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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라이프 한옥 감성 담은 집 정고재
밝은 빛과 윤택함이 있는 집, 정고재晶㚖在. 1990년생 동갑내기 부부의 가장 현재적 삶을 담은 우리의 집이다.

보통 다용도실에 두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주방 안에 배치해 ㄷ자형 리빙 존 완성. 아일랜드와 식탁 사이에 가벽을 설치하고 상단은 액자 프레임으로 오픈해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식탁 위 조명등은 라이마스 제품. 노먼 포스터가 디자인한 테크노사의 노모스 테이블은 직구로 구입하고 강화유리 상판을 따로 제작했다.

창을 내기 어려운 곳은 가짜 창 ‘거울’을 활용해 또 다른 풍경을 즐긴다.

코너장 위에 민화와 모빌을 장식했다. 꿀단지를 그린 민화는 김경희 작가 작품.
멀티 페르소나, 일명 ‘부캐 현상’은 더 이상 유명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근무시간과 퇴근 후의 삶, 온라인과 오프라인 속 캐릭터를 이분화하는 것을 넘어 많은 사람이 일과 삶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여러 개로 나누며, ‘부캐’를 통해 이웃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생활 속에서 더욱 유연하게 나타나는데, 집 역시 하나의 캐릭터로 기획해 개인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1990년생 동갑내기 부부 최정선·신우택입니다. 저는 핀테크 기업의 마케팅팀에서 브랜드 전략 콘텐츠 기획 업무를 하고 있고, 남편은 금융회사의 복잡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최선의 수를 찾는 업무를 하고 있어요. 각자의 회사 생활에도 충실하고 싶고, 이와는 별개로 저희의 취향과 집에서의 삶, 그리고 앞으로 우리 부부를 넘어 가족의 삶에 대한 시선을 얘기하고 싶어서 ‘안경혜’ ‘안경태’라는 제2의 페르소나를 만들었어요.”

아파트에 불어넣은 #한옥감성 #코리안빈티지
인스타그램 계정 ‘안경, 혜(@ahnkyoung_hye)’는 한옥을 연상케 하는 따뜻한 무드의 공간 이미지로 가득 채워졌다. 과거 피드를 살펴보면 간간이 안경 사진이 눈에 띈다. “아버님이 남대문에서 안경점을 하세요. 수십 년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빈티지 안경부터 손수 만드신 수제 안경까지 저희 눈에는 보물같이 귀한 것들인데, 그저 옛날 물건으로 치부되는 게 안타까웠어요. ‘안경혜’는 안경집 며느리로서 아버님, 어머님의 지난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예요. 안경집 며느리와 아들이 사는 집, 정고재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죠.”

‘밝은 빛과 윤택함이 있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정고재는 본명 최정선, 신우택의 한자어에서 한 자씩 따온 이름으로 (‘㚖’가 광택 고, 윤택 택으로 읽힌다), 부부가 이 집에 살면서 하나씩 이뤄나갈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정고재의 콘셉트는 ‘우리다운 집’. 한옥 감성과 코리안 빈티지는 집을 구성하는 톤 앤 매너이자 모티프다. “어릴 때부터 한옥을 좋아했어요. 한옥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옥의 요소를 떠올리면 막상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싫다는 이중적 감정이 있었죠. 오늘날 가장 보편적 주거인 아파트라는 공간에 한옥의 감성을 불어넣되, 불편함이나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양개문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오동나무 반닫이는 결혼할 때 혼수로 장만한 것. 가벽 맞은편으로 화장대, 드레스룸(나무 문), 안방 화장실이 나란히 자리한다.

남편이 다섯 살 때부터 쓰던 책장. 나무 가구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양개문을 열고 닫을 때 나는 주물 손잡이의 달그락 소리에서 한옥의 정겨움을 경험할 수 있다.

‘조명맛집’으로 불릴 정도로 공간마다 두세 개씩 매치한 조명등이 아늑한 무드를 자아낸다. 거실 한쪽에 소반을 쌓아 테이블 램프를 올리니 조형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매우 만족. 나무 소재와 스틸 소재가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가 매력을 배가한다.

대들보, 서까래, 살문 같은 한옥의 디자인 요소보다는 열리고 닫히는 공간 구성과 아늑한 분위기 등 한옥의 기능성과 경험적 감성을 접목한 정고재. 가장 내밀해야 하는 침실은 가벽을 설치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되, 부분적으로 창을 내 단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실 안에서 가벽을 바라본 모습.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드리우는 느낌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무드를 즐길 수 있다.
최정선 씨는 대들보와 서까래 같은 한옥의 조형 요소를 디자인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한옥의 고유한 기능과 경험적 가치를 적용했다. 안채에 들어가기 위해 당겨서 여는 양개문, 공간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구분하되 단절감을 주지 않는 가벽과 창 등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한옥의 경험적 감성 요소다. “마치 안채를 구분하는 대문처럼 양개문은 안방과 드레스룸 등 사적 영역을 거실과 구분해주는 중문 역할을 해요. 문을 열었을 때 침실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침실 중간에 가벽을 설치하고, 상단에 창을 내어 액자 효과를 냈죠. 주방의 ㄷ자형 작업 존과 식탁 사이에도 가벽을 설치하고, 상단을 우드 프레임으로 오픈하니 답답해 보이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돼요. 아파트 단지에서는 집 밖으로 탁 트인 자연을 보기 힘들잖아요. 외부 풍경이 좋지 않을 때는 이렇게 공간과 공간 사이에 창을 내 햇빛이나 조명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는 ‘집 안’ 풍경을 즐기는 것도 방법이에요.”

