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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지식인의 서재 [서재 아이디어 4]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서재를 보다
우리 선비의 서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서양 지식인의 서재도 지식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끓는 요람이자, 주인의 취향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생활 공간이자, 지식과 교양이 교류되는 사교 살롱이었다. 18세기 서양 지식인의 서재에는 어떤 취향과 만남과 지식이 숨 쉬고 있었을까? 프랑스의 오브제 감정사가 옛 그림과 가구에서 18세기 서양 지식인의 서재 풍경을 끄집어냈다.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 것이 트렌드라고 하지만 책과 책상으로만 채운 비슷비슷한 서재를 보다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양의 선비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사색하는 공간을 서재라 하고 책을 두는 공간을 서고라 부른 것은 서고와 서재의 차이점 때문이 아닐까? 방 윗목에 작은 탁자를 두고 그림 족자를 걸어둔 소롯한 서재에는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서 층층이 책으로 둘러싸인 서고와는 분명 다른 느낌을 준다. 서재가 생각하는 공간이라면 서고는 배우는 공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서양에서는 어떠했을까?

서재를 영어로는 스터디룸 또는 라이브러리, 프랑스어로는 비블리오테크라고 한다. 현대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라이브러리나 비블리오테크는 도서관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서재를 뜻하는 단어가 도서관이라는 것은 서재의 출발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일부 상류층들과 수도사들만이 학문이라 불릴 만한 지식을 소유했던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집에 서재는커녕 책을 여러 권 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모든 책은 양피지에 일일히 철필로 필사한 것이었으니 귀하디귀했다. 당시 귀족들의 미덕은 사냥과 전쟁이었는데 정세가 불안정했던 만큼 한가하게 집에서 책이나 읽고 있을 만한 시간은 거의 없었으리라.

특정한 계층에서만 향유할 수 있었던 지식이 누구나 알아야 하는 생활의 밑바탕인 교양이 되기까지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가 있었다.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이름을 떨쳤던 메디치 가문이나 이탈리아 고전을 읽고 오비드나 비르질 같은 고전 시를 암송했던 프랑수아 1세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은 품위 있는 사람이 하는 미덕 중 하나인 교양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서 학문이란 전통적인 학문의 범주에 드는 문학이나 철학뿐 아니라 미술과 과학까지를 아우른다. 즉 당시의 서재는 책만 소장하는 곳이 아니라 그림과 조각을 전시하고, 지나간 왕들의 메달을 보관하며 과학적인 실험을 하는 지적인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위오른쪽) 프랑스의 카비네드 라 퀴리오지테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귀족들의 저택 설계도에서는 처음으로 개인 도서관 격인 비블리오테크를 위한 방이  나타나는데, 이 방이 요즘 말하는 서재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비블리오테크는 전적으로 학문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일이나 사무를 처리하는 뷰로나 카비네와는 다른 독립된 공간이었다. 비블리오테크는 주인의 취향과 기호를 철저히 반영하는 곳으로 미술을 좋아하는 주인이라면 카비네 데 자cabinet des arts(예술의 공간), 특별히 과학에 흥미가 있는 주인이라면 카비네 드 라 퀴리오지테cabinet de la curiosite라 이름 붙였다. 18세기 유럽에서 단연코 흥미 있는 공간이라면 카비네 드 라 퀴리오지테를 빼놓을 수 없다. 카비네 드 라 퀴리오지테는 이름 그대로 호기심을 위한 방이었다.

동양에서 건너온 자개, 남미의 바다에 산다는 해초, 기묘한 형상의 동물 박제, 산호 등 각지에서 온 신기한 것들을 모아놓고 그림을 그려가며 현미경을 동원해 그것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18세기 신사의 교양이었던 것이다. 카비네 드 라 퀴리오지테에서는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험도 이루어지기도 했 다. 당시 최고의 유행은 전기 실험으로, 물레처럼 돌아가는 기구를 이용해 약한 전기를 일으켜 사람을 감전시키는 약간은 엽기적인 것이었다. 루이 15세는 이 전기 실험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한 번에 2백40명의 군인들을 감전시키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천문학이나 해부학, 자연생물학 역시 카비네 드 라 퀴리오지테에서 출현했으니, 과연 호기심의 요람이라고 칭송할 만하다.

(왼쪽부터) 17세기의 서재 / 1744년 로마 귀족의 서재 / 19세기 초반 프랑스 서재

물론 서재의 꽃이나 마찬가지인 책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았다. 좋은 장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곧 사교계에서의 출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큰 서재를 가진 귀족이나 학자의 집에는 늘 유럽 각지에서 지식을 탐구하러 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으며 새로운 책은 곧 화제에 올라 귀족과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콜베르의 아들인 세뉼리 후작의 서재는 여느 도서관 못지않은 장서 수를 자랑했는데, 1만 6천 권의 장서와 8천 종의 희귀 필사본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호안 추기경은 위대한 역사가 니콜라스 드 투 주교의 서재에 있던 귀한 고서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책을 보러 모인 귀족과 학자들의 잦은 사교 모임은 곧 살롱이 되어 일종의 유행처럼 전 유럽에 번지게 된다. 흔히 살롱 하면 여주인이 주최하는 다소 가벼운 사교 모임을 연상하곤 하지만 18세기의 살롱은 엄연한 의미에서는 서재에서 모이는 단출한 모임이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세미나 형식의 만남이었다.

