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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 씨 내 안에 늙지 않는 짐승 한 마리 있어
올해로 예순세 살이 된 작가 박범신. 그는 더 이상 가을을 타지 않는다. 그가 이미 가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단하지 말라. 그는 아직도 몸에 깃든 불타는 여름과 잔인하게 폭발하고 말 신생의 봄으로 가득 차 있으니. 여전히 ‘청년 작가’란 닉네임이 어울리는 그가 인터넷 연재 소설 <촐라체>를 발표하고 어린아이들의 팬레터에 둘러싸여 있다.

마음 오지게 먹고 마시면 소주 한 병이라는, 서너 잔만 마셔도 머리 꼭대기에서 물의 신열이 빠져나가려고 악을 써 육체가 먼저 쓰러진다는 그가 반주로 머루술 한 병 죄다 마시고 왔다고 했다. 술은 마음에 찍히는 연지곤지 같다고, 술을 마시는 건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솔직해지기 위해, 영혼 깊은 곳에서 본성을 끌어내려 마시는 거라고 속삭임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한잔 술로 ‘가슴에 기차가 지나가는 상태’가 돼버렸다는 그는 그 황망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지 서둘러 인터넷 소설 이야길 꺼냈다. 지난해 8월부터 올 1월까지 인터넷 사이트 네이버에 1백2회 연재한 소설 <촐라체>는 조회수 1백20만 이상을 기록하며 ‘인터넷 정통 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직도 원고지에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 글을 쓰고 이메일도 쓰지 않는 그가 원고지 그대로를 팩스로 보내 인터넷에 등재한 소설이었다. ‘귀여니’류의 팬시 문학이 창궐하는 인터넷 문학판에서 ‘남성들의 잃어버린 야성을 회복해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초등학생의 팬레터, 중학생 팬과의 온라인 토론으로 이어졌다. 동시대 작가들이 사적 체험에 실족해 있을 때 야성과 신열을 함께 품은, 아니 통렬한 산화를 꿈꾸던 남자들의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며 확장되었다. 이 <촐라체>는 2월 말쯤 종이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작가 박범신. 46년생 개띠. 충남 논산 연무읍에서 오로지 아들 하나를 욕망하던 어머니의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난 ‘귀남이’, 아버지*어머니*누나 넷 일곱 명의 식구가 여섯 자, 여덟 자 방 두 칸에서 머리를 지그재그로 포개어 자던 가난의 시절, ‘골이 쏟아지려고 한다’면서 항상 대님 끈으로 질끈 이마를 동여매고 있던 어머니의 표정에서 배운 가족이라는 무거운 맷돌의 이미지, 편지로 구애의 말을 은밀히 전하던 대학 일 년 후배, 남자가 앓고 있는 청춘의 병이 무언지 알았고 그와 더불어 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얼 바치고 버려야 할지 이해했던 후배, 그 후배와 결혼해 강경읍 채산동 방 두 칸짜리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신혼,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기까지의 고초의 시간 끝에 1979년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가 잇따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화려한 80년대, 뒤이은 <불의 나라> <물의 나라>의 대히트, 그리고 문청들을 뒤척이게 하고 누군가의 기록 속에 각주로라도 인용되기를 소원하는 이들을 뒤척이게 하기까지.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개념으로 문학관을 세웠고 곡절이 무엇이건(잘 팔리는 게 늘 미덕으로만 비치지 못하던 문학판이니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세 아이의 아비 된 자로 가정과 문학, 인생의 일가를 이루었다. 만해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을 거쳐 명지대 문창과 교수가 되는 것으로 양명의 터전 위에도 서 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이들에 비하면 그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모두가 부러워할 즈음 그는 1993년 돌연 절필 선언을 했다. “정확히 1993년 12월이었어요. 난 그때 40대 후반이었고 유명 작가의 기득권도 갖고 살았죠. <문화일보>에 <외등>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할 때였고, 객원 논설위원으로 매주 한 번씩 칼럼도 쓰고 있었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내 안에서 ‘안 돼, 멈춰야 해’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상투적인 이 삶을 멈춰야 한다고, 내 삶의 정체성 하나 보지 못하는데 왜 써대고만 있냐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겨울비 내리는 새벽, 가슴속 야수와 싸움을 벌이던 그때, 그의 아내가 양팔을 벌리고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는 것처럼 그를 안았다. ‘소설 그만 써. 그러다가 죽겠어.’ 아내의 그 한마디에 그는 울고 또 울었고, 울음이 멈췄을 때 원고지를 펴고 ‘연재를 중단하며….’라고 썼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단 한 장의 글도 쓰지 않고 용인 산골에 박혀 서툰 농사꾼으로 혼자 살았다. 매양 하는 일이라곤 파리채로 파리를 때려잡거나 지천으로 핀 망초꽃 사이의 소롯길을 헤매고 다니거나 옥수수 밭을 매는 것뿐이었다.
