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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씨의 아카데미 라이프 나는 마냥 학생이에요
20대 아가씨는 중년 여성을 보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고, 몸이 삐그덕대려는 중년은 그레이 세대를 보고 ‘늙으면 어디 돌아다니겠어?’ 싶다. 그러나 그 나이마다 삶의 즐거움과 묘미가 있는 법. 특히 김영숙 씨는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게 산다. 얼마 전 와인 자격증을 땄고, 오래 일궈온 한학 공부의 참맛을 느끼는 중이며, 운동으로 몸을 다지느라 나날이 새롭다.

(왼쪽) 김영숙 씨는 와인 강의를 들으러 갈때는 청바지 입고 배낭을 메고, 와인 파티에 갈 때는 과감하게 화려한 드레스와 스카프로 멋을 낸다. 이런 멋쟁이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는 호피무늬 실크 원피스를 사주었다고. 그 옷을 입고 그가 즐겨 찾는 와인바 뱅가(02-2039-5235)에서 와인을 곁들인 디너를 즐겼다.
(오른쪽) 물리적인 혀의 감각은 젊을 때보다 떨어짐이 분명하지만, 와인에서 풍겨오는 인생의 풍미를 감지하는 능력은 나이가 많을수록 좋다.

와인 공부는 끈기와 열정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언뜻 그럴싸해 보여서 ‘맛배기’ 정도 보았다가, 심도 있게 들어가면 암기해야 할 용어부터 미묘한 맛의 차이를 구분해내는 감각을 습득하기까지 녹록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성과 감성을 넘나드는 와인 공부는 골치 아픈 인생 공부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와인에 대한 학식이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가 단계에 이르기란 어려운 일이다. 70대 중반 김영숙 씨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얼마 전 국제적인 와인 인증 시험인 WSET의 심화 과정에 응시해 선선히 통과했다. 이 자격증이 있으면 전세계 체인 호텔에서 소믈리에로 인정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WSET 시험을 주관하는 포도플라자의 박혜연 대리에 따르면, 와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많지만 자격증 시험까지 치러 통과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정도로 까다로운 시험이다.

“남편이랑 저녁마다 와인 한 잔씩 마시다가, 둘이 ‘이왕 이럴 바엔 알고 마시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알파벳 익히듯 하나씩 재미있게 배우다 보니 어느새 ‘자격증’이라는 목표가 생기더군요.” 청바지 입고 배낭 메고 와인스쿨에 출석하던 김영숙 씨는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1988년생 수강생과도 친구처럼 지내고, 와인스쿨 동기생들과 여는 파티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여기서 잠깐. 어쩌면 이런 부연 설명이 나이 든 사람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얼마든, 원하는 걸 즐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적인 행동반경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호기심의 반경도 축소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런 보편적인 흐름을 잠시 잊고, 김영숙 씨의 하루 일과를 들어보자. 새벽 5시 반, 집 근처 헬스클럽에 간다. 트랙을 12바퀴 돌고, 러닝머신을 30분 뛰고, 상체 근력운동을 약간 한 뒤에 집에 와서 아침 식사를 한다. 집을 대강 정리한 뒤 약속이 없는 날에는 혼자만의 자유 시간을 누린다. 책을 읽거나 스도쿠(숫자 퍼즐 게임)를 하거나 퀼트로 소품을 만들거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점심 식사를 간단히 한 뒤, 오후에는 미국의 와인 전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를 읽거나 한문 고전을 탐독하거나 고전 공부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거나 사람들을 만난다. 저녁이 되면 남편과 와인 한잔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30, 40대 주부, 그것도 무척 부지런한 이의 일상 같다.

“나는 마냥 학생이에요” 기실 김영숙 씨는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이었다. 과년한 처자가 국내 대학교에 진학하기도 어렵던 그 시절 여의도 비행장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으로 유학을 갔다. 학사 학위에 이어 로드아일랜드에서 대학원 공부를 할 때 이곳으로 유학 온 남편 박경배 씨를 만났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들 여성에게 기회가 없던 때에 대학원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을까. 게다가 황해도 곡창 지대인 연백에서 태어나 그 고장 음식 맛처럼 ‘슴슴한’ 여인이 화끈한 경상도 사내를 만났다. 그랬으니 김영숙 씨의 호기심은 기폭제를 만난 듯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모던 여성’ 김영숙 씨는 26년 전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앉혀놓고 한학을 가르치던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덕에 꼭 배우고 싶었다. 종로에서 <명심보감> 수업부터 듣다가,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자 권우卷宇 선생을 사사했고, 그가 작고한 이후에는 용전龍田 선생에게 고전을 배웠다. 당시 수업을 듣던 이들 중에는 한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뭐하러 (이렇게 힘든 걸) 배우세요?”라며 의아해 하더란다. 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즐거워서 했거든요. 고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답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스터디 그룹을 이루어 <사기열전>을 읽는 중이다.

