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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패티김 씨의 황홀한 고백 나는 신비로운 디바가 될 거야
카프카가 말했다. “세상은 세상대로 가라. 나는 내 갈 길을 갈 테니.” 노래로 자신만의 세상길을 밝혀온 가수 패티김 씨. 그가 4월 말 데뷔 50주년 기념 대공연을 앞두고 있다. 창밖에서 속절없이 봄꽃들이 지고 있다고, 얼마나 꽃들이 빨리 지는지 방바닥에 볼을 대고 눈물 흘리는 패티김은 세상에 없다. 세상에서 따라 부르기 가장 어려운 ‘패티김식 노래’를 연마 중인 ‘현재진행형’ 가수 패티김만이 존재할 뿐이다.


공연장 벽에 붙은 곤충이 돼서라도 그의 리사이틀에 가고 싶어한 건 내 어머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11월의 음성으로 커피향처럼 맴돌다가 한순간에 폭풍처럼 몰아치는 고음의 마력에 ‘엘레강스 우먼’들은 자신의 18번곡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으로 만들곤 했으니까. 광활한 음역으로 스탠다드 팝을 소화하는 가수 패티김의 노래는 그래서 제대로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노래방에서 흥 깨는 데 최고인!)로 여겨졌다. 가수 패티김. 그는 이제, 대형 서커스 공연장처럼 변해버린 요즘 대중음악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으로 우리를 위로할 거라고 선언한다.
4월 30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50주년 대공연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1959년, 미8군 무대에서의 쇼를 시작으로 계속된 노래 인생 50주년! 5주년도 거룩해 죽겠는 시절에 50주년이라니, 그의 앞에 빨간 양탄자라도 깔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축하의 다발 속에서 덤덤해진 건지 그는 편안해 보였다. 올해로 70세가 됐다는 그는 소피아 로렌 같은 충만한 몸매, 브리짓 바르도를 능가하는 깊은 눈매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촬영장에서도 이광희 부티크의 롱 드레스와 돌체 앤 가바나의 남성용 화이트 셔츠를 번갈아 입고 쿨한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웃고 찡그렸다. 그의 왼쪽 어깨엔 강렬한 원색의 정글 앵무새 문신이 올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 가수 패티김의 이야기다.

텐션Tension이라고요? 그래, 확실히 나는 항상 긴장하고 살았지. 정말 맘 푹 놓고 두 다리 쭉 뻗고 밥 막 퍼 먹고 그런 적 없었어.
제일 좋아하는 게 밥하고 김치니까 너무 많이 먹을까봐 무서워서 김치 못 담그게 한 적도 있잖아.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난 머리카락 헝클어지는 법이 없어요. 세탁소 사람이 왔을 때도 립스틱이라도 바른 다음에 문 열어줘요. 무대에 오를 땐, 한 번이라도 신었던 흙 묻은 신발은 다시 신지 않아요. 무대 의상 입으면 절대로 의자에 앉지 않는 게 50년 동안 지켜온 내 철칙이야. 관객한테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보이려면 옷주름 하나도 없어야 하거든. 집에서 잠을 잘 때도 베개 밑으로 얼굴 근육을 잘 펴고 자.
내 얼굴 구겨지는 모습을 남편한테 보이고 싶지 않거든. 근데 이런 건 우리 어머니 영향도 좀 있어요. 나는 아직도 어머니 생각하면 머리 곱게 빗고 옷 곱게 입고서 신문 보시던 모습이 떠올라. 옷고름 대신 브로치 단 저고리 즐겨 입으시고, 그때마다 진주 브로치엔 진주 반지, 비취 브로치엔 비취 반지처럼 브로치랑 반지를 꼭 한 세트로 하셨어요.
