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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판교 가을날에 새겨진 가벼움의 미학
에르메스의 윈도 디스플레이는 작은 예술 전시장이며 이야기가 있는 무대다. 현대백화점 판교점 매장 오픈을 기념해 에르메스가 한국의 가을 속에 올해의 테마 ‘가벼움의 미학’을 수놓았다.

최재은 작가가 투명하고도 다층적인 이미지의 유리를 활용해 표현한 가벼움의 미학.
에르메스의 ‘창(window)’은 언제나 정교하고도 세심한 장인 정신에 대한 경의를 내포한다. 이 창은 브랜드가 지닌 철학과 문화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매년 프랑스 본사가 결정하는 테마로 동시대의 예술가 및 디자이너와 협력해 새로운 시각을 지닌 창의적인 촉매 및 플랫폼으로 사용된다. 이런 이유로, 에르메스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매장을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이번엔 어떤 윈도 디스플레이를 펼쳐낼지 큰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기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10월 초, 예술과 판타지 그리고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을 오롯이 담은 새로운 윈도 디스플레이가 공개되었다.


판교라는 지명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유리 다리 설치 작품.
현대백화점 판교점 에르메스 매장. 서정적이고 세심한 분위기의 레이아웃과 디스플레이가 빛을 발한다.

에르메스, 판교를 건너다
에르메스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첫 번째 창을 수놓은 주인공은 최재은 작가다. 그녀는 반 시게루와 협업해 시간과 공간, 자연과 인간이 쓴 역설적 텍스트로서 DMZ를 건축언어로 풀어낸 ‘꿈의 정원’을 펼쳐낸 바 있다. 생명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조형성을 함축한 선택된 공간과 소재를 대립시켜 무한에 부딪치게 하는 작업이 주를 이루는 그는 이번에 ‘에르메스, 판교를 건너다’를 주제로 한 작품을 네 개의 윈도에서 선보였다. 소재와의 연관성을 표현해온 최재은 작가는 에르메스의 올해 주제인 ‘가벼움의 미학(lighthearted!)’을 표현하기 위해 유리에 천착했다.

에르메스가 새롭게 자리한 판교板橋라는 지명이 널빤지로 놓은 다리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영감을 받아 모서리를 쳐낸 유리를 겹겹이 쌓아 만든 다리를 표현했다. 아스라이 포개진 유리가 반짝이며 저마다의 내력과 기억을 지닌 개성 강한 에르메스 슈즈들이 판교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건너오는 풍경은 탄성을 자아낸다. 오프닝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이 스페셜 윈도는 내년 1월 말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바다를 주제로 감태를 커튼처럼 드리운 설치.
들꽃과 풀이 가득한 들판에 뜬 보름달을 형상화해 송편과 꿀떡을 종이 접시에 담아냈다.
조약돌을 접시 삼아 버섯요리와 샐러드를 올려 놓아 자연 속에서 음식을 발견하는 듯한 재미를 주었다.
최재은 작가와 함께한 윈도 디스플레이 옆 파사드 벽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라믹으로 만든 작은 원통 오브제 수백 개가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설치되었는데, 이 원통에 그려진 색채는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빛의 그러데이션을 묘사하기 위해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했으며, 우리나라의 설화인 칠석七夕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전 세계 매장마다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경외를 담고 동시에 공예와의 접점을 연결함으로써 에르메스의 건축적 코드를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에르메스의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매장 유리 전면에 설치한 그러데이션 실크 패널과 매장 내부의 가구에도 한국의 전통 요소가 반영되었다. 그리스풍 조명, 입구를 장식하는 엑스-리브리스ex-libris 문양과 전통 수공예 모자이크를 포함한 에르메스의 상징적인 건축적 요소가 서정적 분위기를 풍기는 핸드 페인팅 벽, 남성복 및 여성복 컬렉션 공간의 한국 전통 수방사 소재로 제작한 벽지 등 곳곳에서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뒷산으로 이어지는 정원 속 모닥불 화덕은 에르메스와 푸드 디자이너 페피가 함께 연출한 프레젠테이션의 대미였다.
한국의 가을을 상징하는 볏짚 위에 가을 간식을 올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에 대한 찬미를 보냈다.
한국의 자연과 가을을 담은 푸드 시노그래피
판교가 IT와 신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에르메스는 판교점 오픈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서 오히려 이와 상반되는 개념인 자연과 장인 정신을 더욱 부각했다. 용인의 작은 산자락에 자리한 공간에서 프랑스의 푸드 디자이너 페피 드 부아시외Pepi de Boissieu와 함께 올해 테마인 ‘가벼움의 미학’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합된 콘셉트의 케이터링을 구성한 것. 바다, 덤불, 가을 들판, 목초지, 모닥불 등 다섯 가지 테마로 나눈 공간. 커튼처럼 드리운 감태, 이끼와 조약돌 위에 올린 버섯 요리, 볏집 테이블 위에 올린 곶감과 단호박 수프와 말린 과일, 꽃 들판 옆에 뜬 보름달 안에 숨긴 송편과 꿀떡, 그리고 뒷산의 산책로와 이어지는 야외 가든에서 따뜻하게 피워놓은 모닥불가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즐기는 구운 채소와 쇠고기 바비큐. 페피가 우리나라 음식을 활용해 연출한 시노그래피는 에르메스만의 시적이며 우아한 서정을 전달했다. 공간을 채운 자연물과 테이블, 집기, 음식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연출한 공간 속에서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의 온전함을 살린 다양한 음식을 보고, 느끼고, 즐기며 새로운 미식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글 강보라 | 사진 박찬우, 에르메스 제공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