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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된 듯 누리는 하룻밤 호사 [한옥을 찾아서] 최초의 한옥 호텔, 경주 라궁
라궁은 한옥의 정취는 그대로 간직하면서 현대적인 호텔의 서비스를 접목해 쾌적한 휴식 시간을 선사한다. 누마루에서 산과 물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즐기고 궁궐 같은 회랑과 호수를 산책하며 창밖으로 하루의 빛이 변하는 것을 감상하다 보면 도시의 속도에 지친 마음이 어느덧 차분해지고 풍요로워진다. 그 옛날 임금이 부럽지 않은 하룻밤의 호사다.

1 1백7명의 목수와 16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완성한 라궁. 정면에 보이는 것은 2층짜리 관리동 건물이며, 왼쪽 둔덕에 자리 잡은 건물은 오래된 한옥인 숙재헌.
2 현대적인 공법을 적용한 라궁은 독일산 적송, 러시아산 적송, 북미산 미송 등 수입 목재를 사용하고, 스웨덴에서 발명한 기포 콘크리트 ALC를 벽체에 사용하는 등 재료에서도 한결 자유로워졌다.
3 라궁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본 평면도. 뒤쪽의 산과 함께 ㅁ자형을 구성한다.

한옥 호텔 라궁이 지난 5월 11일 경주에 문을 열었다. 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선망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한옥. 그러나 내 집으로 갖기에는 현실적인 장애물이 만만치 않다. 이에 논산 윤증선생고택, 경북 송소고택, 전주한옥마을 등 숙박이 가능한 한옥들이 짧게나마 한옥의 정취를 체험해볼 수 있는 대안이었다. 일반인에게 개방한 이 같은 한옥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옥 호텔 ‘라궁’의 출현이 유달리 반가운 이유는, 라궁이 전통 한옥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현대적인 기능을 담고 있는 공간 중 하나인 호텔로 탄생했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를 체험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에 맞게 과거를 재해석, 새롭게 진화한 공간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라궁羅宮은 ‘신라의 궁궐’이라는 의미. 경주 보문단지에 대대적으로 문을 연 역사 테마파크인 ‘신라밀레니엄파크’의 한 부분으로 지어졌다. 총 5만여 평 부지에 세워진 신라밀레니엄파크 중 호텔 라궁의 대지면적은 약 5천 평, 호텔 건물이 들어선 땅은 5백여 평이다. 콩코드호텔을 통해 이미 호텔 사업에 일가견이 있는 삼부토건이 기획하고, 도시 한옥 잘 짓기로 유명한 구가도시건축의 조정구 소장이 설계했으며, 한옥의 현대화를 위해 꾸준한 실험을 시도하는 이연건축이 시공을 맡아 완성했다.

신라 천년고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에 위엄 있게 들어선 한옥 호텔 라궁은 서양식 호텔처럼 요란스러운 장식도, 최첨단 호텔처럼 이색적인 볼거리도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주변으로 낮은 산이 건물을 포근하게 휘둘러 감싸고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옥 특유의 운치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라궁 내 객실은 총 16개. 길게 이어지는 지붕을 공유한 채 독립된 각 객실이 회랑을 따라 이어진다.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ㄴ자로 객실이 연속해 있으며 로비가 있는 관리동과 함께 ㄷ자를 구성, 뒤쪽 산으로 이어지며 빙 둘러싸인 ㅁ자형을 구성한다. “라궁은 굉장히 큰 한옥이지만 객실은 도시형 한옥 구조를 적용, 총 네 가지 유형이 등장합니다. 앞쪽 호수로 돌출된 누마루형, ㄷ자형을 기본으로 하는 마당형, 그리고 스위트룸 두 가지 유형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보다 경제적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도시 한옥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만 그것을 엮는 유형은 단순화했다는 것이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소장의 설명. 덕분에 라궁은 치목治木, 시공, 조립을 모듈화하여 1백 일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을 가능케 했다. 한옥의 현대적인 공간 성격은 물론 그 공법에서도 혁신을 이룬 셈이다.


1, 4 창밖으로 라궁의 운치 있는 전경이 펼쳐지는 관리동 2층의 한식 레스토랑.
2 신라시대 한복을 입은 직원의 안내로 체크인과 안내 절차를 거치게 된다. 한옥이 호텔이라는 현대적인 기능을 담았다는 점에서 라궁의 시도는 의미가 있다. 금장식이 되어 있는 라궁 특유의 전통 가구가 관리동 곳곳에 놓여 있다.

