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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금호건설 사장 이서형, 염요숙 씨 부부의 2막 인생 꾸준한 남자와 멀티플레이어 여자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살면 닮은 점은 너무나 비슷하고 다른 점은 지독히 판이하게 드러난단다. 전 금호건설 사장 이서형 씨와 부인 염요숙 씨도 그렇다. 이서형 씨는 꾸준함과 집중력으로 한 가지에 몰두하는 남자, 염요숙 씨는 늘 새로운 것을 기웃거리며 멀티플레이를 하는 여자다. 그렇다면 이 부부의 공통점은? 자녀를 출가시키고 은퇴를 한 뒤 새로운 2막 인생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서형 염요숙 씨 부부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전원 주택에 살고 있다. 최근 반지하에 이서형씨의 아담한 작업실이 생겼다. 그는 “결혼하고 처음 갖는 개인 공간”이라며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반지하 작업실족 vs. 여기저기 노매드족

어느 60대 부부의 일과를 들춰보자. 남편 이서형 씨는 새벽 5시(여름에는 4시 30분) 무렵 일어나 단전호흡을 하러 다녀온다. 집에 돌아오면 7시 정도. 직접 아침 식사를 가볍게 차려 먹고 산보하러 나간다. 용인의 전원주택에 사는 이들에게는 뒷산이 고마운 존재다. 그가 키우는 진돗개인 호돌이와 호순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즈음 반지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작업실로 들어간다. “결혼한 뒤 최초로, 36년 만에 나의 공간이 생겼지요.” 여기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업실 대신 용인대학교 미대 실습실에 붙박여 있었다. 요즘은 작업실에 땅거미가 깔릴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작품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책을 읽는다. 친구나 옛 회사의 선후배, 친지 등을 만나러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서울에 다녀오곤 한다. 이 일과표는 매일 예외 없이 지킨다.

염요숙 씨의 하루 시간표는 그때그때 다르다. 보통 밤 10~11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2~3시에 기상한다. 통트기 전인 새벽 5~6시까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 아침 8시쯤 일어난다. 대학 입시 때부터 벼락치기 공부를 하느라 생긴 습관 덕분이다. 아침부터 그는 부산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서울 국립중앙박물원에서 다도를 배우고, 절친한 사람들과 판소리 레슨을 받고, 얼마 전부터는 한국무용도 익히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친구들과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10여 년 전 등단한 에세이 작가이기도 한 그는 짬짬이 일상에서 길어 올린 맑은 수필을 쓰기도 한다. “내키는 대로, 물 흐르듯 여기저기 다녀요.”

삶의 변화에 훌쩍 몸을 맡기다 9년 전 자녀가 모두 독립한 뒤 이서형·염요숙 씨 부부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용인의 전원주택 단지로 이사 왔다. “함께 살던 자녀를 내보내고 나면 부부의 삶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저는 우선 잡다한 집안일이 줄어 가뿐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고요. 그런데 남편은 허전해하며 자꾸 아이들을 불러들이고 싶어 하더군요.” 변화는 변화를 부른다. 이때부터 서서히 부부의 2막 인생이 태동할 조짐을 보였다. 그 조짐은 아내 염요숙 씨에게 먼저 나타났다. 복잡한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자기 안에 집중할 기회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싶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탐색과 열중의 연속이었다.

이서형 씨의 2막은 금호건설 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백수’가 된 지 6개월 만에 용인대학교 회화학과에 편입했고, 이어서 같은 대학교 예술대학원까지 풀코스로 달렸다. 화가의 길을 선언한 것이다. 학교와 작업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은퇴 직후 회사 사람들과 동창을 비롯한 지인들과 과감하게 담을 쌓았다. “대기업 사장직에서 은퇴했으니, 와서 일을 도와달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지요. 작업에 집중하려면 이런 요청에 일일이 응할 수 없어서 아예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습니다.”

2막에도 역경은 있다
은퇴 이후 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남는 시간에 취미로 공부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이서형 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20대 청년들과 한교실에서 공부할 생각을 해보세요. 게다가 미술을 좋아하기만 했지, 일자무식인 백지 상태였지요. 예순 살 넘어 참으로 오랜만에 맨땅에 헤딩을 시도한 셈이었습니다.”
한번 무언가에 몰두하면 반드시 승부를 내고야 마는 남편의 성향을 잘 아는 아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염요숙 씨의 수필 ‘꽃 몸살’을 보면 남편의 만학에 대한 심정이 그려져 있다. “퇴직 후 이순이 다 된 나이에 미대에 편입하겠다는 그를 나는 처음에 반대했다. 우선은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체력이 문제일 것 같았고 흰머리의 그를 기피할 게 뻔한 학생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점은 그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난처함이 눈에 보이듯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년에 젖은 낙엽이 되어 아내의 치마꼬리를 붙들어 난감하게 하는 남편은 되지 않을 거라는 얄팍한 속셈도 작용해서 필사적인 반대만을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첫 수업에 이서형 씨가 교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나이 지긋한 주임 교수가 들어온 줄 알고 인사를 꾸벅 하더란다.

