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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생활을 꿈꾸게 만드는 질서와 균형의 양식 생활이 된 디자인 바우하우스Bauhaus 1
우리가 다녔던 학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상자 같은 건물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콘크리트 기둥들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사각형 창문들로 메웠다. 회색 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면 학교 앞 문방구에는 원색적인 공중전화가 있다. 시대는 변했고 2007년 우리의 손에는 똑 떨어지는 모양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엄지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하게 생겼다. 집은 어떤가? 씻고 다듬고 데우기 좋게 최적의 동선으로 계획된 싱크대가 있고, 옷을 종류별로 나눠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붙박이장이 있으며, 금속 프레임에 가죽 옷을 입힌 안락한 소파가 있다. 눈앞에는 둥근 벽시계와 무지Muji의 네모난 CD 플레이어가 걸려 있다. 이 모든 디자인의 출발점은 ‘바우하우스’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향유하는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1919년 산업 생산에 적합한 예술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독일의 한 조형 대학의 이름이었던 것이 하나의 양식style이 되어 우리 생활 곳곳에 드러난다. 건축이며 가구며 그릇까지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디자인의 본질만큼은 벗어날 수 없었다. 요즘 같은 디자인 과잉 시대에도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며 이상적인 생활상을 꿈꾸게 만드는 이것. 모더니즘이란 신기류를 만들어낸 이 엄청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바우하우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바우하우스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미술의 ‘인상파’나 ‘입체파’보다 중요한 현대 조형 개념을 낳은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개교한 지 불과 14년(1919~1933) 만에 폐교된 디자인 학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14년은 전 세계 디자인 교육의 근본을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바우하우스와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우리들조차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우하우스의 어떤 유산을 물려받은 걸까요?

바우하우스의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집니다. 바우하우스는 두 부류의 선생을 고용했는데, 하나는 순수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공예가였습니다. 이 학교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두 직업군의 선생을 동등하게 대우하고자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요. 월급은 똑같았지만, 예술가들이 먼저 월급을 받았고 며칠 뒤에 공예가들이 받았습니다. 며칠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극심한 인플레로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오르던 독일에서는 그 며칠 차이로 수입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에피소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해줍니다. 바로 당시 독일이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가난했다는 사실입니다. 독일은 패전으로 산업이 피폐해진 데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이웃 나라들에게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어떻게 하면 민중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라는 절박한 문제를 그 어떤 국가보다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그런 고민이 ‘기능주의에 따른 합리적인 기계 미학’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양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은 질 좋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공급하려는 착한 뜻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는 조립식 숙소를 만들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이상을 가진 건축가였는데, 그는 당연히 20세기 초에 대량생산된 새로운 재료인 강철과 유리에 주목했습니다.

대량생산에 적합한 디자인이란 단순화되고 규격화되어야 합니다. 장식적이고 복잡한 형태는 비용을 추가로 발생시키므로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기초 형태를 연구하게 됩니다. 바로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의 형태인데요. 그리고 이 기초 형태를 이용해 모든 디자인을 합니다. 색도 단순화하고. 그런데 이런 형태는 자연을 모방한 구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입니다. 공예가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월급을 일찍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우하우스가 일찍 폐교 조치를 당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적 이상이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와 상반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바우하우스의 선생들과 그 이념을 주입받은 학생들은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죠. 특히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이 학교의 교장이자 모더니즘의 아버지들이 최고의 산업 국가인 미국으로 감으로써 바우하우스 이념과 양식은 세계 표준이 됩니다. 이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을 발굴했습니다.

전 세계, 특히 산업화와 효율적 기업 운영을 열망한 도시들은 바우하우스 양식을 전폭 지지했습니다. 강철 구조와 유리로 된 사각 박스 건물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미술 학교가 바우하우스의 기초 조형 이론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양식을 체득하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건물 속의 규격화된 사무가구, 기하학 형태의 단순한 조명과 아무런 장식이 없는 깨끗한 벽면, 사열하는 군대처럼 줄이 딱딱 맞는 신문과 잡지의 레이아웃, 그래서 왠지 순수해 보이는 우리 주변의 모든 디자인이 바로 바우하우스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때로는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고상한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마음, 그런 착한 뜻으로부터 비롯된 바우하우스 양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장식적이고 비효율적인 예술이 과잉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 생활양식의 하나로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글 김신(월간<디자인> 편집장)


순수한 건축의 결정체라 칭송받은 바우하우스 학교 건물(오른쪽)과 발터 그로피우스의 집(왼쪽).

학교와 무지 CD 플레이어의 뿌리는 같은 것이었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축물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의 느낌. 그곳은 디자이너들에겐 성지였다. 도끼다시(인조석 물갈기: 학교나 공공 기관 건물에 흔히 사용되는 바닥 시공법)의 느낌과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인 요소들…. 그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당시로 돌아가 영화에서처럼 복도에 서서 정장을 입은 젊은 신사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오늘날의 디자인을 지배하는 그 엄청난 에너지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물과 공간. 이미 그 시대 안에 세상 모든 디자인에 대한 답이 있었다. 진정한 디자인은 바우하우스 시대에 이미 다 나왔고, 우리는 그것의 포장만 계속 바꿀 뿐이다.” _ 마영범(인테리어 디자이너)

