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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구수한 보약, 된장
바람의 찬 기운이 수그러드는 음력 정월이면, 집집마다 메주를 쑤어 장 담그기의 시작을 알리곤 했다. 장독마다 쿰쿰하게 익은 된장과 간장은 모든 음식의 조미료로 1년 내내 안주인의 손맛을 책임질 뿐 아니라 훌륭한 영양 공급원으로 가족의 건강을 지켜준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슬로 푸드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면서 발효식품의 정수인 우리 장醬이 주목받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맛있는 고기 배불리 먹고 난 뒤라면 구수한 된장찌개로 마무리해야 속이 편안하지 않은가. 그 맥을 후대에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전통 방법 그대로 장맛을 지켜나가는 묘관 스님을 찾아 경북 봉화로 향했다. 오늘은 메주콩 삶는 날,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마다 한가득 콩이 익는다.


1산기슭 부뚜막에 나란히 걸린 커다란 무쇠솥마다 한가득 메주콩이 익는다. 
2 비닐하우스 안에 줄 맞춰 걸린 수많은 메줏덩이. 햇볕에 한 달 동안 자연 건조시킨다.

산기슭에 나란히 걸린 여덟 개의 무쇠 가마솥에서 구름처럼 새하얀 김이 솟아오르며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따뜻하다. 두 손으로 힘껏 솥뚜껑을 밀어낸 뒤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뜨거운 콩을 뒤섞는다. 모락모락 김 나는 콩 몇 알을 집어 입 안에 넣고 씹으니 풋내는 간 데 없고 고소하다 못해 단맛이 살살 올라온다. 삶은 콩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경북 봉화 청량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아담한 고계암. 수려한 산등성이 아래 줄지어 놓인 2천여 개의 항아리가 장관을 이루는 이곳에서 묘관 스님은 전통 방식 그대로 정성스럽게 장을 담근다. 스물두 살에 출가해서 25년간 수행만 계속하다가 40대 후반 접어들어 이곳에 터를 잡고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산에 들어앉아 수행만 하는 것보다는, 세상에 무엇인가를 표시하면서 살아야 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산이 좋아 산에서, 된장 담고 김치 담그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고돼 다리에 병이 생겼을 정도예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먹을거리, 특히 된장·간장·고추장·김치는 반드시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맥이 끊어지면 안 돼요.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답게 먹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게 안 돼서 젊은 사람들이 성인병을 달고 살지요. 한데 병이라는 게 한번 들고 나면 고치기가 어려워요. 바로 식습관이 병을 만들기도 하고 병을 낫게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맛있고 좋은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비탈진 산등성이에 들어와 준비 과정만 3~4년, 본격적으로 장을 담그기 시작한 지는 6년 됐다. 맑고 깨끗한 청량산 자락은 좋은 장맛을 낼 수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췄다. 아무리 가물어도 3백65일 땅속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물의 기운이 좋고, 사방으로 산에 둘러싸여 기운을 받고 있으니 장맛 좋은 건 당연지사. 장의 재료를 준비하는 건 사람이지만 장맛을 완성하는 건 햇빛, 공기, 물, 미생물 같은 자연이기 때문이리라. 매년 같은 사람이 똑같은 방법으로 장을 담가도 장맛은 매번 다르고 또 독마다 제각각이니 그 이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장을 담그고, 익기를 기다리는 오랜 시간 내내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갖은 정성을 다했다.

1 봉화 청량산 자락 아래 그림처럼 펼쳐진 2천여 개의 항아리 풍경. 전라도에서 만든 1백 년 이상 된 옛 항아리만 사 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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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으로 메주를 빚은 뒤 하나하나 새끼줄로 묶어 말릴 준비를 한다.
3 황금빛이 도는 묘관 스님의 된장. 3년 이상은 묵어야 비로소 제 맛이 든다.
4 된장 빛깔만 봐도 맛이 느껴진다는 묘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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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은 반드시 장작불을 땐 가마솥에 삶는데, 익을 때까지 뚜껑을 열지 않아야 콩비린내가 안 난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된장의 효능
1 항암 효과 된장은 암 예방 효과가 높을 뿐 아니라 암 세포 성장을 억제시킨다. 대한암예방협회의 암 예방 수칙 가운데 ‘된장국을 매일 먹으라’는 항목이 들어 있을 정도. 끓여도 항암 효과가 그대로라니 더욱 고맙다.

2 항산화 작용 활성산소는 DNA 유전인자를 파괴시켜 노화와 암을 발생시키는 유해물질. 천연 항산화제인 된장은 몸속 활성산소를 없애준다.

3 간 기능 회복 영양소의 분해·합성·저장 ·해독·중화 등을 담당하는 간이 손상됐을 때 간 기능을 회복시키고 간을 해독시키는 효과가 있다.

4 피부 미용과 다이어트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를 개선하고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1 다음 세대에 우리 전통 장의 맥을 반드시 이어주어야 한다는 묘관 스님. 독마다 가득한 장은 마치 스님의 자식과도 같다.
2, 3, 4 6시간 동안 콩이 푹 익을 때까지 가마솥에 삶기. 삶은 콩을 밟아 적당히 으깬다. 옛날 어머니들은 버선발로 콩을 밟으셨다. 으깬 콩을 네모 틀에 다져넣은 후 뒤집어서 한 덩이씩 자른다.
5 1년 묵은 된장에 콩 삶은 물을 부어 섞은 뒤 다시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켜야 깊은 맛이 난다.
6 적당한 곰팡이는 장이 잘 익어간다는 증거.

