씨만 뿌리면 잘 자라는 옥토가 되었단다.

특이한 것은 대개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살면 서로 다투는 경우가 많으나, 이곳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단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때도 주민끼리 큰 다툼이나 희생이 없었고, 지금도 낯선 사람이 오면 잘 화합해서 살아가는 게 이 마을 특징이란다. 흑돼지와 홍주가 바닥이 나자 자리를 옮기는데, 이번엔 이민석 씨 댁이다. 역시 술과 노래가 빠질 수 없다. 이민석 씨가 북채를 잡고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았다.
“소포에 시집와서 40년 지났어요. 고생도 원 없이 했어요. 이제 애기들 다 키워놓고 3년 전부터 이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고 있어요. 소리 배우니까 안 늙어요.” 최경례(63세) 씨의 말이다.

“이 산 저 산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어제는 청춘이더니 오늘은 백발이네.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리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한들 무엇하랴. 봄아, 왔다 가려거든 가거라.”
이민석 씨의 사철가가 울려 퍼진다. 매혹은 아름답다. 무아지경의 저 몸짓을 노래가 밟고 가는지, 사람이 노래를 토해놓는지 알 수 없다. ‘좋아!’ ‘얼씨구!’ 추임새를 놓는 사람들도 모두 자기 세계로 깊숙이 날아가버린다. 제 삶을 제가 노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리는 결국 저를 위해 노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노래의 진정한 관객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밤 깊어 물러나니 다음 단락부터 새 아침이다.
읍내에서 하루를 보낸 취재진은 아침나절 다시 소포리로 향했다. 구석구석 마을 구경에 나섰다. 누가 청소를 하는 걸까. 고샅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 곳곳에 빈집이 남아 있고, 더러 흙벽이 쏟아지고, 서까래가 무너지지만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지 않고 그조차 멋스럽다. 밤늦게 들었던 마을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 때문일까?


1 1980년대 이전, 염전업이 융성했던 시절 이 마을의 관문이었던 소포리 포구.
2 섬마을이다 보니 집이 대지와 가깝게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3 소포리사무소, 소포리 정보화 마을 센터, 마을 회관, 경로당이 함께 자리한 일명 ‘소포리 다운타운’. 65세 이상이 되어야 노인회에 들 수 있다는 이 마을의 ‘진짜 어르신들’이 3월의
봄볕을 맞고 있다.

한 집에서는 여남은 사람이 모여서 돼지를 잡는다. 행정자치부 지정 ‘정보화마을’ 우수상을 받은 기념 잔치란다. 사료 없이 잔반을 먹여서 키운 흑돼지란다. 두 개의 솥에 불을 지핀다. 한쪽엔 돼지 내장과 선지를 넣은 ‘돼지핏국’이요, 다른 한쪽은 고기를 삶는다. 굴피나무 장작을 지피니 펄펄 기세 좋게 날리는 것이 김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잎새주 소주 박스 두 개 위에 판자를 걸쳐놓으니 단박에 식탁이 된다.

국밥으로 요기를 하고 소포어머니노래방을 찾았다. 소포리노래방은 기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농한기 사랑방에서 운영되다가 일제강점기에 금지되었고 해방이 되자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염전이 사라지고 농토가 늘어나자, 남자들 노래방은 사라지고 여자들 중심으로 노래방이 살아났다. 이 어머니노래방의 창설자이자 지도 선생님이 바로 한남례 씨이다. 그이를 만났다. 76세이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빛난다.
“열 살 때 배운 노래를 지금도 해요. 명 자을 때 어른들한테 저녁에 배우면 아침에 따라 했지요. 한글도 못 배웠지만 모든 가사가 이 머릿속에 있습니다. 75년부터 어머니노래방을 시작했어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노래하며 신나게 보냈지요. 그럼요, 제자도 많지요. 제자들이 노래 잘하면 그게 보람이지요. 젊어 뵌다고요? 노래를 한께 그런가 봐요.”
정 많은 그이는 마을을 떠나오도록 내내 먹을 것을 권하며 챙겨주는 바람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1박 2일 동안 많은 소포리 사람들을 만났다. 도회의 때 묻은 나는 그들의 친절이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지만, 곧 이들의 천품으로 단정하고야 말았다. 아름다운 진도의 자연환경과 특유의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4 소포전통민속전수관에 비치된 악기들. 외지인들도 소리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 남도 민요를 배울 수 있다.
5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로 손꼽히는 세방낙조. 소포리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6 염전이었다가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된 소포리 들녘을 소포리 노인이 바라보고 있다.