‘패티김=긴장’ 이건 내가 산 인생 때문이기도 해. 20대, 30대 한참 즐겁게 지내야 할 나이였을 때 나는 노래에 열중했고, 내 음악 생활에 털끝만큼이라도 방해가 되는 건 절대 금물로 알고 살았어요. 1960년에 NHK가 초청해서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1963년에 미국 진출해서 캘리포니아,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할 때도 늘 그랬어요. 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건 노래 하나뿐이었으니까. 내가 “I came from Korea” 그러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어쩌다가 열 명에 한두 명은 “아, 전쟁 난 나라?” 이런 시절이었으니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강해야 한다,’ 나는 그냥 그거밖에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저 연습 열심히 하고. 어디 니들, 내 노래 좀 들어봐라. 그랬다고. 그때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내 키가 큰 편이었는데도 그 나라 가서 더 커 보이려고 구두도 더 높게 신고 머리도 한 뼘만쯤 올렸지. 나는 술 담배도 안 하고, 미국 쇼비즈니스 세계 사람들이 흔히 하던 마리화나도 안 했어요. 거기 살면서 도박 안 한다는 거 엄청난 자기 관리를 필요로 하는 건데 난 도박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그렇게 긴장하면서 단순하게 살았어요. 지금도 난 술 담배도 안 하고 화투도 안 치고 계 모임도 안 나가.

그렇게 살다보니까 내 성격이 굉장히 강해졌어요. 더 강하고 도도해지고. ‘거만하다, 도도하다’는 수식어는 50년 동안 날 따라다닌 건데, 나도 부정은 안 해. 우리 가족이 거의 다 거만해요. 특히 우리 부모님이 그러신데, 아버지가 메이지대 출신이고 어머니가 숙명여고 나왔으니 뭐, 그럴 만도 한가? 근데 미국에서는 They don’t care! 내가 거만해도 ‘아유, 뭐 왜 그렇게 건방지게…’ 이런 게 없었어. 1960년대 중반에 한국에 딱 돌아오니까 내 언사나 태도 이런 게 다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거더라고. 미국에서는 여자들이 앉을 때 꼭 요렇게 하고 다리를 꼬잖아? 그들에게는 그게 정식이야. 근데 한국에선 ‘건방지게 저, 다리 꼬고 앉아서 말이야’라며 뭐라 했어. 그 시절, 프로듀서들 보고 다들 ‘PD님, PD님’ 그럴 때도 나는 ‘미스타 황, 미스타 조’ 그런다고 다들 뭐라 그랬어. 미국에선 그게 존칭이었는데 말야.
근데 거만하고 도도한 거는 내가 사실 의식적으로도 많이 그랬어요. 나를 스타라고 불러주면 나도 스타답게 굴어야지, 바구니 들고 시장 가서 콩나물 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내 품격 지키려고 밤업소에도 안 나갔어요. 나는 담을 쌓아놓고 딱 그 안에서만 살았죠. 그래서 사교적이지 못했고, 대인기피증이란 소리도 듣고 그랬었는데.
30주년을 지내고 40주년을 계획하면서, 내 나이가 50이 되면서 내 분위기나 태도나 자세를 조금은 고칠 때가 됐다 싶더라고. 근데, 난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이에요.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고 나는 1년, 10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만들고, 가능한 한 선택한 길로 가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쉰 살이 되면서 이제, 조금 겸손해져야겠다 했지. 그렇게 마음먹고 좀 바뀌는 데 한 10년 걸렸어요. 그렇게 오래 걸리더라고, 허참. 30년 동안 내 몸에 밴 게 있잖아. 요즘엔 손주 이야기, 늘어난 뱃살 이야기도 공연에서 하고 객석으로 내려가서 팬들 손도 일일이 잡고 해. 화장도 옅게 하고 웃으려고 노력하고. 근데 사람들도 바뀐 내 모습을 더 좋아하는 거 같고, 또 사람이 조금 수그러져야 할 때는 그렇게 돼야 그게 미덕 아니겠어? 그치만 이 이상은 더 수그러들지 않으려고 그러지. 하하, 이 이상 수그러들면 그거는 나하고 어울리지도 않아. 정말이지 나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늙고 싶거든.
사실 이거는 솔직한 얘기인데 내가 좀 이중인격이다 그거지. 무대에 섰을 때 패티김하고 무대를 떠났을 때 패티김하고 너무 다르니까. 나는 패티김하고 김혜자(그의 본명)를 분리하려고 무척 애써왔어요. 그런데 우리 딸들 말에 의하면 김혜자는 자신이 항상 패티김이라는 거를 의식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고. 우리 식구 아닌 제3자, 친구들이 온다던가 손님이 온다던가, 누구 인사를 받을 때는 우리 딸들이 날보고 “또 TV smile 짓네” 그래. 관객 앞에서 하는 그 얼굴이 나온다 이거야.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을 거야”(패티김의 ‘이별’ 중에서)
흐흥. 좀 나이 드신 이들은 패티김 하면 길옥윤 먼저 떠올리잖아요? 1966년에 TBC가 자꾸 우리 두 사람을 묶어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그해 3월에 길 선생이 나를 위한 노래 ‘4월이 가면’을 만들어줬어요.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보면은 애절도 해라~.”
