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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컬렉터 프리드리히&요하나 그레플링 Friedrich and Johanna Gräfling 예술가와 살고 예술로 짓는 집
아트계를 들썩이게 하는 아트 컬렉터 중에는 부부 컬렉터가 많다. 그만큼 함께 예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세상과 시대를 바라보는 시야와 관점이 주파수처럼 맞춰진다는 일일 터. 그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취미 생활이 공통의 삶 자체가 되었다가, 타인을 위한 헌신으로 전환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미술관을 짓거나 전시를 열어 예술가를 후원하는 등 예술에 ‘진심’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 30대 젊은 부부 프리드리히&요하나 그레플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가와 협업해 달라진 삶과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의 집은 우리가 예술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가와 협업해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아트 컬렉터 부부 프리드리히&요하나 그레플링. 각각 건축과 미술 역사를 전공했다. 이들의 집은 우리가 예술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트 컬렉터의 집을 취재한다고 할 때 예상되는 전형적인 장면이 있다. 거대한 규모의 화이트 캔버스 공간을 만든 후 갤러리에서도 소화하기 힘든 대형 작품을 걸어놓고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발에 차일 만큼 많은 작품을 집 안에 모셔두고 작품 설명을 하고 싶어 안달이거나. 어느 쪽이든지 아트 컬렉터의 집은 치열한 일상의 흔적보다 예술품의 안락한 자취가 더 강하게 느껴지고, 인터뷰 또한 예술품 위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요하나 그레플링 부부의 독일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에 있는 집 풍경, 그들과 나눈 대화는 예술과 삶이 만나는 지점이 때론 예술보다 더 예술적이거나 또는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예술품이란 소유물이 아니라 연결 고리일 뿐이다. 아티스트와 인연을 맺고 그들을 일상으로 초대한 후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의 삶을 통째로 바꾸기 위한 촉발제로 작동한다. 그래서 수집 상황에 따라 그들의 삶도, 공간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그들을 만난 곳은 그들의 네 번째 집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서 깊은 아파트, 예술 아지트 살롱 케네디Salon Kennedy(salonkennedy.de), 도축장을 개조한 쿤스트페어아인 비젠Kunstverein Wiesen(kunstverein-wiesen.de) 다음의 공간이다.


그린 컬러로 물들인 주방은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공간이다.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에서 구한 사암으로 직접 바닥과 주방 상판을 제작했다. 왼쪽 벽의 작품은 프리드리히 쿠나트Friedrich Kunath의 ‘삶은 우선 시간을 가져가지만 그다음에는 시간이 삶을 가져온다(First Life Takes Time, then Time Takes Life)’(2010)와, ‘무제(Untitled)’(2003). 오른쪽 벽의 작품은 프리드리히 쿠나트의 ‘무제(Untitled)’(2003). 조명은 프란츠 웨스트Franz West가 1991년 디자인한 하우스 랑게Haus Lange 램프.
“저희는 작품 수를 늘리거나, 작품을 멋스럽게 배치한 공간에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작품 결과보다 작업 과정이 더욱 궁금하고, 예술가와 협업해 달라진 삶, 새로운 집을 소유하길 원하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반짝이는 영감처럼 상황과 조건이 갑자기 발생하죠. 이곳처럼요.” 프리드리히 그레플링은 1597년 볼프강 폰 달베르크Wolfgang von Dalberg가 지은 비젠성(Schloss Wiesen)의 마구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결혼식을 치른 마구간이 부부의 별장이 되었다. 커다란 현관문 너머로 미니 거실이 보인다. 문을 활짝 열면 성으로 가는 정원 전체가 모두 거실의 일부가 된다. 4백 년 전에 지은 마구간이지만 앞으로 수백 년 이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돌·나무·석회·점토 등 자연 재료로 보수하고, 내부도 스웨덴에서 구한 천연 안료와 아마씨 오일로 마감했다.
성 대신 마구간에 사는 이유
“왜 웅장한 성을 코앞에 두고 마구간을 택했나요?” 열이면 열, 찾아오는 사람마다 물어본다는 익숙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사냥용 로지로 지은, 삼각꼴 지붕과 붉은 벽돌 외관이 인상적인 비젠성 또한 그레플링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고 들은 후였기 때문이다. 

“원래 천고가 5m인 천장의 마구간에서 결혼식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혼식 또한 예술가들이 협업했는데, 이브 셰러Yves Scherer가 꽃꽂이와 케이터링 메뉴 및 텐트 공간 등 전체 분위기를 맡고, 마이클 세일스토퍼Michael Sailstorfer가 무대를 디자인하고,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Christian Jankowski가 웨딩 비디오를 찍었죠. 그렇게 식을 끝내고 나니 이곳만큼 저희 부부에게 큰 의미로 남을 장소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별장으로 활용하자 싶어 건축가인 저의 재능을 좀 발휘했죠.”


