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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씨의 뮤직 라이프 시간 여행자들의 여행 가방엔 무엇이 들었나
회상과 서정의 무드로 가득한 그의 피아노 연주처럼 그가 사는 집에도 오래 묵은 시간이 쌓여 있다. 어릴 적뺀 사랑니, 친구 녀석이 준 도토리 하나까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그에게 시간이란 어쩌면 좀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되돌아보기 위한 현재의 시간, 그 시간의 중심엔 늘 음악이라는 친구가 자리한다. 그를 ‘시간 여행자’라 부르고 싶다.


가라앉은 공기가 하늘 저편으로 검게 이랑을 내더니, 어젯밤 흰 눈이 펄펄 내리고 말았네요. ‘저 흰 눈이 쌀밥이었으면’ 하는 허기진 사람들 어깨에도, 달빛 속에 몸을 포갠 연인들의 어깨에도, 떠나보낸 잎사귀를 그리워하는 겨울나무의 어깨에도 축복처럼 흰 눈이 내렸습니다. 묘하게도 흰 눈이 내리면 세상의 시간이 잠시 차원 이동을 하는 것 같아요. 오드리 니페네거라는 작가가 쓴 <시간 여행자의 아내>란 책엔 ‘시간 여행 유전자time-traveling gene’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 여행 증후군에 걸린 주인공들은 차원을 마구 이동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뒤죽박죽으로 살게 된답니다. 그들에게 하루는 단 5분이 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될 수도 있다는군요. 참 슬픈 일은, 헨리가 옷가지를 남기고 갑작스레 과거로 5분 동안 사라지면 클레어는 그 옷가지를 품고 10년이라는 긴 기다림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흰 눈이 세상 어딘가에 잠복해 있던 시간 여행 유전자를 깨웠던 것 같습니다. 흰 눈에 덮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차원 이동을 해버린 듯한 1월의 아침,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씨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작년에 그가 낸 음반 제목이 공교롭게도 ‘time travel’이군요.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16층 창가에선 비스듬히 활공하는 눈의 놀이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창문 앞에서 그가 프라모델 탱크를 조립하느라 객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하네요. 피아니스트와 흰 눈과 프라모델을 둘러싼 시간이 고요히 흐르고 있습니다.


1 석촌호수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그의 집 창가. 혼자 사는 집 안엔 가구도 몇 개 없이 신디사이저와 피아노가 공간을 점령해버렸다. 요즘엔 음악을 쉬고 있다며 근심하던 그가 어느새 신디사이저 앞에 앉았다.
2 한국에서, 아니 세상에서 이런 피아노는 다시 못 구할 거라고 자랑하는 피아노 ‘멜로디그랑’.
3 그가 유학 시절 어렵게 구한 무수한 LP판.
4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상시키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귀한 음반.
5 ’가장 한국적인 재즈 뮤지션’이라는 평을 받는, 연주자로는 드물게 다수의 마니아를 거느린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씨.

김광민. 1960년 서울생, 버클리 음대와 NEC를 졸업한 학문적 성골, 연주 음악으로는 드물게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13년 동안 <수요예술무대>의 진행을 맡았던 말주변 없는 인기 MC, 한때 음대학장을 지내기도 한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 그리고 ‘재즈의 선율을 그만의 클래시컬한 연주로 만들어내는 가장 한국적인 재즈 뮤지션’이라는 평을 받는 피아니스트. “우리 엄마가 피아노 선생님이었어요. 당신이 직접은 못 가르치겠던지 네 살 때쯤 다른 피아노 선생님에게 데리고 가셨어요. 제법 잘 쳤나 봐요. 선생님이 날 거둔 거 보면. 초등학교 때 만날 골골해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얘 몸이 너무 약하니 피아노 같은 건 모두 그만두라’고 하데요. 그래서 피아노 관둬버렸어요.” 피아노 교습은 중단됐지만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심심풀이로 곡을 쓰고(그의 3집 앨범의 ‘회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작곡한 곡이다), 고등학교 때 밴드도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 음악대학엘 가려고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그는 무역학도가 됐다지요. 대학 시절에 ‘시나브로’라는 3인조 록 그룹으로 대학가요제 동상을 거머쥐었고 김민기, 양희은, 조동진 등의 세션 맨으로 활약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어요. 그리고 얼마 안 있다, 박정희 대통령 때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까지 받던 전국적인 수재, NASA에서 일하던 큰형이 병으로 죽었지요. 내가 비틀스를 좋아하게 된 건 다 큰형 때문이었는데.