“어린 시절 동경했다는 이유로 덤벼든 그림 공부가 녹록하지 않았지요. 고백컨대 처음엔 붓 쓰는 방법도, 재료 섞는 법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찌나 꺼려지던지요. 교실에선 언제나 모범을 보여야 할 것만 같았고요. 회사의 우두머리라는 제 예전 위치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서형 씨는 힘을 빼고 학생의 자세부터 갖추기로 했다. <현대 미술 용어 사전>을 구입해 기초부터 독학하고, 전공 실기 수업에 다른 학생들보다 두 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젊은 학생들보다 손은 느리지, 해야 할 분량은 많았기에 그는 연휴나 휴일에도 학교에 나갔다. 명절 때는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들고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이서형 씨는 작년 11월 28일 금호아트홀에서 성공적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음과 양, 정과 동, 변화와 통일성의 팽팽한 공존을 주제로 삼았다. 폭풍전야의 고요, 피어나기 직전 꽃눈 등으로 형상화되었다. 전통 사상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가령 하늘에서 내려다본 나무나 보색의 과감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옛 직장 동료들이 깜짝 놀랐단다. 감색 양복만 입던 직장인이 화려한 원색으로 캔버스를 도배할 줄이야.

1 이서형 씨 집의 모든 방에는 커다란 창이 달렸다. 창밖으로는 용인의 주산인 성산이 있다.
2 메밀차와 함께 낸 다과상.
3 젊었을 때의 이서형·염요숙 씨 부부.
4 염요숙 씨가 몇 년 전부터 공들여 다도를 배우고 있다. 집에 오는 손님들과 차를 나누는 재미로 다도를 공부한다고.
5 거실과 방 곳곳에는 가족 사진이 유난히 많다. 사진 사이에서 이서형 씨가 그린 자화상을 발견했다.
6 얼마 전까지 자녀의 초등학교 교과서도 버리지 못했을 만큼 온갖 책과 흔적을 사랑한다는 염요숙 씨.
7 이서형 씨와 매일 뒷산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백구 호돌이.


인생은 길어졌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다
요즘은 외조와 내조가 함께 이루어진다. 이서형 씨가 개인전을 준비할 때는 전시회에 온전히 투자하느라 아내의 내조가 절실했다. 염요숙 씨가 자주 집을 비울 때는 남편이 요리하고 집을 치운다. 이렇게 된 것은 사실 아내의 공이 컸다. “남편은 얼마나 꾸준한 양반이던지, 퇴직하고도 칼같이 5시에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항변했지요. ‘몇십 년 동안 당신을 회사에 보내며 내조하느라 힘들었으니, 이제 나도 방학 좀 즐겨보자’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홀로서기를 훈련시켰습니다.” 그 결과 부엌에 들어가지도 않던 남편이 커피를 끓이고 국수 삶는 것 정도는 하게 되었다. 요즘은 손님이 오면 직접 요리를 대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주특기 메뉴는 ‘올리브유 버섯 굴 볶음’과 ‘동파육’ ‘토마토 두부 볶음’ 등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외조와 내조를 하는 사이지만, 이 부부도 때때로 다툰다. 그런데 이들은 부부싸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부가 왜 싸우는 줄 아세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실컷 표현해서 그래요. 사실 이제는 한마디만 해도 서로 백수(백 가지 수)를 다 보기 때문에 엄청난 전쟁으로 번질 일도 없지만요. 싸움을 포기한 부부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서로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살거나, 깨달음에 이른 성인이거나. 그러니까 사랑하는 부부들은 싸울 때 싸워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무얼 원하는 줄 알지요. 대신 싸운 뒤 지나친 점에 대해 곧바로 사과해야지요.”

2막을 살아가는 방식이 판이한 이 부부가 한입으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길어졌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습니다.” 염요숙 씨는 “지금껏 그랬듯이 유쾌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서형 씨도 계획이 있다. “그림에 어렵게 입문했으니 계속 해나갈 겁니다. 미국에서 개인전을 열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고, 가능하다면 해외 입주 작가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고 싶습니다.”

멋지게, 성공적으로 2막을 열려면?
CEO에서 화가로 변신한 이서형 씨의 조언

“누구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아이를 키우면서 하고 싶고,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바로 여기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해보세요. 가령 역사를 전공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세계사에 깊이 몰두해보세요. 뻔한 말이지만 목표를 정하면 동기를 강하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은퇴 직후, 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하세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일단 친구들이랑 골프 좀 치다가, 그냥 좀 놀다가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이 습관이 은퇴 이후의 삶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드디어 정말 소중한 내 시간이 생겼음을 잊지 말아야지요.”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