블루빛이 강렬한 게스트룸. 볼프강 틸만스의 ‘섬광’(2010)과 토마스 사라세노의 ‘끝없는 시리즈’(2006)를 나란히 걸었다. 아치형 천장 모티프에 영감을 받아 곡선 디자인을 첨가한 침대, 사이드 테이블은 직접 제작했다.
왼쪽 벽에 숨어 있는 작품은 헬렌 마틴의 ‘민티Minty’(2010), 자동차 모양 조명은 멤피스 밀라노Memphis Milano의 마르티네 베딘Martine Bedin 슈퍼 램프, 강렬한 블루 컬러 의자는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의 아모에베Amoebe 하이백 체어.
막상 결정을 내리자 주거 공간으로 부적합한 요소가 눈에 보였다. 첫째, 건초 더미가 뒹구는 바닥과 벽 틈 사이로 전해지는 한기. 둘째, 공간마다 각각 다른 바닥 높이와 천장. 셋째, 썩어가는 목재 서까래.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아내가 한마디 던지더군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인 거 아니야?’라고요.” 작품을 보고 세상의 논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초월적인 감동을 받은 순간처럼 그의 머릿속에 설계 도면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건초 보관 장소이던 2층에 부부 침실과 욕실을 배치하고, 건초 더미에 포근하게 싸여 자는 듯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바닥을 지붕 가까이까지 높였다. 매몰식 구조로 침대 매트리스를 집어넣었는데, 땅속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든다.


바닥과 천장 높이가 다른 공간은 전체 인테리어를 차별화한 후 다른 목적의 공간으로 구별했다. 썩어가는 서까래는 교체하지 않고 적절히 보수한 후 그 자체가 인테리어 포인트가 되도록 컬러를 더했다. “작품보다 저희 삶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페인트 대신 스웨덴에서 구한 천연 컬러 안료를 석회에 섞은 후 염색하듯 점진적으로 벽에 흡수시켰고, 바닥에는 화학 코팅제 대신 아마씨 오일을 여러 차례 발랐죠. 컬러를 칠한 공간은 현대적으로 개조한 곳이고, 백색 공간은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곳입니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건축 과정 또한 공간 분위기의 일부가 될 수 있었죠.”


다이닝룸을 밝히고 있는 샹들리에는 베를린 공화국 궁전에 걸려 있던 것. 다이닝 테이블과 의자는 독일 공장 회의실을 위해 예르겐 카스톨름Jørgen Kastholm이 디자인한 것이다. 테이블 위 멤피스 밀라노의 포테이토 트레이, 세바스찬 헤르크너Sebastian Herkner의 트리콜로레Tricolore 꽃병, 철제 선반 위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가 1981년 디자인한 타히티Tahiti 테이블 램프는 멤피스 밀라노 제품. 알리차 크바데, 조나탕 비네Jonathan Binet, 하인리히 쿤Heinrich Kühn, 볼프강 틸만스,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 등의 작품이 공간을 감싸고 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마구간만의 특징이 어떻게 삶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응용되었는지 눈에 드러났다. 현관문의 세 배가 넘는 대문은 거실을 성 안뜰까지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5m 천장 높이의 책장과 붙박이 옷장은 그대로 벽이 되어 공간을 구분한다. 돌과 나무만 사용하겠다는 그의 원칙은 주방에도 반영되었는데, 사암(sandstone)을 구해 직접 재단하고 접착했다. 그렇게 4 백여 년 전에 지은 마구간은 지속 가능한 건축을 위한 노력 덕분에 수백 년 이상의 수명을 얻었다.


책장은 메인 거실을 구분하는 벽이 되어준다. 책장 곳곳에 아트 작품이 숨어 있다. 왼쪽부터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가 1984년 디자인한 사이드 테이블 플라밍고Flamingo, 1982년 디자인한 사이드 테이블 크리스털Kristall, 1981년 디자인한 테이블 램프 오시애닉Oceanic은 모두 멤피스 밀라노 제품. 이탈리아 건축가 치니 보에리의 소파 브리가디어, 둥근 라운지 의자는 핀란드 가구 디자이너 에로 아르니오의 초기 버전 볼 체어. 테이블 위 에토레 소트사스의 스칼리노 컬렉션 꽃병 542.
예술과 공간 사이의 느슨한 조화
그렇게 건축적 한계를 가능성으로 승화시킨 바탕을 완성했으니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을 채워 넣을 차례. 컬렉터 대부분은 예술품을 먼저 배치한 후 그에 따라 삶의 터전을 마무리하지만 부부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동선에 따라 잘 보이는 곳, 어쩌다 보이는 곳, 일부러 들여다봐야 하는 곳을 구분하고 공간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을 들어본 후 피아노를 조율하듯 적절한 위치에 두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하나의 방에는 오직 한 작가 또는 비슷한 음역대를 지닌 작가의 작품만 걸고자 했다.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의 풍선 설치 작품을 침실 가득 펼쳐놓은 적이 있는데, 기계 오류로 인한 풍선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쳐야 했어요. 예술 공간을 작업할 때는 예술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지만 집은 달라요. 예술이 공간을 압도하고 일상을 침범한다면 그건 아름다운 감옥에 불과할 겁니다. 예술과 삶이 느슨한 상태로 연결되어야 오랫동안 서로 함께할 수 있어요.” 


