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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베이션 스토리 300호 설경을 품은 집
이동과 외출에 제약이 생긴 시대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않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더 높은 밀도를 요구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상적 주거의 방점은 ‘자연’에 있다. 집에 있는 시간과 비례해 자연에 대한 욕망이 우상향 그래프로 수직 상승하며 집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자연을 소유하는 일이 최고의 사치로 여겨진다. 서래마을 서리풀공원의 숲을 마치 공간에 액자처럼 품은 백난희 씨의 주거가 좋은 예다.

간살문 사이로 300호 설경을 품고 있는 거실. 창밖 풍경이 주인공이 되도록 벽과 바닥, 조명 박스 등 최대한 미니멀한 바탕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에이드리언 피어솔Adrian Pearsall이 디자인한 플랫폼 소파와 피에르 잔느레의 빈티지 라운지체어, 오게 크리스티안센Aage Christiansen의 셸 체어는 빈트 갤러리에서 구입. 소파 테이블과 협탁, 플로어 램프는 모두 20~30년 전부터 사용하던 프랑스 클래식 가구로 공간에 맞춰 재배치했다.

숲을 담은 265㎡ 빌라
“준공하고 19년째 쭉 살아온 집이에요. 살면서 필요한 부분은 조금씩 부분 리모델링 했는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유독 집의 못난 부분만 보이더라고요. 저층부라 왠지 더 어두운 것 같고, 시간 차를 두고 하나둘 모은 가구들은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어수선했죠. 이사를 할까 레노베이션을 할까 고민하던 중 김혜영 실장님을 만났어요.” 공간 설계에 베이스를 둔 체크인플리즈스튜디오의 김혜영 실장은 백난희 씨와의 첫 미팅 때 집의 가능성을 읽었다. 거 실의 통창 너머로 숲이 마주하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 얼마든지 사계절 전망을 즐길 수 있고, 저층부의 안정감은 이 집 고유의 편안한 무드를 완성해주는 요소였다. 클래식한 가구와 미술 작품, 자연석 느낌의 타일과 우드 마감은 집주인의 취향을 읽을 수 있는 단서로, 마치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일관된 감성이 담겨 있었다.

결혼 전 엄마가 살던 공간, 사용하던 가구와 친구가 된 아이들. 현관에 걸려 있던 하인두 작가의 작품에서 집주인의 취향을 읽은 디자이너는 가족의 역사가 담긴 클래식 가구와 시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빈티지 가구를 조화롭게 연출했다.
“무엇보다 거실 중앙에 자리 잡은 전면 창을 주연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매일매일 스스로 변화하는 풍경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너스 같은 일상이니까요. 내부는 자연을 담담하게 담을 수 있는 배경지 역할을 하도록 군더더기를 덜어낸, 최소의 디자인으로 방향을 잡았죠.” 김혜영 실장은 가운데 통창을 기준으로 양 옆에 작게 분할된 창호를 간살문으로 가리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너무 크고 가까워서 부담스럽던 숲 풍경이 프레임 안에 액자처럼 들어가니 말 그대로 배경 아닌 작품이 됐다. 현관에서 마주 보이는 막힌 벽을 털어내고 유리문을 달아 다용도실, 다이닝룸의 베란다까지 순환 동선으로 구성한 점 또한 인상적이다. 꼭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다용도실과 베란다를 통해 주방과 다이닝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이디어로,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도록 타일로 마감해 마치 작은 숲길을 산책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순환 동선은 거실 왼쪽 서브 존에도 적용했어요. 직장에 다니는 아드님과 결혼해 출가한 따님이 사용하던 방이 나란히 배치된 구조였는데, 방과 방 사이의 벽을 허물고 목재 중문을 설치해 한쪽 방은 가족실로 활용해요. 복도에서 반투명 유리문을 통해 가족실, 아드님 방이 순환되는 구조로 다소 폐쇄적이던 각각의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했지요.” 반투명 유리로 마감한 방문과 창문은 대형 평수에서 생길수 있는 빛의 사각지대에 자연스러운 채광을 들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하는 어두컴컴한 드레스룸이 내내 신경 쓰였다는 디자이너는 닫힌 벽 일부를 뚫어 목재 창으로 마감했다. 이사하고 손주들이 제일 먼저 알아본 디테일로, 환기하기 위해 열어두면 자연스럽게 턱이 생기면서 인형과 피겨를 장식하는 디스플레이 공간이 된다.

디테일의 정수가 느껴지는 주방. 선과 면의 오차를 1mm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철저하게 체크했다. 왼쪽 작은 문 너머로 다용도실(세탁실)이 있고 현관과 연결되는 구조. 아이들은 이 순환 동선을 빙글빙글 돌며 놀이로 즐긴다.