세미나 하면 으레 유명 강사를 초청하고 간사를 정하는 것처럼 볼테르 같은 명사는 온 유럽 궁정의 모든 살롱에 강사로 초대될 만큼 인기가 많았다. 또한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서재에서는 작은 음악회, 시 낭독 모임이나 그림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즉 18세기의 서재는 단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요즘 유서 깊고 훌륭한 도서관에 가면 책뿐 아니라 음악이나 비디오, 영화까지 볼 수 있는 것처럼 18세기의 서재 역시 주인의 관심사가 반영된 문화 공간의 성격이 강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서재를 넘나들며 상대의 취향을 알아가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그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서 바로 오늘날의 학문 중의 학문이라 불리는 철학이 싹텄다. 또 새로운 세계를 위한 동경과 어처구니 없는 실험에서 과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는 빛의 세기라는 별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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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고양이 빌딩 안의 다치바나 다카시 (오른쪽)고양이 빌딩

당시 서재의 모습은 책상과 책장만 있는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신기한 가구와 편안한 의자가 함께하는 곳이었다. 서재 문화의 발전으로 18세기는 다양한 서재용 가구가 출현한 시기로 꼽힌다. 안에 기계 장치를 숨겨놓아 비밀 서랍이 열리고 뚜껑이 자유자재로 접히며 독서대까지 움직이는 책상에서부터 뚜껑이 달린 모습이 당나귀 등과 닮았다고 하여 그대로 이름이 된 뷔로 도 단bureau dos d’ane, 큰 뚜껑이 아예 책상 전부를 덮는 뷔로 아 실란드르bureau a' cylinder 등 헤아릴수 없이 많은 종류의 책상이 나타났다. 책상뿐 아니라 가죽으로 마감하고 돌아가는 안장에다 손잡이에는 잉크병과 종이를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수납함이 숨겨져 있는 뷔로용 의자, 누워서 책을 보기 좋은 리 드 레포lit de repos 같은 의자의 변형형도 이때 생겼다. 종종 ‘왜 앤티크 가구 중에서 18세기 책장은 보기 힘드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당시에는 책장이 아예 집을 인테리어할 때 설치하는 붙박이 가구였기 때문이다.

서재를 단지 책으로만 채우고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만 활용하는 것은 아쉽다. 아름다운 서재란 주인의 취향이 들어차 있고, 그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어야 한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음반과 클래식 서적이 가득한 서재로, 뜨개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뜨개 샘플을 그림처럼 전시한 공간으로 꾸며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를 초대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18세기 귀족의 서재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부터 칼 라거펠트까지 못 말리는 탐서주의자들
서재는 지적 사유의 공간인 동시에 책에 대한 욕망의 집결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디자이너 가운데에는 책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이 많다. 뛰어난 작가이자 어마어마한 서재를 가진 장서가인 움베르트 에코는 ‘서재에 책이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쓰기까지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라고 묻는 방문객에게 대해 “아니요. 이미 읽은 책을 뭐 하러 놔두겠어요” 같은 위트 넘치는 답을 생각해내었다.
(왼쪽부터)알베르토 망구엘/움베르트 에코

대부분의 장서가들은 지적 사유를 사랑하는 지식인들이지만 때로 이들에게 책은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독서의 역사>를 쓴 유명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사를 앞둔 어느 날 쓰러질 듯 쌓인 책더미 속에서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 뻔한 많은 책을 간직하려는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며칠 후면 그 책을 찾게 될지 모른다는 노파심, 어떤 책이든 자신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책이 없으며 이 많은 책들을 집으로 가져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가 미래의 어느 날 유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함. 그러나 계속 늘어만 가는 책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관능적인 탐욕이라는 사실에 도달한다.

‘지知의 거인’이라 불리며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다치바나 다카시 역시 책이 가득한 서재로 유명하다. 그는 집에서 감당이 안 되는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고양이 빌딩’을 따로 지었다. 까만색인 건물 표면에 일본에서 복을 부르는 동물로 여겨지는 고양이 얼굴이 그려져 있어 고양이 빌딩으로 불린다. 10평 정도 되는 자투리땅에 철근으로 세운 4층 건물로, 내부 서가의 총 길이를 합하면 무려 700 m에 이른다. 책장뿐만 아니라 계단까지 책이 빼곡히 쌓여 있어 지진이라도 나면 그대로 책에 깔릴 상황. 이를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는 지적 욕구가 왕성한데, 전문가와의 대담을 준비하면서 관련 도서 구입에 6만 엔을 쓰고 대담료로 6만 엔 받아 ‘본전치기’에 그쳤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샤넬, 끌로에, 펜디,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까지 넘나들며 멋진 디자인을 선보이는 천재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소문난 장서가. 그는 몬테카를로, 로마, 브리타니아, 함부르크, 베를린, 파리 여섯 곳에 저택을 두고 있는데 여기에 소장한 책이 모두 합해 23만 권. 이는 웬만한 국립 도서관 수준.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예술 관련 잡지나 역사책을 읽으며 디자인을 구상한다. 신문과 잡지에 서평을 즐겨 기고하며 홍보에 필요한 글도 직접 쓸 정도. 화려한 파티보다 책에 묻혀 지내는 그의 일상이 의외이지만, 유행의 제왕으로 불리며 엄청난 창작 에너지를 보여주는 그의 이면에는 이렇듯 책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흡수하는 독서광의 면모가 숨겨져 있다.

손영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