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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재료 이야기 사프란, 황금보다 값진 향신료
인도 카레와 스페인 파에야 요리의 노란색과 독특한 향미를 내는 식재료는 바로 사프란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가장 사랑해온 향신료인 사프란은 1년에 딱 1~2주 수작업으로만 수확이 가능하다. 모로코 탈레인의 새벽 수확 현장을 찾았다.


모로코 산악 지대인 탈레인. 새벽 햇살과 함께 사프란꽃이 개화하기 시작하면 농부들은 종교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꽃송이를 수확한다.


황홀한 색과 향기에 매료당하다
인간의 미각은 참으로 기묘하다. 보통은 다른 짐승들이 맛있게 잘 먹는 것을 사람은 입에도 못 대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스파이스(향신료)로 분류되는 많은 식물이 그러하다. 스파이스는 대부분의 곤충이나 동물은 피하는 자극적 냄새와 맛이 난다. 이것들의 독특한 향미는 실은 식물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자기방어 기제다. 시나몬밭에 가면 모기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간은 그 화학 성분에 열광한다.

스파이스는 음식이나 음료에 맛과 향을 더해주는 식물의 열매, 뿌리, 껍질을 원료로 한 식재료를 의미한다. 어떤 이는 허브도 스파이스류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보통 허브는 줄기와 잎을 사용하는 다른 재료로 분류한다. 흔히 스파이스라고 하면 인도 음식에나 들어갈 법한 열대지방의 이국적 식재료를 떠올리지만 우리가 자주 먹는 고추, 마늘, 생강도 다 같은 향신료 가족이다. 케이크, 과자 같은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에도 스파이스 향이 빠지지 않는다. 커피도 알고 보면 스파이스의 일종인데, 향이 매혹적인 열매라는 점에서 그러하다.이런 신비로운 향신료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아이템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사프란saffraan이다.

수천 년 전 인류가 향신료에 눈뜨면서부터 이미 사프란은 보석보다 귀중한 최고의 식재료로 대접받아 명품 중 명품 향신료로 꼽혔다. 고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최고급 사프란은 금값보다 비싸다. 고대 아라비아에서는 남성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고기와 와인, 여성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황금과 사프란을 꼽을 정도였다. 사프란은 향기도 매혹적이지만 인간을 사로잡은 더 중요한 매력은 색상이다. 빛나는 붉은 자줏빛인 사프란은 최상의 황금색 염료로 오래전부터 애용해왔다. 유럽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머리를 사프란으로 염색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영국 왕실에서는 궁녀들이 사프란 염색을 너도나도 해대는 통에 국왕이 자신이 사용하는 사프란이 없어진 것에 격노해 사프란 염색을 금지한 적도 있다.

이런 황홀한 컬러 때문에 사프란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신성한 재료로 추앙받았다. 인도와 스리랑카 국기의 황색 부분도 사프란 색을 의미한다. 과거 힌두교에서는 결혼식에서,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기도하기 전에 사프란 페이스트를 몸에 발랐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사프란을 뜻하는 크로커스라는 식물 이름은 요정 스밀랙스를 사랑해서 애태우다 자결한 미소년 크로코스에서 비롯됐다고 나와 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데 “황야와 사막은 즐거움, 불모지는 기쁨과 사프란과 같은 꽃을 피운다. 활발히 꽃을 피워라. 기쁘고 기뻐하며 노래하라”는 구절이 아가서와 이사야서에 적혀 있다. 이처럼 사프란은 인류에게 사랑, 마법, 죽음, 청춘을 상징했다.


사프란 암술 1kg에 1천만 원. 수확량이 매우 적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탈레인 사람들에게 사프란은 가장 큰 소득원이자, 든든한 보험이다.

사프란 1g을 얻으려 암술 1천 개 수확
사프란은 붓꽃과의 크로커스속 식물로, 크로커스의 형제이나 10월 하순경 꽃이 피므로 ‘가을에 피는 크로커스’라 불린다. 보통 크로커스와 혼동되지만 개화 시기가 다르며, 크로커스는 약초로 사용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요리 인류>제작을 위해 사프란 수확 장면을 촬영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재배지도 이란, 파키스탄, 인도 그리고 스페인, 모로코 등으로 한정돼 있고 수확 기간도 10월에서 11월 사이 꽃이 피는 2주 안팎이기 때문이다. 동틀 녘 꽃잎이 벌어져 잠시 암술을 드러냈을 때 재빨리 따야 한다. 현지와 계속 연락하며 기다리다가 사프란 수확이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모로코로 떠났다. 카사블랑카에서 차로 12시간 넘게 달려 동부 산악 지대인 탈레인에 도착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한 가족을 따라 밭으로 나갔다. 농부들과 함께 동이 터오기를기다렸다.