4월이 가고 나서도 길 선생이 안 떠나가대. 그래서 6월에 약혼하고 12월에 결혼했지.
그리고 6년을 같이 살았어요. 근데 길 선생은 예술가였지, 가정을 가질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어요. 그이는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몇 십 년 계획을 짜놓고 거기에 맞춰서 사는 사람이잖아. 부부가 아니었으면 우린 더 오랜 세월 함께 작업을 했을 거야.
근데 괜히 내가 결혼하자고 해서 그 사람을 망쳐놨지, 흐흐흥.
결혼한 지 6년째 되던 해에 길 선생이 미국으로 떠났어요. 센트럴파크의 눈 내리는 풍경 보면서 ‘이별’을 만들었대.
난 그 곡을 취입했고 대히트를 했지. 그리고 우리는 노래 가사처럼 이별을 했어요.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그 이후에도 ‘사랑은 영원히’(이 노래는 그에게 동경가요제 동상을 안겨줬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천 구백 구십 구년에 정아는 스물 하나’(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정아를 위해 길옥윤 씨가 작곡한 노래) ‘서울의 찬가’를 같이 작업했어요. 이혼하면서 내가 부탁한 게 그거라고. “우리가 부부로서는 참 실패를 했지만 작곡가와 가수로서는 이 이상의 콤비가 어디 있느냐. 우리 음악생활은 계속합시다. 일 년에 한 번씩 앨범을 냅시다.” 근데 길 선생이 그 약속을 안 지켰어. 참 안타깝지.

내가 지금 남편 아르만도와 재혼하고 둘째 딸 낳았을 땐데, 길옥윤 씨가 샌프란시스코엘 온대요. 공연은 아니었던 거 같애. 아, 그래서 좋다고 했지. 카밀라 아빠가 운전하고 난 앞에 타고 길 선생은 뒤에 타고 하루 종일 관광하고. 초저녁이 다 돼서 그게 어디냐,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이었던 데 말야. 거기 바닷가 앉아서 노을을 보다가 우리 남편하고 나하고는 맥주 반에 사이다 반 섞어 마시고, 길 선생도 맥주 마시고. 길 선생은 나중에 좀 더 진한 걸로 갔지만. 내가 그 농담까지 했다고. “It’s not too bad! 아, 이것도 참 괜찮다. 이쪽은 지금 남편, 이쪽은 전 남편.” 흐흐흥. 길 선생이 그날 굉장히 기분 좋았어요. 나중에 우리가 다시 함께 일하길 권한 사람이 우리 남편이었어요.
‘길옥윤의 노래를 가장 열정적으로 불러준 가수’가 패티김이라면 ‘패티김에게 가장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어준 작곡가’가 길옥윤이라면서.
우리 남편은 천성이 착한 사람이야.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그러니까 내가 여태 같이 살지. 아니면 내가 제3의 남편을 구해야 하는데, 흐흐흥. 정말 정말 선인이야.
길 선생이 부도 사건 내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로 1990년대 중반에 암에 걸렸다, 죽을 거다 그런 소식이 들려오더라고. 타국 땅에서 그렇게 가난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방송국 사람 몇몇이서 한국에 모시고 와서 ‘길옥윤 이별 콘서트’라는 공연도 하고. 명예 회복은 100% 하고 돌아가셨어요. 단지 전 남편이었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동료이자 같은 음악 하는 예술인으로서 선배의 명예 회복 해드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지. ‘이별 콘서트’ 때 방송국에서 길 선생이 그러대.
