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이 차를 마시는 이유가 단지 차에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차는 우유와 견주어도 달고 고소한 맛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물보다는 향긋하지만 커피 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차는 그렇게 달지도 쓰지도 않다. 차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차에는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한 방이 없다. “차를 왜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콕 집어 명쾌하게 답할 수 없다. 그렇다고 ‘여백’을 운운할 수는 없다. 여백이야말로 차의 속성을 찌르는 말인데도 도사로 보일까 두려워서다. 하지만 차는 여백으로 가득 차 있다. 여백이 차의 미덕이다. 그리고 그 여백을 채우고 비우는 것이 차를 마시는 일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무늬를 그리고 또 지운다. 형식을 마련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일본의 다도는 그렇게 탄생했다. 일본에서 차는 다도로 형식을 마련했고, 그것의 정신은 미학으로까지 확장되어 일본의 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일본의 미의식은 다도의 영향권 아래 있다. 쓸쓸한 정조, 일본의 다인들이 찾아낸 차의 속성, 여백으로서 차의 신비, 지금으로선 일본이 차를 가장 잘 이해하고 차를 받들고 그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일본도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차를 오해했고, 과시의 도구로 사용했다. 투차鬪茶(차의 맛과 향기를 겨루는 대회)가 성행하면서 중국에서 건너온 비싸고 화려한 차 도구를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서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가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엔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더 화사하고 더 화려한 찻자리가 인기였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찻자리는 어설펐고, 서양의 찻자리를 흉내 내는 데 급급했다. 전통에 충실하다는 찻자리도 자연스럽기보다는 경직된 분위기였다. 우리는 차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 서양식이건 동양식이건 흉내와 재현에만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찻자리가 달라지고 있다. 나는 그 변화를 매일 목격한다. 어떻게? 만나는 손님과 하는 대화에서도 그렇고, 손님이 고르는 차와 찻잔에서도 그렇다. 갈수록 ‘브랜드’에 의지해 찻잔을 고르는 손님보다 특정 작가를 찾는 손님이 늘고 있다. 무명의 기물이라도 본인의 미감에 맞다면 고르는 데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차도 앞서 말했듯, 어디에 좋으냐는 건강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향미의 관점에서, 나아가 하나의 가치로서, 자신이 소망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하나의 매체로서 찾는다. SNS에 올라오는 찻자리 풍경들 또한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찻자리는 획일적인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경직된 것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개인의 개성과 미의식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화려할지라도 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자족적인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마침내 차를 발견했다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 사회의 담론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지면서 차는 필연적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는 매체였다고. 차를 마시지 않던 사람이 느닷없이 차를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차는 늘 거기에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다시 차를 마시고 있다. 차를 마시며 자신과 더 자주 만나고 있다.
글을 쓴 김인은 차와 차 도구를 판매하는 연희동 사루비아다방 의 대표. 10년 넘게 차를 마시고,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 차에 관 한 글도 썼다. 산문집 <차의 기 분>은 차 종류나 기원에 대해서 잘 몰라도, 찻잔이나 다기를 제 대로 마련하지 않아도 차와 얼 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담았다.
- 첫 번째 잔_ 에세이 다시, 차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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