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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미, 분자요리 냄비와 실험실
요리는 기본적으로 실험이며 물리며 화학이다. 그 과학의 총체 중에서도 노골적으로 ‘요리는 과학입니다’를 외치고 나선 분자 요리. 물과 불과 재료가 벌이는 미스터리한 현장에 미식가들이 주목하고 있다. 분자 요리가 만들어지는 비밀스러운 백스테이지, ‘수민화’의 주방을 들여다봤다.

(왼쪽)  화학 실험실과 주방이 만나 벌이는 ‘신개념 음식 궁합’의 뉴 월드가 분자 요리다. 재료를 가장 차가운 온도로 얼리기 위해 동원된 영하 196℃짜리 염화질소의 서늘한 향연.
(오른쪽) 접시의 구멍 사이로 로즈메리를 태운 연기가 구름과자처럼 솟아나오는 ‘소금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다. 밑이 오목한 투명 볼 안에 말린 로즈메리를 집어넣는다. 그 볼 위에 랩을 팽팽하게 씌우고 지저분한 랩의 가장자리를 인두로 녹여 떼어내는 중이다.

“오래된 떡갈나무 숲 냄새가 나지 않나요?” 비트로 색을 낸 사과즙과 설탕을 프라이팬에 졸이던 요리사가 눈을 찡긋거린다. 빗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사과시럽에선 정말로 떡갈나무 숲 향기가 난다. 햇볕의 양기를 빨아들여 제 몸 안에 간직한 떡갈나무의 향기. 온도계가 정확히 160℃를 가리키자 요리사는 재빨리 가스불에서 프라이팬을 내려놓는다. ‘날 보러 와요’라는 표정으로 매트 위에 드러누운 사과시럽, 수술용 장갑을 끼고 뜨거운 사과시럽을 마하 7의 속도로 치대는 요리사, 영하 196℃의 액화질소가 내뿜는 매운 연기…. 이곳은 전쟁터다. ‘분자 요리’라는 미스터리가 펼쳐지는 신비한 전쟁터.

스쿠터를 타고 장을 보던 제이미 올리버, 검투사처럼 요리 배틀을 벌이는 ‘아이언 셰프’의 천재들…은 이제 호사가들에게 고전이다. 명실공히 지금은 ‘분자 요리’의 시대다.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잡지 <레스토랑>에서 매년 요리사, 식당주, 기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발표하는 순위) 베스트 3에 늘 꼽히는 ‘엘 불리’도, ‘더 팻 덕’도, ‘피에르 가니에르’도 이 분자 요리법을 택하고 있다. 미식가들은 성전을 치르는 자세로 분자 요리 레스토랑의 예약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중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기사를 쓰던 날 인터넷 검색 엔진은 톱 배우와 가수 출신 탤런트의 데이트 장소인 ‘수민화’와 ‘분자 요리’를 검색 순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왼쪽) 볼을 씌운 랩 윗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소나무 연기를 뿜어 넣으면 볼 안쪽과 랩 사이에 연기가 모아진다. 구멍은 잠시 스푼을 올려 막아놓는다.
(오른쪽) 담백한 소금 맛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스푼으로 그릇을 통통 치면 아래에 갇혀 있던 소나무 연기가 구름과자처럼 피어오른다. 소나무 향과 소금 아이스크림의 새로운 궁합이다.

분자 요리는 분자의 움직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분자미식학’에서 출발한다. 재료의 분자 구조, 조리 과정을 분석해 최고의 맛을 끌어내는 것이 분자미식학이다. ‘푸아그라는 왜 도살 직후 가장 맛있을까’ ‘계란 노른자가 한가운데에 오게 삶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처럼 요리를 둘러싼 궁금증이 분자미식학으로 풀린다. 분자미식학자들은 화학 실험 도구를 이용해 체 없이 육수를 거르고, 음식물에 갖다 대면 온도·염도·점도를 말해주는 ‘똑똑한 숟가락’도 만들어낸다. 실험실에서 밝혀낸 요리의 과학으로 레스토랑의 메뉴 개발을 돕는다. 올해 초 한국을 찾아 더 친숙해진 ‘요리계의 마티스’ 피에르 가니에르는 이 학문을 연구해 ‘밀가루를 넣지 않은 케이크’라는 초히트 메뉴를 만들었다. 더 팻 덕에선 정어리 향 셔벗을, 엘 불리에선 홍차 거품 소스의 조개 요리를 내놓았다. ‘냄비’와 ‘시험관’이 만나자 요리 신세계가 열린 것.