“역시 옛 친구가 좋군요.”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패티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중에서)
내가 50년 동안 앨범 70장에, 노래는 한 천 곡쯤 담았거든. 그 중에 내가 가장 명곡으로 꼽는 노래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빛과 그림자’ ‘9월의 노래’ ‘사랑은 생명의 꽃’ ‘사랑은 영원히’야. 모두들 ‘초우’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더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곡들이야, 말하자면. 그러나 팬을 위해서 내가 항상 부르죠. 패티김 이야기할 때 또 한 분 꼭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박춘석 선생님인데, 1962년에 내 데뷔 음반을 내준 스승이지요. 패티김과 박춘석,
‘초우’는 3종 세트지. 사실 나는 ‘초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노랠 처음 부를 때 내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거든요. 45년 전에 미국이라는 신천지로 떠날 준비하는 양명한 청춘인데 이 노래 가사가 가슴에 젖어들겠어?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나중에 몇 번 리메이크해 부르면서 ‘사랑에 빗소리도 흐느낀다’는 의미를 안 거지. 헌데, 사람들은 패티김의 최고 명곡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라고 하대. 이것도 박춘석 선생님 곡인데, 1983년에 부산 공연할 때 박 선생님이 호텔에서 밤새워 작곡했어요. 호텔 클럽으로 날 데리고 가더니 “패티, 들어볼래” 하고는 피아노 연주를 하셨지. 아, 전율이었어. ‘초우’랑은 다르게 가사 한 줄, 멜로디 하나가 다 가슴에 스미는 거야. 내가 그동안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별을 하고…
인생이 한순간 입 안에 가득 쓴맛만 남겨주는 쓸쓸함이라는 거, 그걸 알게 된 거지. 노래는 역시 가슴으로 세월로 부르는 거예요.
근데, 내 노래가 어렵다고? 어우, 난 그 이유 잘 모르겠어. 너무 쉬운데. 이별도 어렵다고 그러고, 초우도 어렵다고 그래. 초우는 얼마나 쉬운 노래야. 하긴 내가 노래방 가서 초우를 불렀더니 54점 나오고, 뭐, 노래 연습 많이 하셔야겠습니다, 가능성이 없다고
기계가 떠들더라고. 막 큰 소리로 이별 부르고 이런 사람은 딴따따따~ 그러고 90점 나오는데. 그래서 다시는 노래방 안 가려고. 하하. 내 노래가 어렵다! 그건, 클래식한 스탠다드 팝이면서도 동양적인 한이 만만치 않다고 그러잖아.
그게 내가 국악 공부해서 그렇다고 평론가들이 그러대. 고등학교 때 내가 국립국악원에 다니면서 심청가도 6개월 만에 완창하고 그랬어요.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하고 했지. 그때 탁성과 긴 호흡을 배웠어요. 고음이 몇 소절씩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호흡이 끊기질 않는 건 그때 닦은 기본기 덕분인가봐. 내가 내 노래 평하자면 흠흠, 불꽃이 막 이글이글거리는 빨간색이야. 향기로 치면 은은히 오래가는 라일락 향, 재스민 향.

“천 구백 구십 년 정아는 스물하나, 천 구백 구십 년 꽃피는 스물하나, 봄이 오면 사랑을 알고 여름이 오면 피가 끓겠지~.”(패티김의 ‘천 구백 구십 년 정아는 스물 하나’ 중에서)
애들이 어렸을 때, 남편도 젊고 왕성했을 때 자꾸 집을 비우는 것이 죄인같이 미안했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집에 있는 동안은 100%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애들 아침 간단히 뭐, 빵 구워주는 거지만 도시락 싸주고 버스 타러 가는 거 다 내다보고.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중나가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왔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면 집이 너무 허전하잖아. 그런 경험을 애들이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좋았던 거 잘했던 거보다는 섭섭하거나 허전했을 때가 더 인상에 남는 거잖아.
정아가 뉴욕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매일 같이 아이 손잡고 건널목 여덟 개를 건너 데려다주곤 했었지. 한국 에미의 극성이라고
내 동생이 그러대. 근데 나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봐. 애들이 자라고 나서는 그걸 알아채더라고.
우리 남편은 이탈리아에서도 플로렌스 태생인데, 거기 사람들이 굉장히 예술적인 감각이 많아요. 남편은 내가 부를 노래를 선정해주거나 비평도 하고 그래. 참 훌륭한 남편이지. 큰 소리 내지 않고 항상 조용히 날 이겨왔으니까. 아주 자분자분하면서도 인내심도 있고. 외.유.내.강. 고집 세고 욕심 많은 나한테 너무 필요한 성격을 가진 남편이야.
그러고 보면 나는 ‘인생은 즐거워’라고 말할 수 있겠네. 사실 내 삶에 크게 후회라는 건 없어. 그래, 패티. 참 너 애썼다.
너 힘들게 잘해왔다, 하고 내 어깨를 가끔 두드려주고 싶을 때가 있는걸.