호텔다운 위엄을 보여주는 한옥 로비
라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 바로 관리동. 로비, 리셉션 데스크, 레스토랑이 있는 관리동은 호텔의 공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공간인 만큼 그에 어울리는 화려함을 보여준다.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2층에 달하는 높이를 그대로 터놓은 시원스러운 천장. 높은 서까래 천장과 이를 받치고 있는 육중한 대들보는 ‘궁’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위엄과 기품을 보여준다. 그 아래로 설치미술 작품처럼 걸려 있는 거대한 한지 조명등도 특별한 멋을 더해주는 요소. 이는 공예작가 차현림 씨의 작품으로, 마치 물결치는 파도처럼 곡선을 그리는 조명등과 대형 노리개와 함께 매달린 원기둥형 조명등이 전통의 미감을 현대적으로 변주해 색다른 멋을 전한다.

중정에 기품 있는 자태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정의 바닥은 얕은 수면으로 연출했는데, 그 가운데에 잘생긴 단풍나무 한 그루가 열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 있다. ㅁ자형 구조인 관리동 한옥은 어느 공간에서나 창을 통해 이 중정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로써 나무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그림을 연출한다. 여느 유럽풍 호텔의 조각 작품 못지않은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셈. 1층이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아 리셉션 데스크로 연결되는 ㅁ자형 구조라면, 2층은 그 ㅁ자형 중 절반인 ㄴ자 부분으로만 구성되며 용도는 본격적인 한식 레스토랑이다. 이곳에서 라궁을 찾은 이들을 위한 식사가 준비된다. 녹두전, 제주 생갈치구이, 소갈비찜 등으로 이어지는 한정식이 저녁 메뉴이며, 아침으로는 정성스럽게 끓인 죽이 제공된다. 테이블에 앉아 즐기는 식사는 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라궁의 운치 있는 전경 덕분에 그 맛이 두 배다. 라궁 관리동은 이처럼 한옥의 정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호텔을 찾은 이에게 설레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3 길게 이어지는 회랑은 궁궐과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는 한 요소. 회랑을 따라 각 객실의 대문이 연속해 있다. 
5 ㅁ자형 구조인 관리동 가운데에 있는 중정. 관리동 1층과 2층 어디에서나 창을 통해 이를 바라볼 수 있다. 기품 있는 나무는 기와와 하늘을 배경으로 드라마틱한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옥 호텔은 으리으리한 서양식 호텔에서는 불가능한 기품과 운치, 여백을 보여준다.

삼부토건 류구현 상무가 말하는 놓치지 말아야 할 라궁 관전 포인트3
삼부토건(02-3706-2114)은 국내 건설회사 중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보수 면허를 가지고 있는 업체. 문화재 보수뿐만 아니라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등 전통문화와 관련된 건물을 다수 시공해온 회사다. 라궁을 포함한 경주밀레니엄파크 전체의 기획과 사업 진행을 주도했던 삼부토건 류구현 상무가 라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전 포인트를 추천한다.

노천 온천 한옥 마당에 마련된 노천 온천은 라궁이 특별히 자랑하는 공간. 이는 일반 호텔에서도, 기존 한옥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경험이다. ㅁ자형 한옥으로 둘러싸여 프라이빗하면서도 하늘이 열려 있어 이색적인 목욕 시간을 선사해준다. 여기에 공급되는 물은 삼부토건이 이전 경주 지역 사업 시 확보해놓은 지역 온천.

숙재헌 라궁과 마주 보는 언덕에 있는 두 채의 오래된 한옥. 이는 삼부토건이 과거 댐 공사 시 수몰될 위기에 처한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라궁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지은 최신 한옥이라면 숙재헌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한옥. 시대를 초월해 함께 존재하는 두 한옥을 비교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신라밀레니엄파크 라궁에 머물게 되면 신라밀레니엄파크 전체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신라시대 성골·진골 가옥 형태를 재현한 한옥, 수상과 지상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테마 공연, 성덕대왕 신종을 4.5배 크기로 재현한 형태인 에밀레타워 등 역사를 테마로 한 볼거리가 풍부하다.


1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공기의 흐름과 자연의 소리, 하루의 해가 기우는 빛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다.
2 누마루에 옥외 온천이 있는 스위트룸.
3 자연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한옥의 창.
4 라궁의 객실 안방에는 푹신한 침대가 놓여 있다. 현대적 가구와 한옥의 조화를 꾀했다.
5 스위트룸 복합 A형 평면도.

