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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대심리의 손대호 씨 주택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행성을 떠도네
사람들은 건축가 문훈 씨의 작업을 두고 ‘유치찬란 판타지’ ‘치기 어린 장난’ 또는 ‘에로티시즘 건축’이라 흔히 설명한다. 문훈 씨가 자신만큼이나 독특하고 오묘한 고교 동창 손대호 씨를 위해 양평 대심리에 집을 지었다. 우주로 향하는 관제탑처럼 기도실이 불쑥 솟아 있는 그 집에서 외계인 같은 두 친구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다. 방백 같고 독백 같은 그 대사는 정말 알 듯 모를 듯하다.


지붕 위 발코니에 마주 선 건축주 손대호 씨(왼쪽)와 건축가 문훈 씨(오른쪽). 집의 테두리를 두르는 이 발코니와, 공중에 뜬 기도실은 이 집을 우주선처럼 보이게 하는 결정적 요소다. 기도실의 밑부분에는 붉은색 매입등을 달았는데, 북두칠성처럼 늘어놓고 싶었으나 구조적인 문제로 그 형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아쉬워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금색, 붉은색이 이 기도실을 장식하고 있다. 기도실 지붕의 철근 구조물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위성방송용 안테나와 함께 우주와의 교신용으로 쓰일 거라고 문훈 씨가 농담처럼 말했다.

손대호(이하 손) 고등학교 때 호주의 태즈메이니아라는 섬에서 문훈이라는 녀석이 전학을 왔다. 지질학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영월의 광산에서, 청소년기는 태즈메이니아에서 보냈다고 했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공부를 썩 잘 하진 못했지만 <도덕경>을 늘 끼고 다녔다. 난영어나 좀 배워볼까 하고 접근했는데, 녀석이 꽤 신기한 놈이어서 우린쉽게 친해졌고, 만나면 늘 동양사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훈이가 그리는 그림도 근사했는데 제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놈이라는 게 그림에서 보였다. 건축과에 들어간 훈이가 대학생 때 포천에 전원주택을 하나 설계했는데 꽤 멋졌다. “인마, 니 집 내가 지어줄게.” 훈이가 뻐기는 표정으로 내게 약속했다. MIT 건축대학원에 낸 포트폴리오로 입학 장학금을 받았다는 풍문을 흘리며 훈이는 떠났고 소식이 끊겼다. 나중에 들으니 졸업 논문이 건축과 포르노와 샤머니즘에 대한 것이었다나, 뭐라나. 문훈(이하 문) 고등학교 때 대호는 키는 자그마한 놈이 <주역>을 품고 다녔고, 남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 국악 테이프를 보물처럼 아꼈다. 독실한(난 ‘독실한’이란 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한국말, 어렵다) 크리스천이면서도 속세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빛을 번뜩이는 녀석이었다. 대호는 신기하고 오묘한 녀석이었다. 아, 또 하나. 늘 서성거리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수의사가 되었고 매일 인도 타령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한국에 돌아와서 전해 들었다. 녀석,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구나.


1 대심리에 우주선 같은 집 하나가 들어섰다. 문훈 씨는 네모꼴의 대지에서 시작해, 그 땅에 맞는 네모꼴의 덩어리를 땅에 앉혔다. 그리고 그 네모난 덩어리에 방 세 개, 거실, 주방, 화장실의 자리를 잡고 각 방마다 중정을 만들었다(외부의 중정까지 합해 총 일곱 개). 마치 덩어리 반죽에서 조금씩 반죽 조각을 떼어내듯. 서성거리며 살아온 친구 손대호 씨와 그의 애완동물을 위해 네모꼴의 테두리를 남겨두고, 순환 발코니로 만들었다. 발코니는 건물 위쪽뿐만 아니라 땅과 맞닿은 아래쪽에도 자리하는데, 집이 땅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이 발코니는 집의 힘을 잡아주는 축이자, 바깥 풍경을 액자처럼 잡아내는 틀이기도 하다. 이렇게 뚫린 발코니와 일곱 개의 중정 덕분에 바람의 질서라는 건축적 의미뿐만 아니라 환기라는 기능적 측면도 만족시키게 되었다.

2 우주선의 조타실처럼 생긴 2층 기도실이 집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중정을 둘러싼 거실과 주방은 통창으로 마감해서 자연을 만끽하게 하고,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방수천으로 된 커튼을 발코니 주위로 둘러주었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색 커튼은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보였고 결국 그 커튼은 떼어졌다.

훈이는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고 건축 잡지에 그의 소식이 자주 브리핑되었다. 녀석이 지은 건물을 죽 훑어봤다. 항공모함의 통제실 같은 상상사진관, 까만 스타킹을 신은 마녀들의 은신처 같은 묵동 빌라, 섹스 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일산의 신경외과 병원, <스타워즈>의 동물원 버전 같은 대전동물원…. 사람들은 그 녀석 이름 앞에 ‘에로티시즘 작가’ ‘포르노그래피 건축가’라는 수식어를 매달아주었다. 하지만 난 훈이의 건물을 보면서 ‘하록 선장’이나 ‘우주전함 V호’를 떠올렸다. 어느 날 불현듯 대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와, 역시 수의사인 아내, 장인어른, 장모님이 함께 살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중정과 동물을 키울 수 있는 마당, 그리고 기도실만 있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기도실! 그리고 예산은 1억 5천만 원.