“떠났을 때, 쓰지 않게 됐을 때 삶이 홀가분했나요?”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했죠.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만났던 위기지요. 내 인생을 지탱해 주던 글쓰기, 내 목표와 방법이었던 글쓰기를 포기한다는 건, 스스로 임종을 선언한다는 이야기니까.”

‘쓰지 않는 박범신’은 애당초 그의 삶에 없는 거였다. 소설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해 신당동 시장 골목 이층 방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허구한 날 쓰고 또 쓰던 그 시절에도, 강경읍 채산동의 책상도 없는 신혼방에 엎드린 채 소설을 쓰던 시절에도, 초등학교 교사로, 중학교 교사로 직업을 바꿔가면서도 30분마다 절망하며 글쓰기를 갈구하던 그 시절도, 등단하고 나서도 원고를 발표할 데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시절에도, 아내가 임신한 몸으로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양복지를 팔러 다니던 그 시절에도 그는 쓰고 또 썼다. ‘인기 작가’란 이름을 흩날리던 그 시절에도, ‘그놈의 소설만 머릿속에서 지워 없앤다면 너무 행복하겠다’고 괴로워하던 그 시절에도 그는 썼다. “나는 작가야, 라고 중얼거리며, 그 혼잣말에 큰 감동도 받곤 하면서 쓰고 썼어요. 아내 몰래 울면서 쓴 날도 있었죠. 그런 내가 쓰기를 그만둔 거죠. 더 이상 글로 밥 먹고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절필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떠나셨지요.” “떠남은 쓰기를 그만두겠다고 작정한 그 새벽부터 시작됐어요. 폭설이 내리는 신풍령 고개를 세 시간 동안 넘으며 뜨거운 것이 자꾸 목젖을 눌러왔어요. 인간이란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 칼 쓴 춘향이처럼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이 그날 밤 내 맘에 찾아왔어요. 새벽녘, 무주의 제자 집 문을 두드렸고, 따뜻한 안방에서 몸이 훌쩍 가벼워진 걸 느끼면서 오래오래 잤죠.”