진도 사람들의 삶이 노랫가락만큼 한없이 여유롭고 평온한 것만은 아니다. 섬을 떠미는 거친 파도처럼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풍랑이 있기 마련이다. 사래 긴 밭의 농사일은 고되고, 수송비를 건질 수 없는 월동 배추를 내다 버리는 아픔이 있고, 매운 눈물 흘리며 다듬어야 하는 생계가 있다. 별들의 바탕이 어둠이듯이, 노래의 바탕도 어쩌면 눈물인지 모른다. 저마다의 격정과 회한과 외로움이 있어서 노래는 아지랑이처럼 휘발되지 않고, 가슴을 뜨겁게 지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리는 살아 있음의 증거다. 소포리 사람들은 봄보다도 먼저 봄노래를 부른다. 밤낮도, 들판과 집 안도, 계절도 가리지 않는다. 그 봄노래는 그들의 혈관을 타고 올라 가슴과 머리와 눈을 적시며 들판에 울려 퍼진다. 올해도 그들이 남도에서 깨운 봄바람이 벌 떼를 몰고 북상할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그 역사를 추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노래방이며(일제강점기 이전의 노래방 활동도 기록되어 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노래 운동의 근거지인 ‘소포리노래방’. 그 자취를 찾아 떠난 <행복>의 여행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봄기운과 함께 시작되었다. 농경사회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포리는 우리 가슴속 깊숙이 자리한 ‘고향’의 모습 그것이었고, 들판과 파 다듬는 비닐하우스, 마을회관 앞, 골목, 안방에서 흥타령을 부르던 소포리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착한 뜻, 더운 가슴’을 가진 소포리 어르신들은 서울에서 온 객에게 직접 잡은 돼지고기와 갓 잡은 숭어를 대접했고, 동무들끼리 벌인 술자리에 곁을 내주기도 했다. 길 가던 어느 누구를 불러 세워 노래 한 자락 청하면 바로 명창의 흥과 신명이 울려 퍼지는 이 마을에서 우리는 작가 김훈이 <원형의 섬, 진도>에서 이야기한 ‘삶 속에 노래가 들어 있음을, 노래는 삶과 일을 노래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인 곽재구가 이야기한 감흥 “한때 나는 그 바닷가 마을의 초롱한 불빛들을 지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한 적이 있거니와… 어찌 그 맑고 허허롭기 그지없는 사람들의 눈빛과 소리가락과 바람과 들꽃들의 영혼에 깊게 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가 가슴에 젖어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포리 정보 소포리는 진도 북놀이, 진도 만가, 강강술래, 남도 들노래, 소포 걸군농악처럼 서민 문화를 대표하는 남도 소리를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또한 무형문화재 72호 진도 씻김굿 보유자 박병천 선생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극단을 조직해 진도 전역으로 공연을 다니던 문화적 생산력이 대단한 마을이기도 했다. 소리의 마을 소포리에서는 1박 2일 코스로 남도소리기행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이민석 씨가 지도하는 단가 한 대목 배우기, 한남례 씨의 남도 민요 시연, 남도 잡가 한 대목 배우기, 걸군농악 시연, 농악 장단 배우기와 상모 돌리기, 강강술래 시연, 후리질로 하는 고기잡이 체험, 진돗개 시범 등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체험 신청은 소포리닷컴(www.sopoli.com)이나 061-543-9725로 문의하면 된다. 소포리에서의 숙박은 진도 읍내의 모텔급 숙박 시설을 이용하거나 진도마린빌리지 펜션(061-544-7999), 세방낙조 부근의 해미랑 펜션(061-543-0034)을 이용하면 된다. 주변 관광지로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로 꼽히는 지산면 가치리의 세방낙조(낙조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오후 4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군내면 군내호의 백조 도래지, 소치 허련 선생이 말년을 보낸 운림산방이 있다. 또 진도남도국립국악원 근처의 나절로미술관(010-9457-8841)은 추상화가 이상은 씨가 폐교를 손수 가꿔 만들어낸 이색 미술관으로 숙박도 겸할 수 있다. 바지락회와 간재미회가 일품인 사랑방식당(진도군청 근처, 061-544-4117), 쑥국 백반으로 소문난 별장식당(운림산방 근처, 061-543-7749), 보리쌈밥으로 유명한 돌담한정식(진도읍내, 061-544-1170)은 놓치면 아쉬운 대표 맛집.

진도 가는 길 항공이나 철도를 이용할 때는 광주나 목포까지 이동한 후 진도까지는 버스편을 이용해야 한다. 항공 서울-목포 1일 1회 왕복, 서울-광주 1일 9회 왕복. 아시아나항공 1588-8000, 대한항공 1588-2001. 철도 서울-목포 1일 10회 왕복, 서울-광주 1일 10회 왕복. 철도고객센터 1544-7788. 버스편 서울-진도 1일 4회 왕복(6시간), 광주-진도 1일 53회 왕복(2시간 30분), 목포-진도 1일 19회 왕복(1시간), 부산-진도 1일 2회 왕복(6시간 30분). 자가용 이용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출발할 경우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하다. 목포 나들목(2번 국도)→영산강하구언→삼호조선소 입구(49번 지방도)→금호방조제→문내(18번 국도)→진도대교→진도 문의 소포리 마을회관 061-543-9725 www.sopoli.com 진도군청 문화관광과 061-540-3219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