“롯폰기의 ‘류긴’이라는 식당에서 사과 모양이긴 한데 사과는 아닌 음식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그때 처음 분자 요리라는 걸 알게 됐어요. 런던의 ‘더 팻 덕’에서 마신 차도 경이로웠어요. 가운데가 나뉜 잔도 아닌데 오른쪽엔 뜨거운 액체가, 왼쪽엔 차가운 액체가 담겨 있는 거예요. 두 가지 온도의 차를 한 잔으로 마시는 경이로움!” 그는 그길로 야마모토 세이치의 제자로 들어가 분자 요리를 배웠다. 달뜨게 말하던 신동민 셰프가 갑자기 고무로 된 펌프를 꺼내 온다. 빠르게 치대놓은 사과시럽은 그새 엿처럼 꾸덕꾸덕 굳은 채 금빛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걸 한 움큼 떼어내 펌프로 그 안에 공기를 집어넣는다. 입으로 후후 불자 사과시럽이 사과 모양으로 제 몸을 부풀린다.


1 사과시럽과 질소, 그리고 액화질소가 벌이는 온도의 전쟁이 끝나면 이 신비한 얼음사과가 탄생한다.
2 사과즙과 설탕을 섞은 사과소스를 졸이는 중이다. 정확히 160℃로 끓어오르면 재빨리 불을 끈다. 아직 더 끓어야 한다.
3 졸인 사과시럽을 내열 매트에 옮기고, 굳기 전에 빠른 속도로 반죽하듯 치댄다. 사과시럽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면 점점 금빛으로 변하면서 엿처럼 탄력이 생기게 된다.
4, 5 꾸덕꾸덕 굳으면 손톱 크기로 잘라 동그랗게 빚은 다음 펌프로 공기를 조금씩 넣어가면서, 입으로 불어가며 살살 돌려 사과 모양을 만든다.
6 사과 모양 틀에 들어갈 가루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과정. 사과 베이스에 질소를 넣어 더 가벼운 식감을 낸 사과소스를 -196℃의 액화질소에 담근다. 순식간에 급랭한 사과소스를 분쇄기에 갈면 가루 아이스크림이 된다.

염화질소(영하 196℃의!) 통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신동민 셰프가 수험생처럼 바짝 긴장해 있다. 사과소스(사과 베이스에 질소를 넣어 더 가벼운 식감을 낸)를 염화질소에 넣어 얼릴 참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터미네이터 II>의 T-1000처럼 손가락이 조각조각 깨질지도 몰라요.” 둘이 한그릇에서 몸을 섞자 염화질소 방울이 수류탄처럼 터지고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드러나는 영하 196℃의 사과소스! 그걸 분쇄기에서 드르륵 갈아, 사과 모양 틀에 쏟아 넣고, 접시 위에 앉힌다. 그는 상감마마의 비평을 기다리는 장금이 표정을 짓는다. “긴장되나요?” “그럼요. 미식가의 혀는 날카로우니까요.” 완성된 ‘얼음 사과’를 스푼으로 툭 치자 홀연히 피는 안개 무리. 혀 위에 한 스푼 올려놓자 냉기가 탄산처럼 터지면서 입 안의 잡냄새를 물리친다. 그다음엔 달큼하면서 간드러진 맛이 혀를 누른다. 코로는 연기가 슬금슬금 새어 나온다. 시원하고 치즈의 풍미도 비치는 휘발성의 맛! “저돌적이라 할까요. 무슨 맛이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네요.” “저도 처음 이 요리를 먹었을 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냥 차가운 맛하곤 다르잖아요. 냉동고에 넣어도 녹기 때문에 액화질소 안에 보관해요.”