그 후로 그는 히말라야와 킬리만자로를 떠돌았고 가족도 다 떼놓고 용인 굴암산 아래 오두막집에 내려가 살았다. 작가의 숙명을 버릴 수 없던 그는 1996년 절필 3년 만에 돌아와 이듬해<흰소가 끄는 수레>를 내며 세상에 그의 부활을 알렸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줄곧 떠났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를 열 번 정도 다녀왔다. 2004년엔 더 이상 교수질로 밥 먹고살지 않겠다며 명지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은둔했고, 다시 그 후 2년 동안 히말라야의 설산을 헤매며 그 시절의 반은 집을 비웠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어요. 외롭고 아득하긴 했지.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어, 이러다 돌아가는 길을 아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긴 했죠. 2년 후에 대학에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더니 여자친구(그는 아내를 여자친구라 부른다)가 좋아라 하며 ‘이제 어디 안 가고 집을 좀 지키겠네’ 하대요. 그런데 이상도 하지, 대학에 돌아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날부터 더 맹렬하게 먼 이역으로 흘러다니는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떠나기만 하는 남편의 병을 이해하는 아내, 대단한 분이 틀림없죠?” “대단한 사람이고 좀 이상한 사람이지. 30년이나 살고서도 나한테 연애 감정을 느낀다잖아. 하지만 그것 때문만이겠어? 여자친구는 나보다 덕성 있는 사람인 거지. 나와 생을 살아가려면 뭘 바치고 버려야 할지 이해한 사람이지. 그래도 소심한 구박은 좀 했어요. 교수 관두고 집에 있는 동안엔 ‘삼식이’가 됐지 뭐예요. 집에서 하루 세 끼를 다 먹는 최악의 일당 ‘삼식이’. 힉. 여자친구가 저녁상 차려놓고 ‘야, 삼식아, 밥 먹어라’ 하면, 하루 세 끼 거르지 않고 밥을 잘도 얻어먹었어요. 얻어먹는 밥이 더 맛나는 거 알죠? 여자친구에게 매일 이랬죠. ‘당신 음식 솜씨는 이제 입신의 경지를 넘어서 아주 신이야. 신이 만든 음식을 하루 세 끼씩 얻어먹는 나는 아마도 주신主神이겠지? 있잖아, 나는 간식도 당신이 지은 밥으로 하고 싶어!’ 힉.”

그 여자친구는 지진계보다 예민한 작가의 울타리가 돼주었다. 아내 이야기를 듣자니 김치 먹는 개를 보고 울던 기묘한 감수성의 내 대학시절, 작가 박범신의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여자친구가 구급차에 실려 가 산소호흡기를 코에 꽂다 나온 적이 있는데,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자친구가 불편한 몸으로 새로 한 쌀밥과 호박국을 차려놓았더란다. 창밖에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햇빛은 쨍쨍했다는 그 아침, ‘그’는 어금니를 앙다물고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는 일화 앞에서 나 또한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의 인생엔 서로 다른 이름의 ‘촐라체’가 있어요. 그건 곧 넘어서야 할 이상이자 목표이고 상징이지요. 내겐 소설 쓰기가 촐라체이고 빙벽이죠. 멈추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잊고 사는게 뭘까요? 본성, 야성, 이상. 바로 촐라체를 잊고 살아가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촐라체가 무언지 찾기를, 그리고 촐라체를 향해 올라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의 여러 조각엔 히말라야의 설산이 자리한다. 장대한 히말라야를 순례하듯 피어리게, 느린 걸음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의 히말라야행은 험산 준령을 등반하는 ‘탐험’이 아니라 트레킹을 하며 산 주위를 도는 ‘순례’에 가깝다. “내 안에서 나도 알 수 없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 그러니 여기서 ‘사고’를 안 치려면 떠나야겠다, 떠나서 걷고 또 걸어야겠다, 마음먹게 돼요. 참 이상한 일이죠. 히말라야에 다녀오고 나면 머리에 갑갑하게 쓰고 있던 두건을 갑자기 벗은 것처럼 세상이 툭 트이고 환해져요. 축복받은 것처럼.” 그렇게 걷고 또 걷고 나면 몸무게는 쭉 줄고 눈빛은 가팔라졌다. 어떤 이들은 히말라야에서의 그를 ‘당나귀 같고’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평소의 균형 잡힌 그가 진짜 그인지, 히말라야 설산에서의 당나귀 같고 이상한 그가 진짜 그인지, 그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몸무게가 쑥 빠진 그를 보고 여자친구가 히말라야에서 대체 뭘 찾아 헤매다 왔느냐고 눈물을 글썽이며 물으면 그는 “사다리를 놓고 싶었나 봐”라는 선문답만 여자친구에게 내놓았다. 그러곤 좁은 뜰을 파헤치고 배추를 기르면서 보냈다.