대청마당대청마루에 앉아 풍광 즐기는 객실
라궁의 객실은 총 네 가지 유형. 일반 객실로 누마루형과 마당형 두 가지가 있고, 스위트룸 또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누마루형과 마당형이 교차되면서 이어지도록 했어요. 누마루만 반복되면 외관상 모양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호수 쪽으로 돌출된 누마루가 있는 누마루형과 상대적으로 마당이 더 넓은 마당형이 교차되도록 했습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객실이 반복되는 양 끝으로 각각 스위트룸을 마련, 반복의 끝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었다고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소장은 설명한다. 각 객실 면적은 일반 디럭스룸이 23평, 스위트룸이 27평 정도.

이곳에서는 어떤 하루를 누릴 수 있을까? 먼저 체크인을 마치고 긴 회랑을 따라 위치한 객실로 향하면 카드 키로 철컥 열리는 현대식 문 대신 삐거덕거리는 나무 대문이 기다리고 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서도록 되어 있는데, 내부는 대청마루, 안방, 마당, 미니바, 누마루, 노천 온천이 객실별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여 자리 잡고 있다. 깔끔하게 마감된 마루와 안방에는 라궁 특유의 금장식이 더해진 전통 가구가 놓여 있다. 소파와 침대 같은 입식 가구도 있어 시선을 끄는데, 이 역시 한식 스타일에 맞추어 디자인되었다. 입식 가구는 좌식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자 입식 문화였던 신라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고.

1 누마루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2 노천 온천은 라궁의 자랑. 밤하늘의 별빛 아래 호사스러운 목욕을 즐길 수 있다.

대청마루, 안방, 중정 마당, 누마루로 통하는 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으면 집 안은 시원스럽게 한 공간으로 통한다. 창밖으로는 야트막한 산 아래 호수가 펼쳐지는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이웃해 있는 경주의 관광지를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적막한 한옥 내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좋다. 복잡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고요의 미덕을 오랜만에 흠뻑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바람소리, 물소리, 하루의 해가 기우는 빛의 변화와 같은 자연의 흐름을, 듣고 보고 촉감으로 감지하는 경이로움이 보너스로 있다. 밤이 되면 호수에 비친 달을 감상하고, 마당에 마련된 노천 온천에서 별빛 아래 호사스러운 목욕을 즐길 수도 있다. 옛 임금에게 휴가가 있었다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호텔이기에 당연히 TV, 냉장고, 에어컨과 같은 편의를 위한 전자제품도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이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한옥의 정취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 이용 요금은 일반 디럭스룸이 1인당 12만~15만 원, 스위트룸이 1인당 14만~20만 원이며 이는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 신라밀레니엄파크 이용을 포함한 가격이다. 문의 054-778-2000

3 센서로 움직임을 감지해 켜지는 자동 조명등이지만 전통 미감을 살려 디자인했다.
4 객실 대문의 문고리.

라궁의 시공 총괄 맡은 조전환 목수
“한옥을 현대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실험”

이연건축(031-455-6173)의 조전환 대표는 집 짓는 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옥 짓는 일을 어깨너머로 익힌 인물. 경복궁 복원 작업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한옥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미 ‘유령’이 된 왕의 집을 만들기보다는 살아 있는 보통 사람의 집을 짓고 싶어 한옥 살림집을 짓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옥 생활을 누리기를 꿈꾸며 현대적인 한옥 건축 방식을 계속 연구 중이다.

라궁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한 부분은? 모듈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기계의 힘을 빌려 현대적인 생산 방식으로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공사 기간을 줄이는 것은 물론 공사 시간을 단축해 한옥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도움이 된다.

모듈화가 어떤 점을 개선해준 것인가?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드는 한옥은 각 부분의 목재를 그때그때 대목이 다듬어 완성해간다. 그러나 우리는 모듈화된 설계를 통해 목재를 표준화하여 기계로 먼저 준비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조립과 시공 작업을 한 번에 진행함으로써 기간 단축이 가능했다. 이는 한옥 건축 방식에서 의미 있는 실험적 사례가 될 것이다.

1백여 명의 목수가 참여했다던데? 목수 1백7명, 석공 16명 등 동원 인력 면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축 이래 최대의 한옥 공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석공 명장 윤만걸 선생, 한지 작가 차현림 씨, 도자기 작가 강진명 씨 등 여러 장인과 작가의 솜씨가 더해졌다. 따라서 한옥 자체의 하드웨어는 물론 디테일까지 완성도 있게 나올 수 있었다.

손영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