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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심 씨가 그린 밥상에는 이야기가 배어 나온다. 이 밥상을 마주할 사람들의 속사정이 들릴 것 같다. 제목부터 읽어볼까. ‘든든한 아침을 위하여’는 밥 한 술 밀어 넣기 무섭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밥상, ‘그대에게’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차려낸 수줍은 밥상, ‘첫인사’는 결혼을 앞둔 남녀의 팽팽한 양가 상견례 밥상 이야기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지요. 저는 조형보다도 내러티브가 먼저 떠올라요. 우선 기억, 사건, 사물에 대해 혼자 종알종알 이야기로 풀어봐요.” 어릴 적부터 그에게 축적된 문학적 감수성이 그림에 묻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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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행복> 3월호 표지작품 ‘4월’(2007년, 79×60cm)과 화가 정경심 씨.
1 정경심 씨 집 근처에 있는 음식점과 동네 사람들을 모티프로 그려낸 ‘봉천 5동 장위동 유성집’(2007년, 74×100cm).
내친김에 <행복> 3월호 표지로 선정된 ‘4월’에 담긴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청해본다. “대학교 연애 시절 추억의 한 토막에서 모티프를 얻었어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풋풋한 두 청춘이 꽃길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졌어요. 제가 “와!” 하며 감탄하면, 그 청년은 제가 웃는 모습 보겠다고 한 걸음 앞에서 나무를 발로 뻥 차서 꽃비가 우수수 내리게 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나이 들어 돌아보니 분홍빛 기억은 쓸쓸한 인생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더라고요.” 그래서 피면 지고, 지고 나면 또 피어나는 벚꽃으로 밥상을 차렸다. 화사하게 만발한 벚꽃은 이미 질 때를 알고 있다. 밥상 주위에 떨어진 꽃잎이 애잔한 운명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함께 밥상을 마주하면 되니까. “그게 사랑이에요. 마냥 달콤한 것만이 아니라, 쓸쓸함을 내포하고 있는 우리가 서로를 어루만지는 마음 말이에요. 21세기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촌스럽지요? 하지만 그게 저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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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밥이라는 것’(2007년, 54×76cm).
3 아침 밥 먹기가 무섭게 헉헉대며 일터로 향하는 가장들을 생각하며 그린 ‘든든한 아침을 위하여’(2007년, 68×59cm).
4 ‘내 마음은’(2007년, 40×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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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에서 마치 콜라주처럼 차분한 채색 기법과 활기찬 먹선이 조화를 이룬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법을 운용하는 그의 그림은 잡지 일러스트로 썼을 때도 독특한 분위기를 냈다. <행복>에서도 그의 일러스트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는 일러스트 작업을 잠시 미루고 전시회 준비에 몰두했다. 지난해 학고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는 네모반듯함을 파기하고 적당히 흐트러진 밥상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기법의 아이러니한 조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림 그리는 작업이란 ‘무한한 자유 속에 구속된 느낌’이라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을 이해할 것 같다.
끝으로 일상에서 내러티브를 채집한다는 정경심 작가의 촉수에 걸린 밥상 이야기 하나. “얼마 전 작업이 좀체 진전되지 않아 잔뜩 피폐해졌어요. 작업실에 있다가 집에 와보니 전주에 사는 친정 어머니가 병어조림을 해놓고 가셨더라고요. 딸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셨겠죠. 식탁 위 냄비에 누워 있는 병어 두 마리를 한참 바라보노라니 그게 그림 같았어요. 침체되어 있던 작업이 병어조림으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었어요.”
화가 정경심 씨는 199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2007년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아홉 번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지난해 학고재에서 연 첫 개인전 <밥상> 전시를 시작으로 올해 바쁜 전시 일정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