이곳에서는 매년 양력 11월에 청정지역인 봉화 산골에서 재배한 햇콩을 구입한다. 봉화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젠 어느 집 어느 밭에 콩을 얼마나 심었는지 다 아는 사이가 돼서, 특히 매사에 꼼꼼한 이장님 덕분에 더욱 정확하고 깐깐하게 콩을 수매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구입한 햇콩을 양력 11월에서 1월 사이에 좋은 날을 잡아 푹 삶은 뒤 메주를 빚는다. 반드시 무쇠 가마솥에 마른 장작불을 때면서 6시간 동안 삶아야 한다. 푹 삶은 콩을 절구에 찧거나 발로 밟아서(옛날 어머니들은 새하얀 버섯발로 콩을 밟으셨다) 사각형으로 빚은 뒤 하룻밤 재워 약간 굳으면 새끼줄에 매달아 바람과 햇볕을 쐬며 30일 동안 자연 건조시킨다. 바짝 마른 메주는 다시 황토방에 짚을 깔고 켜켜이 쌓아 20일동안 띄운다. 잘 마른 메주를 솔로 깨끗이 씻어 햇빛에 하루 정도 말린 뒤 소독한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붓는다. 소금 역시 전라도 신안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구입해 간수를 뺀 뒤 사용한다. 독 안에서 40일 동안 숙성시킨 뒤(음력 초파일 지나면)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작업에 돌입. 소금물에서 건져낸 메줏덩이를 부수어 소독한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소금으로 덮은 뒤 발효시키면 된장이 된다. 메주를 덜어낸 소금물(날간장이라고 하는)은 5~6시간 동안 끓인 뒤 불순물을 걸러내고 뜨거운 채로 항아리에 쏟아 부어(뜨거운 채로 부어야 독이 소독되면서 간장이 맛있어진다) 묵히면 맛있는 간장이 되는 것이다.

장 맛을 이야기하는데 항아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묘관 스님은 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1백 년 이상 된 옛날 황토 옹기만을 찾았다. 전라도의 옛 옹기들은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것들이라 살아 있는 것처럼 숨을 쉬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토 옹기는 음식의 독성을 없애고 숨구멍을 통해 나쁜 기운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장 맛과 영양가를 유지한다. 간장이나 된장이 숨 쉬는 옹기에 담겨 자연 속에 놓여 있으면 살아 있는 생물과 마찬가지이니 ‘유통기한’이란 있을 수 없다. 고계암 넓은 마당에는 1년, 2년, 3년… 나이 먹은 간장·된장이 순서대로 정렬해 있는데, 최소한 3년은 묵어야 손님에게 선보이기 위해 독 밖으로 나올 자격이 주어진다.

“된장이 맛있으려면 공기, 흙, 물, 불, 나무의 기운이 모두 좋아야 해요. 우리는 무쇠솥과 장작, 좋은 물, 황토,오래된 옹기 등을 고집하지요. 잘 발효된 된장은 호박과 두부만 넣고 끓여도 맛이 기막힙니다. 된장이야말로 사람 오장육부에 다 좋지요. 발효식품의 효능이 그렇게 뛰어난 겁니다. 건강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듯이 육신은 정신과 통하지요. 아이들의 인성을 바르게 키우고 싶다면 된장을 열심히 먹이세요. 요즘 엄마들 자신이 잘 안 먹으니까 아이들은 덩달아 못 먹어요. 아기들이 처음 음식을 대하기 시작할 때 엄마가 먹여주는 것이 평생 습관이 되는 거예요. 맛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 손맛을 따라가게 마련이지요.”

묘관 스님 역시 속가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물려받아 음식 만들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특히 우리 음식의 뼈대를 이루는 장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항아리를 무척 좋아하는 성향도 한몫했다. 행자 시절 큰스님이 “네 손끝에서 나오는 음식 맛이 너무 좋구나. 네가 만든 음식을 수많은 사람이 먹고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 스님 말씀대로 살고 있다며 웃음 짓는다.

“언젠가는 보약 대신 된장 먹는 날이 반드시 올 거예요. 우리가 맥을 안 놓고 있으면 이 맛을 즐기는 다음 세대가 분명히 나타난다고요. 세계인들이 파스타를 먹듯이 된장을 즐기는 시대가 올 때까지 끌고 가야지요. 오랜 세월 정적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더불어 살아야지요. 된장으로 인한 만남 또한 소중합니다. 내가 안 가면 누가 여기까지 나를 찾아와 주겠어요? 그러니 나에게 된장 사업은 부처님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전파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점심은 된장찌개, 방금 만든 손두부, 배추김치, 매실장아찌, 산초장아찌, 콩잎장아찌, 깻잎김치. 호박하고 두부만 넣고 끓인 된장찌개가 얼마나 구수하던지, 갖은 장아찌가 얼마나 입에 착착 달라붙던지, 엄청난 밥도둑을 만나고야 말았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육체와 정신의 만족감에, 그리고 우리 전통 장에 대한 자부심에 더욱 든든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따스한 초파일이 지나면 이곳에는 된장, 간장 분리해 가마솥마다 간장 끓이는 진풍경이 벌어질 거다. 그러고 나면 저 많은 항아리마다 된장과 간장이 맛있게 익어가겠지.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