패티김한테 주는 점수? 내가 날 관리해온 거에 대해서는 95점 이상 줄 수 있다고 자신해. 김혜자로서, 그러니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도 음식 솜씨 없는 거만 빼면 90점 이상은 줄 수 있어. 음식을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점수를 줄 수가 없지. 흐흥. 나는 집 안의 그릇, 가재도구 이런 거 하나 챙기는 것도 끝내줘. 갑자기 정전이 되도 뭐가 어디 있는 줄 금세 찾아낼 수 있다니까. 여기서 내가 한 마디 덧붙이면, 아까 내가 패티김하고 김혜자를 분리해서 말했잖아? 이걸 합쳐서, 내 한 몸에서 패티김이 차지하는 부분, 김혜자가 차지하는 부분에 대해 나한테 물어본다면 8:2야. 패티김이 8, 김혜자가 2지. 김혜자는 패티김을 위해서 너무 많은 걸 희생해왔어. 포기한 것도 많았고. 그랬어, 김혜자는 제대로 연애도 잘 못했잖아. 내 이미지 때문에. 나보고 제일 후회스러운 게 뭐냐고 물어보면 ‘연애 많이 못한 거요!’ 그럴 거야, 흐흐흥.

“나는 새가 되고 싶어요, 나는 별이 되고 싶어요, 나는 아름다운 꽃이 되고 싶어요. 내가 사모하는 님이여, 나를 사랑하는 님이여, 영원히 나를 사랑해주오”(패티김 ‘사랑은 생명의 꽃’ 중에서)
왜 그런 거 있잖아. 황홀한 일몰. 오렌지, 옐로색도 막 나고 그 위엔 파란색이 딱 있고, 그런 일몰 알지? 사람들이 다 모여 앉아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막 감탄하는. 2년 전에 어떤 잡지랑 인터뷰하면서 “2년 뒤 데뷔 50주년을 맞았을 때 사람들이 패티김 하면 ‘아, 혼신을 다해 온 바다를 진짜 붉고 화려하게 물들이고 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라고 했어요. 난 나이 50대가 되면서부터 무대를 언제 떠나야 되나, 또 어떻게 떠나야 영원한 패티김으로 남을까, 그거 생각해보면서 왔어요. 나는 은퇴란 말은 쓰고 싶지도 않고 아마 영원히 쓰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무대를 떠나야 할 때 그땐 정말 멋있게, 그냥 막 황홀하게, 와! 멋있다, 감탄사가 막 나오게, 정말 아쉽다 싶을 때 떠나고 싶어요. 그런데 이제 진짜 50년을 맞았네? 지금 내 소망이랄까, 꿈이랄까…는 좀더 오랫동안 막, 이글이글 붉게 물든 노을이 좀더 오래갔으면 하는 건데. 내 욕심일까? 해가 영원히 바다 위에 얹혀 있진 못하니까 언젠가는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되겠지? 흐흥. 우리 동생하고 남편에게 부탁해놨어요. ‘혹시 음정이 불안하면 ‘패티, 이츠 타임’이라고 말해달라고. 나는 자서전 따위는 안 남길 거야. 영원히 신비스러운 디바로 남을 거야. 아직도 팬들은 내가 집에서도 실크 가운 입고 있는 줄 아는데, 내 사생활 다 밝혀서 뭘 하나.

그는 추억을 불러일으킬까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과거의 연대기를 풀어냈다. 그 담담한 어조 아래에는 질주의 시대를 추억하는 디바의 음성, 힘겨워하는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위로와 카타르시스 그리고 치열하게 삶을 담금질한 인간의 눈물방울이 한데 뭉쳐져 있었다. 어쩌면 큰 슬픔은 정작 자물쇠가 없는 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쯤 그는 무대의 고독 속에서 막 고해를 마친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는 아직도 수영과 걷기, 요가를 부지런히 하고, 지치지 않기 위해 말을 적게 하고 많이 쉬려고 애쓴다. 지금까지 영양제나 보약을 먹은 적도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평생 동안 삶을 반듯하게 가꾸기 위해 자신을 호되게 훈육하며 살아온 가수 패티김.
장렬한 카리스마의 대가수는 공연을 한 달 남짓 앞두고 피로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힘차고 힘찼다.
70세의 디바는 북방민족처럼 당당한 팔과 어깨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새 인생을 눈부신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그의 명곡이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