“정말로 무얼 찾아 자꾸 설산으로 가시는 걸까요?”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빙하 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적도 아래 마을들을 바라봤어요. 그걸 보면서 내가 그리워 찾아 헤매는 것이 사실은 설산이 아니라 그 햇빛 밝은 마을에,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서늘히 깨달았지요. 그래서 허위허위 이렇게 지상으로 다시 돌아왔잖아요.”
“설산의 이야기가 모티프가 된 <촐라체>는 그럼 지상의 이야기인가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만년빙하 세상의 이야기인가요?”(촐라체는 원래 2005년 히말라야 촐라체봉(해발 6440m)에서 조난됐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박정헌*최강식 씨의 실화가 모티프인 소설이다. 두 사람이 서로 로프를 연결한 채 하산하던 중
최 씨가 빙하 틈에 빠지자 박 씨는 로프를 끊지 않은 채 최 씨가 빙벽을 기어 올라오도록 도왔다. 극한상황에
처한 두 사람의 강한 생존 의지가 힘찬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두고 산악 소설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서 촐라체는 단지 봉우리 이름이 아닙니다. 모두의 인생엔 서로 다른 이름의 촐라체가 있어요. 그건 곧 넘어서야 할 이상이자 목표이지요. 내겐 소설 쓰기가 촐라체이고 빙벽이죠. 멈추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잊고 사는 게 뭘까요? 본성, 야성, 이상. 바로 촐라체라는 거죠. 이 소설을 읽고 사람들이 자신의 촐라체가 무언지 찾기를, 그리고 촐라체를 향해 올라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성과 야성에 대해 들으니, 선생님의 글에서 종종 읽은 ‘짐승 이야기’가 떠올라요. ‘내 몸안에 늙지 않는
예민하고 포악한 어떤 짐승이 살고 있다’라고 하셨죠.”
“야수일 수도 있고, 뱀장어 한 마리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인내해야 할 ‘비참한’ 그 무엇이 없다고 생각되면
나를 ‘최상’으로부터 ‘최악’으로 떨어뜨릴 길을 찾아 어서 떠나라고 그 야수가 날 부추기죠. 이 야수가 없었다면 난 잔인한 고독에 눌려 끝내 죽었거나 썩은 영혼으로 살고 있을 거예요. 가슴속에 포악한 뱀장어 한 마리 품고 있기 때문에 결코 고여 있거나 심심해서 썩거나 하는 법은 없지. 열대어들 속의 뱀장어처럼 언제나 내 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때론 고문하고 때론 내 몸을 찌르는 그놈들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야수는, 그 뱀장어는 글쓰기입니다.”

촬영하는 내내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 숨어 사는 야수처럼 포효했다. 영하 10℃의 바람 속에서 그는 신열 오른 무당처럼 들떠 있었다. 그 안에는 정말 짐승이 사는 것 같았다. “지금 선생님의 가슴속에 살고 있는 그 야수가 이순이 넘은 선생님을 여전히 ‘청년 작가’로 만들어주고 있군요.”
“요즘엔 ‘청년 작가는 죽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자청한 이름인데도. 청년이라는게 연애 방식으로 인생을 계속 살겠다는 말이잖아. 이젠 이게 좀 힘이 드네. 내 인생은 연애 한번 한 것처럼 짜릿하게 살았어요. 행운이지. 한순간의 연애처럼 일생이 지나가버렸는데 이런 식으로 노년의 삶을 표현할 순 없겠구나 싶어요. 이젠 깊은 영혼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지금껏 작가의 이름으로 쌓아 올린 기득권이 있다면 깨박치고 싶은 건 마찬가지죠. ‘청년 작가’ 대신 ‘현역 작가’로 살겠다가 맞는 말이겠네, 이젠.”
“정말 생물학적 나이로 ‘청년 작가’인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당부 같은 게 있으신지요?”