“내가 다녔던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옆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주택 단지가 있다. 그곳을 드나들며 바우하우스는 생활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 만들어진 제품들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며, 이케아나 폴리엠 같은 대중적인 브랜드부터 무명 씨의 디자인조차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따라 하고 있지 않은가?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내구성과 기능성, 편리성을 갖춘 오브제들이다. 난 그 바우하우스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며,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이것이 진정한 바우하우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_ 사보(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바우하우스는 최고의 기능주의다. 남산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갤러리 빙’이란 건물을 보라.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엄격한 그리드(모눈종이처럼 공간을 나누는 일정한 비례)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드란 결국 전 세계가 엄격한 질서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놓은 하나의 프로그램인데. 갤러리 빙은 땅속에서 솟구친 다이아몬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평면, 입면, 단면을 쪼개 보면 모든 것이 엄격한 삼각형의 그리드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유리와 철골을 사용해 건물을 지은 것이며, 그리드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 양식은 그렇게 미국의 현대 건축을 탄생시켰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의 삼일 빌딩(청계천 2가에 있는 현 대우정보통신 건물)과 같은 건축물을 세웠다.” _ 이용재(건축 평론가, 대통령자문 건축문 화선진화위원)

“내가 다녔던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옆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주택 단지가 있다. 그곳을 드나들며 바우하우스는 생활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 만들어진 제품들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며, 이케아나 폴리엠 같은 대중적인 브랜드부터 무명 씨의 디자인조차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따라 하고 있지 않은가?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내구성과 기능성, 편리성을 갖춘 오브제들이다. 난 그 바우하우스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며,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이것이 진정한 바우하우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_ 사보(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바우하우스는 최고의 기능주의다. 남산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갤러리 빙’이란 건물을 보라.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엄격한 그리드(모눈종이처럼 공간을 나누는 일정한 비례)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드란 결국 전 세계가 엄격한 질서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놓은 하나의 프로그램인데. 갤러리 빙은 땅속에서 솟구친 다이아몬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평면, 입면, 단면을 쪼개 보면 모든 것이 엄격한 삼각형의 그리드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유리와 철골을 사용해 건물을 지은 것이며, 그리드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 양식은 그렇게 미국의 현대 건축을 탄생시켰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의 삼일 빌딩(청계천 2가에 있는 현 대우정보통신 건물)과 같은 건축물을 세웠다.” _ 이용재(건축 평론가, 대통령자문 건축문 화선진화위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멘토바우하우스 4인방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의 역사요, 하나의 양식이다. 그런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여기 소개하는 네 명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오늘을 이끄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바우하우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1883~1969)
바우하우스의 설립자로 1919년부터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냈다. 세계 건축의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독일 데사우Dessau에 있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도자기, 벽지, 가구 등과 같은 대량생산품에는 건축에서 유래된 기능적이고 통합적인 양식이 적용되었다. “예술, 공예, 건축을 가르는 경계는 사라져야 하며, 예술가들은 특히 산업계와 일하기 위해 적절히 훈련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1886~1969)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함께 세계 건축의 4대 거장에 속한다. 바르셀로나 의자와 같은 기념비적인 디자인을 남겼으며 나치 정권의 압력으로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 주임교수로 일했다. 20년 동안 이 학교에서 미국 현대 건축의 기틀을 마련했고, 유리, 철골조를 활용한 건축의 표본을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건축계를 이끌고 있는 건축가들을 키워냈으며, 그의 건축은 한국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1902~1981)
1920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학생의 신분으로 강관 의자와 같은 역작을 만들며 독특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25년 바우하우스가 정치적 이유로 독일 데사우로 이전하게 되면서 가구 공방의 책임교수로 임명되었다. 1937년에는 지도교수였던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게 된다. 그는 미스나 발터와는 달리 가구 디자인을 건축보다 먼저 생각했다. 유럽과 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미국 건축을 이끌어가는 유명 건축가들의 스승으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마리안네 브란트
Marianne Brandt(1893~1983)
바우하우스 내의 금속 공방은 바우하우스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곳으로 꼽혔는데, 바로 이곳 출신의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마리안네 브란트였다. 그는 남성의 영역이었던 금속 가공 분야에 뛰어들어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내구성이 뛰어난 금속 제품을 만들어냈다. 젊은 시절 디자인에서 거둔 성공이 다시 되풀이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1920년대에 디자인한 작품들이 아직까지 알레시와 같은 세계적인 회사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바우하우스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곳
aA 디자인 뮤지엄_
엄청난 양의 유럽 빈티지 가구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aA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1920년대 당시에 디자인된 마르셀 브로이어의 가구들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동시대를 풍미했던 가구 디자인의 거장들이 남긴 디자인과 그 안에 담겨온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 문의 02-3143-7312

Sabo 숍_ 빈티지 디자인 컬렉터로 바우하우스 시대의 생활상을 수집하고 있는 사보. 이곳은 갤러리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사보의 공간이다. 깨끗한 벽에 아름답게 진열해놓은 갤러리가 아닌, 직접 만져보고 당시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사보의 티셔츠도 마치 바우하우스 시대에 살던 사람의 옷처럼 진열되어 있다.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 문의 02-324-1484, www.sabolim.com

다다도프_ 오피스 및 생활 가구를 선보이고 있는 ㈜다다도프의 매장에서는 1900년대 초반의 현대적인 가구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인테리어 컨설팅도 해주고 있는 이곳에서는 미스 반 데어 로어, 마르셀 브로이어,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가구를 판매하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생산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거장들의 대표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 문의 02-511-7918, www.dadadof.co.kr

eBay_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온라인 옥션 사이트 이베이에서는 다양한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는 바우하우스 제품들도 상당수 있다. 아직 컬렉션 아이템으로 발굴되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어 저렴한 가격에 좋은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발견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빈티지 마니아 디자이너들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www.ebay.com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