난 사이코다. 난 재미난 사람이다. 그리고 독실한 크리스천이다(이순간, 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이 잡히는데 이걸 어쩌나). 구원의 확신은 뚜렷하지만 행위가 그에 못 미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행하는 믿음이라는 걸 확실히 안다. 난 매일 하나님께 선교 사역을 위해 인도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집 짓기 전에는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했는데, 집 짓기라는 스페셜 이벤트가 마음을 미혹시켰는지 요즘엔 하루에 10분도 안 한다. 역시, 기도를 게을리하면 믿음도 떠난다.

이상하게도 난 하루에 최소한 한 번은 11시 11분에 시계를 보게 된다. 이건 우주인이 나와 소통하려는 계시일까? 혹은 어떤 메시지일까? <홍루몽>의 영어 요약본을 항상 들고 다니지만 3년째 다섯 페이지 이상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책을 들고 다니는 이유는 이 책의 신비한 돌 이야기가 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랐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고두암 아파트 뒤에 아담하고 정감 가는 바위산 꼴뚜바위가 있다. 일이 없을 때 꼴뚜바위를 만들어봐야겠다. 그리고 그 바위 안에 있을 법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봐야겠다.

진중권 씨가 건축가 문훈의 작업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문훈은 건축을 환상과 결합시킨다. 로마의 폐허에서 피어오른 피라네시의 환상이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어 동판화로만 남았듯이, 문훈의 환상 역시 종종 드로잉으로만 존재한다. 또는 그 환상을 실현시키고도 내러티브를 위해 실현된 건축의 앞뒤에 드로잉을 끼워 넣기도 한다. …문훈은 현실의 저항을 피해 환상을 만들기 위해 ‘계략’을 사용한다. 하지만 건축의 앞뒤에 붙은 내러티브는 동강 잘라내고 건물만 제시하면, 현실은 영문도 모르고 그걸 수용하게 된다. 신경외과 건물이 섹스 바를 형상화했다는 건 그의 드로잉을 봐야 드러나는 것처럼. ‘건축주는 모를 것’이라며 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문훈의 치기 어린 익살은 이렇게 물질의 저항을 피해 환상을 현실에 등록하려는 계략이다. 그는 꾀가 많은 자다.” 우와, 훈이 녀석 좋겠다. 이렇게 자신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재미있는 일이 나에게 찾아온 적은 별로 없었다. 모든 건 내가 스스로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팝, 키치, 그래피티는 날 재미나게 하는 것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환상을 풀어놓는 데 즐겨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체. 나는 건축에 여체를 담고, 여체에는 건축을 담는다. 내부에 공간을 품은 건물은 당연히 여성으로 봐야 한다. 내 작업실에 들어가면 통로 옆에 세워놓은 여체-건축 모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람들이 날 ‘에로티시즘 작가’라고 부르나?


1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에는 거울의 질감과 비슷한 스틸을 붙였는데, 겨울에 공사를 해 이 스틸이 울퉁불퉁해졌다. 그런데 오히려 이 울퉁불퉁한 벽이 집과
더 잘 어우러진다.
2 은퇴 후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장인어른과, 주위 사람 눈치 보지 않아 오히려 장인어른과 사는 게 편하다는 사위 손대호 씨.
3 수의사인 손대호 씨의 직업을 고려해 서재 안 침상 아래쪽에 작은 창을 뚫었다. 이 서재 옆이 바로 장군이가 야옹이가 사는 중정이다.
4 방마다 중정을 두었기
때문에 방과 방 사이엔 이런 사이 공간이 생긴다. 욕실 앞의 중정은 수영장으로 쓰인다. 

‘고급 문화 또는 귀족 문화에 대한 가운뎃손가락질, 그 용기의 쾌감.’건축가 문훈의 건축을 묘사한 표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운뎃손가락질! 건설은 하지만 건축은 못하는 나라에 살면서, ‘사상’까진 못 담더라도 ‘스토리’라도 담는 집을 늘 갖고 싶었다. 가운뎃손가락질을 할 줄아는 건축가, 문훈이 내 소원을 조금이나마 이뤄줄 것 같았다.

대호가 구입한 양평 대심리의 땅은 물과 논, 숲과 축사가 적당히 버무려진 곳이다. 땅도 네모반듯하지 않다. 틀에 박힌 사람이 절대로 될수 없는 대호에게 오히려 잘 맞는 땅 같다. 길쭉한 사각형의 땅에 방 넷,주방 하나, 거실 하나, 화장실 두 개를 앉히고 방마다 하나씩 중정을 뚫었다. 네모난 반죽에서 일곱 개의 중정을 뚝뚝 떼어냈다고 생각하면 쉽다. 여전히 서성거리며 사는 대호와 그의 고양이, 개들이 충분히 서성거릴 수 있는 순환 발코니를 만들어주었다. 그들에게 플레이 트랙play track 같은 것이 됐으면 좋겠다. 천국의 문 앞에서 목욕을 한다는 기분좀 내게 해주려고 풀장도 만들었다(녀석이 꿈꾸는 인도 바라나시의 성스러운 물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리고 기도실.