1 망고와 코코넛 푸딩을 비밀의 용액에 담아 돌돌 돌리면 망고와 코코넛 사이에 엷은 막이 만들어진다. 계란 흰자와 노른자 사이의 막처럼. 영락없는 계란 모양이지만 그 정체는 상큼한 과일 푸딩이다. 용액의 비밀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2 일본식 스테이크인 다다키에 곁들여지는 가니시. 숯덩이처럼 보이는 건 오징어 먹물을 입힌 고구마요, 코르크 마개처럼 보이는 건 불도장 찍은 우엉이요, 거품은 콩으로 만든 거품 소스다. 분자 요리는 식욕뿐만 아니라 호기심까지 부채질한다. 이런 접시 앞에서 뻔한 고정관념은 내려놓길.
3 환상의 마블링이 잠자던 침샘을 마구 깨우는 와규. 그 와규를 정확한 온도(이것도 비밀)로 달군 참숯 위에 올려 정확한 시간 내에 구워내면 혀 위에서 미끄러지듯 녹아내리는 다다키가 완성된다.

야채들이 덤블링하는 프라이팬 옆에 그가 미리 준비해놓은 다다키(일본식 스테이크) 접시가 놓여 있다. 그런데 오묘하다. 고기 옆엔 코르크 마개와 숯 조각이 놓여 있다. 그 옆엔 맥주 거품 같은 게 뿌려져 있다. 곰곰히 살피니 마개는 우엉이요, 숯은 고구마다. 거품은 콩에 산을 섞어 부풀린 소스인데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거품이란다. “찐 고구마에 오징어 먹물을 입히고 숯 향을 내려고 숯에 구웠어요. 우엉으로 만든 코르크 마개엔 ‘chateau shuminghwa’라는 불도장을 찍었어요. 접시 위에 있는 건 모두 먹는 거라고 보면 돼요.” 거품 소스를 찍어 한입 베어 물자, 입 안으로 ‘육것’의 향이 맴돈다. 우육의 뜨거운 열기와 거품의 차가운 포옹. 상상 불허의 세계가 계속 펼쳐진다. 시금치 맛만 제거하고 영양분과 색소는 그대로 남겨서 계란에 넣은 초록색 계란말이, 망고와 코코넛 푸딩을 비밀의 용액(알려주지 않았다. 분자 요리의 정수인 과학이 이 용액에 들어 있단다)에 넣었다가 떠내면 만들어지는 온천 계란(영락없이 반숙 계란으로 보인다), 접시에 뚫린 구멍으로 로즈메리 태운 향이 솟아나오는 소금 아이스크림, 솜사탕으로 만든 물수건…. “분자 요리는 눈이나 호사시키려는 쇼가 아닙니다. 초 단위까지 세고 고기에 소금 하나를 뿌리더라도 염도의 퍼센트까지 계산합니다. 누가 언제 주문하든 항상 완벽한 음식이 나오는 일정한 맛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죠. 맛의 일관성은 좋은 식당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엘 불리의 예약이 2년씩 꽉 차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

사람들이 분자 요리에 열중하는 건 이 요리가 ‘환상’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다 큰 어른들이 해리 포터에 빠지는 것처럼, 성배를 좇아 프리메이슨 기사단에 가입하는 뉴요커가 늘어나는 것처럼. 이 마법의 문을 열면 미처 본 적 없는 신세계가 펼쳐진다. 화학 실험실과 주방이 만나 벌이는 ‘신개념 음식 궁합’의 뉴 월드! 하지만 요리사들에게 이건 서바이벌 게임이다. 사람들은 이제 요리의 피카소, 시인을 넘어 요리의 연금술사, 요리의 과학자를 바라므로. “그러나 분자 요리는 수단일 뿐이죠. 엄마가 사랑하는 아기를 위해 만든 음식이 가장 좋은 음식이죠.” 피에르 가니에르가 기자회견에서 남긴 말이다. 사랑만큼 강력한 촉진제가 또 있을까. 요리는 역시 사랑의 화학 반응, 과학의 힘이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