난 외로웠어요. 추억밖에 없었어요.” 그는 음악에의 몰두를 결심하고 미국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그래요, 밤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죠. 진심과 자신감은 고초의 시간만큼 충전되는 법이죠. 그 후 동화나라에서 온 소포 같은 피아노 음반 다섯 장 <지구에서 온 편지> <달 그림자> <보내지 못한 편지> <혼자 걷는 길> <시간 여행>. 그의 음악을 두고 음악 평론가들은 “비 오는 밤이나 동이 터오는 새벽에 들으면 더 좋은 음악,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비감의 멜로디, 저절로 눈을 감기게 하는 터치”라고 입을 모읍니다. 우울이 낙진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이 시대, 그의 슬픈 음악은 가난한 마음을 덮어주는 거즈 같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브람스의 자장가 ‘브람스 룰라비’를 부르며 재워주면 나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엄마가 ‘우리 광민이 또 우는구나’ 하며 불러줬었는데…. 음악은 그 사람이니까요. 자기를 통해서 나오는 거니까요. 어릴 때부터도 슬픈 음악이 좋더라구요.” 그런가 하면 그는 ‘한국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라고 불리는 ‘동서남북’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대학로의 ‘바스키아’ 같은 클럽에서 마음 맞는 친구, 후배들과 잼 콘서트를 즐기는 게 일상의 큰 기쁨이라는군요.

전화벨이 울리고, 몸을 활처럼 휜 채 그가 수화기를 집어 듭니다. 우린 잠시 집 안 여기저기로 한눈을 팔 수 있게 됐습니다. 액자 하나 걸리지 않은 빈 벽, 노총각 혼자 사는 집에 어울리는 가죽 소파와 테이블 하나, 네 개의 방 중 세 개를 채운 신디사이저와 피아노, 오디오 시스템, 원래 명성황후가 쓰던 것이었다는데 사실 확인은 안 된다는 어머니의 자개장, 와인 병이 뒹구는 식탁,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도대체 몇 장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LP판. “LP판은 유학 때 매일 중고 판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른 귀한 것들이에요. 7년 만에 한 장 구한 것도 있어요. 포장도 안 뜯고 보기만 하는 것도 있고요. 왜, 돈 버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그 돈 못 쓰잖아. 그거랑 같지. 똑같은 음반을 몇 장씩 산 것도 있어요. 하나는 보관용, 하나는 감상용 이렇게. 좋은 앨범 사면 얼굴이 벌개지고 좋아서 가슴이 막 뛰고 그랬어요. 한국에서 음반 많이 못 산 거에 한이 맺혔는데, 한 푼 거지.”

그 좋아하는 LP판 위에도, 신디사이저와 피아노 위, 진공관 위, 앰프 위에도 프라모델이 올라앉아 있습니다. “중학교 때 나 이걸로 상도 타고 그랬어요. 그때 이거 같이 만들던 친구들은 요즘도 만나요. 한동안 안 하다가 작년에 교수 안식년이었는데 심심해서 다시 시작했어요. 하다 보면 밤새우고 그런다니까. 이젠 눈 침침해져서 돋보기 기계도 샀잖아. 이거 한번 볼래요? 칠 기똥차게 했지? 눈동자도 까~맣게 칠하고, 견장도 빨~갛게 칠하고. 와, 너무 잘하지 않았어요? 음, 잘했어. 경주용 자동차 빨리 다 만들어야 하는데…. 어이구, 이거 옛날에 일등한 거라니까. 얘 들고 있던 망원경은 또 어디 갔어? 얜 총이 없잖아. 차라리 얘로 할까?” ‘비감의 멜로디’가 갑자기 ‘머리맡에 장난감 두고 잠든 소년의 순수’로 자리바꿈하는 순간입니다. 그가 또 다른 프라모델을 보여주기 위해 쿠키 상자쯤으로 보이는 녹슨 깡통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소년 김광민의 시간’이 우르르 쏟아집니다. 중학교 배지, 뺄 때 너무 아파서 계속 갖고 있다는 사랑니, 고등학교 때 친구 녀석이 준 도토리, 일등상 탔다는 프라모델 전차와 비행기… 그야말로 시간 여행자의 여행 가방이로군요. “난 버리는 거 싫어해요. 엄마가 사준 소니 카세트 라디오도 아직도 쓰는걸. 뭐, 그렇다는 거죠.” 정기적으로 와인 공부도 하는 와인 동호회 멤버이기도 한 그는 부르고뉴 와인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되는 와인을 더 즐깁니다. 시간 여행자에게 딱 어울리는 술이군요.