전통 건축에서 쓰는 차경借景(바깥 경치를 빌린다)과 자경自景(자체 경치로 풍경이 되다)의 개념을 현실 주거에 적용한 좋은 예다. 현관 앞, 안방 양개문과 마주하는 자리에 전신 거울을 둔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실제 양개문과 거울 속 양개문이 중첩되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 조도의 유무에 따라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매일 아침, 제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요. 욕실과 화장대, 드레스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가벽 액자 창 너머로 아직 자고 있는 남편의 숨소리를 듣는데, 저만 느끼는 소통의 순간이에요.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적절히 분리하면서 또 소통하는 이런 구조를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취미로 민화를 배우고 싶어 만든 그림방.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무명 커튼 너머로 종일 햇살이 들어온다.

안방과 거실을 분리해주는 양개문. 양개문 라인에 맞춰 안방에 가벽을 설치하니 30평형대 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긴 복도 라인이 생겼다.
매일의 기록
시공은 아파트멘터리의 리모델링 서비스인 파이브Five(도배, 바닥, 필름, 조명, 타일 다섯 가지 공정에 집중하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온라인으로 견적을 받은 후 담당 매니저와 예산에 맞춰 세부 상담을 하는데, 실내 건축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공간 구성부터 원하는 이미지의 레퍼런스까지 2백 쪽의 기획서를 만들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다 해주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있지만, 예산도 부족했고 왠지 휘둘릴 것 같았어요. 지은 지 10년 정도 되는 이 아파트는 고쳐야 할 부분도 있지만 굳이 뜯어내지 않고 남겨야 할 부분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거실 아트월은 주방의 무광 도어와 이질감이 느껴지면서 포인트가 될 것 같았고, 화장실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었어요. 가성비 좋은 시공 플랫폼을 활용하되, 가구와 조명 등으로 우리의 취향을 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죠.” 집 안 곳곳에 놓인 전통 가구와 소품, 조명등도 정고재의 관전 포인트다. 양개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오동나무 반닫이는 혼수로 장만한 것.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서 혼인할 때 장을 만들어줬다는 전통의 의미를 잇고자 제작한 반려 가구로, 친정어머니와 함께 남원의 장인을 찾아가서 의뢰했다.

안경혜, 안경태라는 부캐로 한옥 감성을 담은 아파트 '정고재'에 사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동갑내기 부부 최정선· 신우택 씨. 부부에게 집은 지극히 개인적 공간이면서 취향과 감성, 최근의 관심사, 철학까지 드러내는 하나의 복합적 표현 매체다.
“서재에 있는 책장은 남편이 다섯 살 때부터 쓰던 가구예요. 결혼해서 분가한 뒤 아버님, 어머님이 버리려고 현관에 내놓은 걸 보고 남편과 이고 지고 해서 가져왔어요. 남편의 작은 역사잖아요. 시간이 지나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아빠의 가구라고 보여줄 수 있는 건 특별하지 않은 우리에게 굉장히 특별한 의미가 될 것 같아요.” 아르테미데의 디오스쿠리와 라구나, 이케아의 심리스함과 파도 등 둥근 형태의 조명등은 마치 보름달처럼 보고만 있어도 푸근하고 공간에 온기를 전하는 일등 공신이다. 골똘히 생각 중인 철학자를 연상케 하는 톨로메오 플로어 램프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제품으로, 안방에서 거실로 옮겨 놓으니 바실리 체어와 함께 자연스레 책 읽는 공간이 됐다.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잖아요. 주말에 가구와 소품을 이리저리 옮겨보면서 리프레시해요. 큰 가구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손으로 가볍게 스케치까지 한 후 실행에 옮기죠. 이 집에 산 1년 반 동안 지금까지 소파 자리만 다섯 번을 바꿨어요. 이렇게 가구 배치만 달라져도 공간을 새로운 관점으로 즐길 수 있어요.”

부부에게 집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쉴 수 있는 공간이자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드는 동력. 산다(live)는 것과 살아나가는 것(survive)이 다른 의미임이 더욱 절실히 와닿는 요즘이기에 부부는 집에 대한 기록을 더 많이, 더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한다. 매일매일의 집에 대한 생각과 감정, 나와 ‘우리’의 경험과 사유에 관한 것이다. “자기 전 불을 다 끄고, 마지막으로 양개문을 닫고 들어와요. 문을 닫으면 달그락 소리가 나는데,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그 소리를 들으면 정말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들죠. 가끔 집에 온 손님들이 어떤 부분이 한옥 감성인지 묻는데, 사실 저와 아내는 살면서 매 순간 느껴요.”

글 이지현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