새벽 햇살이 비치면서 사프란꽃이 개화하기 시작하면 농부들은 능숙하지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송이를 땄다. 암술 하나라도 떨어지면 소용없기 때문에 다루는 손길은 세심하다 못해 무슨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듯이 경건해 보였다. 숨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1kg에 1천만 원으로 황금과 동등한 가격. 사프란은 꽃의 암술이므로 수확량이 매우 적고 수확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구근 한 개에는 4~6송이의 꽃이 피고 꽃 한 송이에는 세 개의 암술이 있기 때문에, 구근 한 개에서는 스무 개 정도의 암술을 얻을 수 있다. 그 중량이 0.05g 정도여서 1g의 사프란을 얻으려면 1천 개 가까운 암술을 따서 말려야 하고, 1kg의 사프란을 얻으려면 2만~3만 개의 구근이 필요하다. 게다가 기계화도, 대량 재배도 어렵기 때문에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이러니 사프란의 값어치는 앞으로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사프란은 실제로 탈레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득원이자 든든한 보험이다. 자녀 교육비뿐 아니라 가족 중 누가 아파서 도시의 병원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자녀들의 결혼 자금도 사프란을 판 돈으로 마련한다. 대대로 사프란 농사를 지었다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프란은 나와 가족의 전부이자 삶이다. 사프란을 키워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사프란이 워낙 고가품이다 보니 노리는 자가 많았다.집에 두었다가는 도둑이 들기도 하려니와 예전에는 외부 침입을 받을 때를 대비해 숨겨둘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탈레인 사람들은 첩첩산중에 토굴을 파고 안전한 비밀 보관소를 만들어놓았다. 찾아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벼랑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1 사프란꽃 한 송이에서 세 개의 암술을 얻을 수 있다.암술을 따고 말리는 과정은 모두 수작업으로 한다.
2 6백 년 전 지어 사프란을 보관한 비밀 창고. 워낙 고가품이라 침입자들을 피해 첩첩산중 벼랑 끝에 토굴을 파고 보관했다.


차에서 내려서도 산길을 한참 기어 올라가야 했다. 계곡 깊숙이 자리 잡은 토굴 입구를 육중한 나무 문이 막고 있었다. 빗장을 열려면 기다란 작대기 모양의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마을의 원로 몇 사람이 관리한다. 대문을 열자 다시 가파른 돌계단이 나왔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나 나올 법한 장소였다. 벼랑 끝에 작은 쪽문이 여러 개 보였다. 황금보다 비싼 향신료를 모셔두는 일종의 비밀 금고들이다. 스위스 뱅크의 개인 금고실을 모로코 산중에 옮겨놓은 듯 보였다. 6백여 년 전 지은 장소라 하는데 10여 년 전까지도 많은 마을 사람이 사프란을 여기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해 이 비밀 금고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그럼 사프란을 어디에 숨겨놓느냐고 묻자,협동조합의 현대식 건조 설비를 갖춘 보관소에 안전하게 보관한다고 했다.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프란의 매력
현지인은 사프란을 뜨거운 물에 타서 차로 자주 마신다. 향기가 그윽해서 좋지만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만들기 때문에, 특히 여자에게 좋다. 몸이 차갑거나 생리가 불규칙적인 증상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사프란은 신경안정제, 위장약으로도 사용했고 심지어 최음제로 애용하기도 했다. 서양 음식 중에서는 파에야와 리소토, 부야베스를 요리할 때 빠질 수 없는 스파이스다. 스페인식 해물밥이라고 할 수 있는 파에야를 만들 때, 사프란 암술을 몇 개 넣어보면 놀랄 만큼 맛과 향, 컬러가 달라진다.

값이 저렴한 다른 스파이스를 아무리 넣어서 비슷한 효과를 얻으려 해도 금방 차이가 드러난다. 워낙 값이 비싸다 보니 가짜도 많다. 옛날부터 가짜가 많아 16세기 유럽에서는 가짜 사프란을 판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스페인에는 감별사가 따로 있어 진품 명품을 가려주기도 한다. 일반인이 가짜와 진짜, 좋은 품질과 나쁜 품질의 사프란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물 한 컵을 받아놓고 실고추같이 가는 사프란 암술 한두 개만 떨어뜨려도 물은 금세 황금빛으로 변한다. 사프란이 춤추듯이 황홀한 빛깔을 내뿜는 것을 보고 있자면 무슨 마술을 보는 느낌이다.

3 모로코의 부엌에서 빠질 수 없는 향신료, 사프란. 단순한 요리에도 사프란을 넣으면 맛과, 향, 컬러가 놀랄 만큼 변한다 .
4 맛과 향만큼이나 세계인을 열광시킨 것은 황금빛 색깔. 이 황홀한 색깔 때문에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신성한 재료로 추앙받았다.


따져보면 맛이라는 감각은 허점투성이다. 맛을 인지하는 혀라는 감각기관은 향기를 맡는 코가 없으면 거의 무용지물이다. 코를 막고 양파즙을 마셔보면 사과즙과 구별하기 어렵다. 후각이 없다면 우리의 미각은 반쪽짜리도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요리할 때 향신료를 적절히 사용하면 음식의 격이 달라진다. 바비큐를 할 때 몇 가지 스파이스를 넣으면 신기할 정도로 고기맛이 확 살아난다. 이 맛에 푹 빠진 중세 유럽인이 스파이스를 찾아 미지의 대양을 건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가장 큰 이유도 이 매력적인 향미 식물 때문이었다. 사프란의 매혹적인 향기에 취하다 보면 스파이스를 탐한 인류의 오랜 욕망이 이해가 간다.

명품 향신료 사프란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오는 3월 7일 KBS 1TV <요리 인류>(밤 10시 방송 예정)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요리 인류>(8부작)는 6년 전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로 미국 피버디 어워드, ABU, 한국방송대상 등을 휩쓴 이욱정 피디의 야심작이다. 음식을 제대로 알아야 좋은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전 재산을 털어 2년간 요리 학교 르 코르동 블루에서 수학한 후 작업한 첫 작품이라 더욱 기대를 모은다.

글과 사진 이욱정(KBS 피디,<요리 인류>제작 중)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