“젊은 작가님이여, 제발 소설 쓴다고, 소설은 이야기라고, 소설 속에서 함부로 사람 죽이거나 해하지 말아요. 작가는 소설 속에서 한 명의 인물을 죽일 때 정말 살인하는 사람 이상으로 번뇌해야 해요. 죽이지 않는 길이 있다면 죽이지 않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온몸을 땅에 깔고 기어들어가 죽일 수밖에 없는 필연을 고통스러워해야 하죠.”
“청년으로 살아 행복하셨나요?”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나의 한계는 그거죠. 한 손엔 사람으로서의 ‘책임’이라는 바구니를, 또 한 손엔 예인으로서의 내 이상을 지켜낼 창을 들고 살았으니까. 나는 두 가지를 다 잘하려고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서 살아왔어요.”
문단 안팎에선 그를 두고 ‘성공한 인생’이라 말한다. 혼은 늘 떠도는 길에 있었으나 때가 되면 돌아왔고, 남루할지라도 그 몸을 골고루 나눠 먹이고 싶은 가족도 있다. 함께 늙어가고 함께 죽어갈 약속티켓을 쥐고 있는 그만의 ‘여자친구’도 있다.
“어차피 행복이란 게 착각 아닌가요. 놀라운 생산성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착각. 난 행복은 세상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과 행복의 오르가슴은 자기 착각으로부터 오는 거 맞죠? 자기가 원하고 그리워하는 거, 바로 촐라체. 촐라체를 품지 않는 한 행복의 착각은 단지 착각을 품는 것뿐이죠. 하지만, 뭐 불행하냐고 물으면 그렇지도 않아요.”

(오른쪽) 그동안 60권 이상의 책을 낸 작가 박범신 씨. 그의 새 소설 <촐라체>는 2월 말 출간 예정이다. 인터넷 소설은 blog.naver.com/wacho에서 만날 수 있다.

“훌륭한 아내를 두신 건 그게 설령 착각이라도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그렇죠. 여자친구는 느릿느릿 뜨거워지고 나는 빨리빨리 뜨거워지는 사람인데, 여자친구는 여자친구 속도로, 나는 내 속도로 살아왔어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왔다는 건 착각이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거지. 내가 빠르니까 여자친구는 주로 내 뒷모습을 봤을 거고.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 뒷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네. 평생 나보다 느린 속도로 내 뒤를 따라온 여자친구는 내 결핍감의 정체를 잘 알고 있을 거에요. ‘같은 속도로 걸어야 사랑’이라고 강요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과 살았으니 난 행운이죠. 여자친구가 그러대. 인간에겐 평생 동안 공평하게 복이 분배되는데 문제는 자기 복을 복인 줄 알아보고 성실히 챙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차이가 난다고. 아내는 그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고, 그 자부심이 근거 있다고 나도 느껴요. 하지만 그 말 했다가 아내가 우쭐거릴까 봐 그 말만은 삼가고 있잖아.”

“남은 생에서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사하라 사막을 지나다 가난한 베르베르족 양치기 노인과 소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둘은 맨발이고, 때는 황혼이고, 찬 모래 바람이 불었죠. 스무 마리쯤 양을 몰고 구멍이 숭숭 뚫린 천막집으로 돌아가던 노인에게 나도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안락한 잠자리, 황금색 가구 따위를 분별없이 떠올리면서. 그 노인의 답은 ‘오늘 저녁 조금이라도 비가 내려, 풀이 잘 자라서 내 양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길 바랄 뿐이죠.’ 내 답이에요.”
이야기는 끝이 났고, 길은 석양을 짊어지고 있었다. 허파에 히말라야의 새벽 바람이 잔뜩 침입한 표정으로 작별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또 다른 떠남을 떠올린 건 기우일까? 그는 몇 마디 형용사로 정의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었다. 작품성, 품성, 철학을 다 차치하고라도. 한나절을 함께 있어도 내가 본 건 그 얼굴을 대신한 뒷모습일 뿐이다. 백 일을 함께 지낸다고 해도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지도 위를 제대로 잘 걷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헤아리게 하는 그 뒷모습만 겨울 햇살 속에 남았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