1 친구가 선물했다는 약 상자 앞 뚜껑에도 CD가 끼워져 있다.
2 중학교 때 몰두했던 프라모델에 얼마 전부터 다시 빠져버렸다. 이제는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 않는다며 돋보기까지 달린 작업대도 마련했다. 몰두의 시간.
3 친구가 “광민아, 차 마셔봐. 진짜 죽여”라고 꼬드겨 시작했다는 다도. 그는 세작처럼 맛이 센 차보다는 어린잎 녹차인 우전을 더 좋아한다. 
4 노총각 혼자 사는 집에 잘 어울리는 가죽 소파와 심심한 테이블이 놓인 거실.
5 와인 동호회 모임에 나가 와인 공부까지 한다는 그는 시간이 무르익어야 제 맛을 내는 부르고뉴 와인을 특히 즐긴다. 그가 자신의 소장품 중 최고로 꼽은 와인들이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네, 교수님”으로 시작한 그의 입에서 ‘이사’ ‘전세’ ‘강북’ ‘너무 비싸’ 같은 어휘가 들려옵니다. 노곤해지던 내 몸과 머리가 화들짝 놀랍니다. 그렇지, 그도 엥겔계수 따위를 셈해야 하는 생활인이지요. “요즘 이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이 집도 뭐 별로 나쁘진 않은데 맘껏 피아노를 칠 수가 없어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요. 단독주택에 가면 밤중에 피아노 쳐도 경비실에서 득달같이 전화 안 올 거구. 결혼하면 평생 살 집 꾸미고 잘 살 텐데. 집이 조그마해도 2층에 작업실 만들고, 정원도 만들고 그러고 싶어요. 근데 나 결혼하면 잘 살 텐데, 내가 감상적이고 피아노만 붙들고 지낼 것 같은가 봐. 나 된장찌개, 꼬리곰탕 요리, 봉골레 스파게티, 스테이크 같은 거 정말 자신 있어요. 얼마 전엔 나물 무침도 도전해봤는걸.” 그의 목소리가 따뜻한 온수처럼 집 안의 낮은 곳을 흘러 다닙니다.

“와인에, 프라모델에, LP판 수집에, 요리에, 게다가 다도 좋아하는 거에,사람들이 날 완전히 한량으로 보겠는걸요. 그래도 내 진짜 취미는 음악이죠. 예전에 MBC에서 <수요예술무대> 진행할 때 조수미 씨가 나와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불렀어요. 난 그때 리허설 중이라 객석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아, 모든 거 다 뿌리치고 저 여자 쫓아다니면서 평생 노래만 들어도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직도 공연 전이나 앨범 나올 때면 ‘내가 음악에 소질이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냥 너무 좋으니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연주를 안 하면 못살겠어요. 행복은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만있어도 찾아오기도 하는 거잖아요. 행운처럼. 내게 음악이 바로 그런 거죠.” 과연 음악엔 매혹 이상의 무엇이 있는 걸까요? 그가 음악을 통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걸 이해하려면 그의 음악 앞에 진정한 청중이 되어야겠지요.

이야기가 끝났고, 저녁이 됐습니다. 어두운 거리 어딘가에서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의 5집 음반 <시간 여행> 중 'time in a bottle'이 MP3 안에서 가로등처럼 깜박이고 있습니다. 정말 그걸로 족하다고, 오늘 하루의 시간 여행은 흡족했다고 되뇌고 싶어집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 시간이 무르익은 부르고뉴 와인, 다도, 만들기로 일등상도 탔다는 프라모델, 중학교 때 엄마가 사주신 소니 카세트 라디오, 엄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물건들, 세상의 좋은 오디오 시스템들, LP판, 그리고 그의 취미이자 세상 모든 것인 음악.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기억과 회상, 서정, 온기’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1 주방에는 와인의 보물 창고인 와인 셀러와 고지서들, 찻잔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질러져 있다.
2 아프게 뺀 기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사랑니, 친구가 준 도토리, 중학교 때 만든 프라모델처럼 시간 여행을 하게 만드는 물건들이 이 깡통에 들어 있다. 
3 어머니가 쓰시던 이 자개장은 명성황후의 것이었다는데 미확인 사실이라고.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