물론 처음 <논어>를 잡았을 때는 읽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까지도 한학을 접하지 않았기에 기초 공부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옥편으로 한 자씩 찾으며 익히니 어느새 책 한 권을 마치게 되었다. 옥편이 하도 해어져서 남편이 새것 한 권을 사줄 정도였다. “매일 한 구절 배우면 그새 까먹는다”며 웃는다. 외우고 잊기를 반복하는 동안 고전이 말하는 큰 줄기가 가슴에 남는다. “어떻게 살더라도 결국에는 누구나 인생에서 직면하는 과제를 책을 통해 먼저 배운달까요. 그래서 동양학을 공부하게 된 인연에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팔에 알통 좀 생기게 해줘” 김영숙 씨가 ‘즐겁다, 재미있다’를 외칠 수 있는 것도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는 20년 전부터 꾸준히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해오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개인 트레이너 덕분도, 흥미로운 프로그램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무리하지 않게’와 ‘규칙적으로’라는 철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4~5번 규칙적으로 가되, 스케줄을 무리하게 조정해서 출석한다거나 피곤해질 때까지 운동하는 일이 없었다. 그랬더니 숨 쉬듯 습관적으로 헬스클럽에 나갈 수 있었다.

“10년 전쯤부터 좀더 적극적으로 운동하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어느 날 거울을 보니, 팔뚝살이 ‘덜렁덜렁’해서 보기 좋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헬스클럽의 트레이너에게 ‘나, 팔에 알통 좀 배게 해줘’라고 떼를 썼지요.” 트레이너는 껄껄 웃으면서 쉽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꾸준히 상체 근력운동을 했고, 그 결과 아가씨처럼 매끈한 팔뚝은 아니지만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요.”

와인 공부 역시 녹록하지 않았지만 즐겁게 반복한 끝에 이를 수 있었다. “함께 수강한 젊은 사람들은 대개 와인에 관계된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얻는 지식도 상당했겠지요. 그래서 저는 와인 전문 잡지를 주의 깊게 읽었고, <와인 바이블Wine Bible>이라는 책을 교본 삼아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항상 찾아봤어요.”


1 젊은 시절 김영숙 씨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가족 사진.
2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특히 생소한 용어가 많은 와인 공부는 반복 학습이 중요하다. 그는 <와인 바이블>이라는 책을 꼼꼼히 완독했고, 다시 처음부터 보고 있다.
3, 4 20여 년간 매진해온 고전 공부가 들숨과 날숨처럼 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와! 오늘 하루도 숨 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릴 적 서른 살 후반인 친정어머니를 보며 ‘아유, 저렇게 늙어서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맙소사! 이젠 당시 엄마 나이의 두 배가량 들었는데도 참 재미있게 살아요. 돌아보니 그 나이마다 의미가 있어요.”

김영숙 씨는 나이를 의식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다. 가령 제한된 체력을 생각해서 우선순위를 정해 하고픈 일을 선택, 집중하며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미국에 사는 며느리 친구들과 신나게 논다.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싶을 때는 바른다. “나 좋으면 되었지요. 나이가 들었다고 중성中性이 아니에요. 눈 감을 때까지 여자이고 싶은 게 사람 본능이고, 그렇게 자신을 가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에요.” 물론 늙는다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작년 추석 크루즈 여행 중에 사진을 찍어서 바로 저녁 만찬 시간에 보게 되었는데 “어머나 이 쭈글쭈글한 사람이 대체 누구야?” 싶었단다. 늙은 줄은 알았지만, 원 세상에 주름이 그리 심각하게 생겼을 줄은 몰랐다며 깔깔 웃었단다.

“젊을 적부터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토록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내가 뭐 대단해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나’ 싶고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도 숨 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말해서 내일 갈 지도, 20년을 더 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사실 죽으면 머릿 속 지식이 다 무어겠어요. 죄 사라지겠죠. 그렇다고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생에 대한 모독이에요. 매 순간, 한 호흡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눈 감기 전까지 하나를 더 알게 된다 해도 고작 해변의 모래알 하나만큼도 못 얻는 셈이겠지요? 그러나 큰 행운에 감사하며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와인을 즐기는 70대,건강에 이상이 없을까? 와인은 과일이 발효된 술로,하루 한 잔(와인잔의 1/3 정도) 정도 마시는 것은 건강에 이롭다. 특히 나이 든 분들의 경우 적량의 와인은 혈액순환을 돕고 음식과 함께 즐기면 소화 기능을 좋게 할 뿐 아니라 풍미를 돋우어 기분도 좋아진다. 도움말 박광은(박광은 한의원 원장)

헬스 열심히 하는 70대, 괜찮을까? 관절에 무리가 가는 기구를 사용해 운동하지 않는다면, 노년기에 규칙적인 운동은 아주 바람직하다. 70대 여성의 경우에는 리듬을 타며 서서히 걷는 운동부터 시작해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이어서 스트레칭을 하고, 근력 은동을 원한다면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익히는 게 좋다. 60, 70대 여성이라도 꾸준히 운동을 해온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근육이 잡혀 있어 훨씬 수월하게 운동할 수 있고 부상 위험도 적다. 도움말 JW 메리어트호텔 퍼스널 트레이너 이주영 매니저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