내가 기도실을 바라지 않았어도 조타실처럼 생긴 공중 정자를 하나만들어주고 싶었단다. 질서를 벗어난 공간을 하나 만든다는 건 건축가 에게 즐겁고도 괴로운 모험일 것이다. 인도에선 금색, 붉은색이 태양을 상징한다. 신, 초월자와 나만 존재하는 이 공간에 친구는 금색 기둥과 붉은색 벽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예술 하는 사람들은 눈 감으면 컬러가 떠오른다던데, 진짜일까? 난 눈 감으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고 회개 할 일만 생각나던데.

순환하듯 집을 두른 발코니까지는 좋았는데,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문제가 있었다. 처음엔 발코니 주위로 딱딱한 마감재를 두를까 했는데 예산 때문에 방수천으로 된 커튼을 생각했다.2.8m 높이의 발코니에 커튼 레일을 설치하고 빨간 방수천을 둘렀더니 그 커튼이 바람에 아주 드라마틱하게 휘날렸다(이 동네는 ‘바람골’이라 이름 붙을 정도로 바람이 많다).


5 2층 기도실 내부. 
6 이 집의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다. 여섯 개의 방, 일곱 개의 중정, 그리고 기도실로 오르는 계단. 7 애완동물이 사는 중정. ‘애완’이라는 의미에서 핑크 컬러로 칠했다. 
8 옥수수나무가 울타리가 되는 양평 대심리의 우주선 집.

그 커튼은 하나의 부드러운 벽체 같았다. 바람 부는 날엔 커튼이 마구 휘날려 이 집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묘한 감동마저 들게 했다. 훈이가 그린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를 보니 커튼뿐만 아니라 집의 바닥에서도 빨간 골조가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아니 문훈의 움직이는 성? 그러던 어느 날, 강풍이 불었는데 그 빨간 천들이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마구 휘날렸고, 그 장면을 목격한 식구들(특히 장모님과 아내)이 커튼을 떼버리라고 성화를 했다. 결국 인부 두 명이 이틀 걸려 그 빨간 커튼을 모두 떼어냈다.

그 커튼은 단지 가리개가 아니라 날개였다. 지금은 정처 없어졌지만. 대신 이 집에 양념처럼 쓰인 붉은색에 만족하련다. 이 집에서 불과 관계된 공간은 모두 빨간색으로 칠했다. 조왕신 사시는 부엌(크리스천인 대호 장모님이 아시면 놀라실라), 보일러실, 그리고 신과 통하는 기도실.손 훈이가 그린 이 집의 컴퓨터그래픽을 보고서야 진중권 씨가 말한 ‘물질의 저항을 피해 환상을 현실에 등록하려는 계략’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맙소사! 나의 성스러운 기도실엔 우주복도 벗지 않은 우주인이 앉아 양평의 강물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당에선 우리 장군이와 야옹이가 우주선에 공중 납치되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이 집을 ‘S-마할S-mahal’이라고 떡하니 이름 붙였다. 녀석, 대체 어떤 환상을 심고 싶었던 거야? 나처럼 독실한 크리스천을 앞에 두고. 음, 다음엔 종로에 아내와 단둘이 살 집을 지을 계획인데, 그 집도 훈이가 지어주려나?

수의사인 손대호 씨와 건축가인 문훈 씨 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서로 벌이는 삶의 이벤트가 늘 궁금한 친구 사이다. 건축가 문훈 씨를 두고 ‘유치찬란판타지’ ‘에로티시즘 건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손대호 씨는 친구가 가진 모습이단지 이 수식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극명한 예를 들자면, 그의 포트폴리오 한 면을 장식하는 그림은 ‘정자 위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정열적인 정사’다. 유교적 관습에 갇힌 우리 사회를 향해 오히려 금기적 코드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면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존재하는 그 자체로 모든 걸 보아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에로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사람의 몸속에서 움트는 에너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라고 한다. 여성성에 주목하는 건 그것이 동양의 속성(호전적이지 않고, 모든 걸 포용하며, 감성을 우위에 두는)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틀 밖에 존재하는 세상에 관심을 열어두고 대상을 다르게 보려는 태도. 이것 때문에 문훈은 별나 보이고, 유치찬란해 보일 수 있다. 도사의 면모가 강한 손대호 씨는 “사상은 아직 덜 정리됐지만 스토리는 막강한 건축가, 독특한 건축가”라고 친구 문훈을 표현했다. 문훈 씨는 ‘1인 오피스’인 문훈건축발전소(02-558-7034)를 운영하고 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