핑크 컬러 벽과 천장이 포근한 느낌을 더하는 침실. 원래 건초를 보관하던 장소로, 건초 더미에 포근하게 싸여 자는 듯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바닥을 높이고 매몰식 침대를 설치했다.
침대처럼 바닥을 파서 만든 매몰형 욕조에 들어가 앉으면 창문을 통해 성이 보인다. 벽에 요린테 포크트와 로르 프루보스트 작품이 어긋나게 걸려 있다. 천장 조명은 마테오 툰Matteo Thun이 1983년 디자인한 산타 아나Santa Ana 램프로 멤피스 밀라노 제품.
그가 말하는 느슨한 관계란 컬러, 디자인, 주제, 작품명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연결 고리로 공간과 작품을 묶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루 컬러가 가득한 방에 하늘빛을 담은 사진작가 토마스 사라세노의 ‘끝없는 시리즈(The Endless Series)’와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의 ‘섬광(Skylight)’을 사이좋게 마주 보도록 놓거나, 욕실에 핑크 컬러로 궁합을 맞춘 요린테 포크트Jorinde Voigt와 로르 프루보스트Laure Prouvost의 작품을 멀찍이 걸어두는 식이다(욕실이니 서로 부끄러운 관계가 좋을 것 같다며).


작품명 ‘당신의 시선을 느끼다(Feeling Your Gaze)’를 보자 그의 직관적 유머에 피식 웃음이 났다. “유머는 진지함의 또 다른 말이죠.” 헬렌 마틴Helen Marten의 작품은 벽인지 작품인지 헷갈리도록 일부러 숨겨놓았다. “예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단순히 벽에 무언가를 걸어두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 전체에 몰입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마구간 뒤편 성의 허브 정원과 연결된 테라스. 종종 사람들을 초대해 아트 후원 파티를 연다. 현재 부부는 아트 컬렉터를 위한 집을 디자인하고, 시골 마을을 예술 공간으로 재생시키는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컬렉팅은 도입부일 뿐
그들의 수집 대상에는 디자인 가구도 있다. 특히 부부는 가구와 오브제에 만화적 형태, 대담한 패턴 등을 사용함으로써 디자인계를 뒤흔든 급진적인 멤피스 그룹 덕후다. 이와 함께 시대는 다르지만 내러티브를 이루는 이탈리아 건축가 치니 보에리Cini Boeri의 소파 브리가디에르Brigadier, 핀란드 가구 디자이너 에로 아르니오Eero Aarnio의 초기 버전 볼Ball 체어도 구입했다. 예술 작품으로는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 베네딕테 비에르Benedikte Bjerre, 알리차 크바데Alicja Kwade, 그레이스 위버Grace Weaver 등의 신작을 택했다.

부부가 주목하는 작가는 눈을 크게 뜨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시대를 작품에 담아낼 줄 아는 진지한 예술가다. 한 작가의 아카이브를 꾸준히 구입하는 식으로 그들을 후원한다고. “새롭게 아티스트를 발굴할 때마다 집으로 초대합니다. 자연스럽게 저희 공간도 보여주고요. 그렇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작가가 생각하는 집 풍경이 그려지죠. 그런 공간으로 다시 집을 옮겨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죠.(웃음)” 예술가의 말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아티스트 마이클 세일스토퍼와의 만남이다. 그는 집을 파괴하는 일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했고, 부부는 실제로 그에게 집을 부수도록 허락했으며, 그 장면을 비디오 작품으로 만들었다.

“보통 컬렉터는 작품 소유가 결말이지만, 저희에겐 그것이 도입부예요. 예술가들이 저희 일상에 침범해 삶과 공간을 뒤흔들기를 바라죠. 나아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함께 만들었으면 하고요.” 평범한 척 하지만 이들이 비범한 컬렉터라는 점은 마지막 답변에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가장 애착이 가는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으로 아티스트 말테 첸제스Malte Zenses가 몸에 그려준 타투 작품과 알리차 크바데가 만들어준 약혼 반지를 선택한 것. 분명 그들의 삶은 예술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사진 Christoph Theurer | 취재 협조 grafling.org

글 계안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