현관은 자연석 느낌을 살린 가로 비율의 타일을 깔아 실내지만 외부 돌바닥을 걷는 느낌이 나도록 했다. 영국 여행할 때 빈티지 마켓에서 구입한 나무 스툴을 현관에 두니 따뜻하게 첫인상을 만들어준다.

히스토리가 있는 가구를 간직하는 것에서 집 설계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로젝트. 암체어는 커버링할 원단을 고를 때 고민이 많았는데, 가지고 있던 작품과 컬러 톤이 맞아 마치 세트처럼 잘 어우러진다.

삶의 단면과 취향의 퍼즐을 맞추는 ‘집의 시간’
이 집의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메인 침실 맞은편에 구성한 욕실이다. 욕실이 닫힌 공간으로 머무는 것이 늘 아쉬웠다는 디자이너는 기존 욕실과 작은 방을 합쳐 샤워 부스와 세면대, 오픈 욕조와 가족실을 나란히 구성했다. “첫 미팅 때부터 따님과 손주들을 만났어요. 공간 곳곳에 놓인 가족사진과 가족의 시간이 축적된 오래된 가구들이 인상적이었죠. 아이들이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 할머니는 파티션 너머 테이블에 앉아 바느질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욕실을 디자인했어요. 원형 테이블은 원래 식탁으로 사용하던 건데, 손녀 서희가 어른이 되면 이 식탁을 꼭 물려주라고 말씀드렸죠. 집을 고치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가구는 으레 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구에 깃든 스토리를 존중하고, 이어나가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것 역시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실의 3인 소파와 거실의 라운지체어, 안방의 암체어 등 프랑스·미국의 클래식 가구는 단색 패브릭으로 커버링하고, 형태의 아름다움만 살려 공간 곳곳에서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국에서 공수한 나무 스툴은 현관 앞에 두니 신발을 신고 벗을 때 편리한 것은 물론 집의 첫인상을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전부 이전부터 봐온 그림과 가구인데, 이렇게 새 자리를 찾으니 참 다르게 느껴지죠? 공간도, 가구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 못났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장님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이 가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는지 하나하나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열등감이 해소되는 것 같았어요. 지금도 꽤 괜찮다고, 충분히 멋지다고 인정받는 느낌이랄까요?”

손맛이 느껴지는 이탈리아 마라치사의 젤리제 타일로 차분한 무드를 완성한 욕실. 마치 호텔 스파처럼 샤워 부스와 세면대, 오픈 욕조와 가족실을 함께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파티션 상단에 오픈할 수 있는 창문을 구성해 자연 채광을 받으며 반신욕을 즐길 수 있다.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다이닝 공간. 딸 내외와 손주들, 남편, 아들이 함께 식사할 때가 많아 8인용 테이블을 뒀다. 식탁등은 비비아 제품, 벽부등은 샤를로트 페리앙이 디자인했다.

현관부터 복도, 거실을 지나 숲 풍경을 마주하기까지 시각적으로 튀는 부분 없이 담담하길 바랐다. 벽 마감은 화이트에 미세한 그레이, 그린을 섞어 원목 마루와 차분하게 조화를 이룬다.

베란다 중문은 식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중간 라인을 생략했다. 분체 도장으로 마감해 기성품에는 없는 컬러감과 비례를 완성한다.

메인 욕실 옆 드레스룸도 자연 채광을 들이기 위해 벽의 일부를 털어내고 창을 달았다. 창 너머로 다이닝룸의 베란다, 다용도실, 현관이 산책로처럼 길게 이어진다.

현관에서 왼쪽 가장 끝에 자리한 아들 방과 거실, 메인 침실까지 서리풀공원의 숲을 조망할 수 있다.
백난희 씨는 집을 고친 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밥을 짓고 청소하고 집을 돌보는 일이 너무 즐거워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싶지 않다면서. 공간으로 인해 삶의 방식과 태도 또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레노베이션 후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은 주방이다. 촬영일에도 <행복> 취재팀을 위해 팥밥을 짓고 쇠고기명란뭇국과 달걀찜, 보리굴비, 제주톳나물, 무나물, 김장 김치 등을 뚝딱 차려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근처에 사는 손주들이 놀러 왔고, 아이들은 주방에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익숙한 듯 현관에서 바로 주방으로 들어와 그 곁을 빙빙 돌며 뛰논다. 환대가 그리운 비대면 시대에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따뜻한 장면. 어려운 때일수록 삶의 기본을 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시작은 집에서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촬영일에는 근처에 살고 있는 딸 문정아 씨와 손주 서희(10세), 용재(6세)가 놀러 왔다. 정아 씨는 레노베이션을 계획하고 첫 미팅부터 함께한 든든한 조력자다.
“이사하고 추가 가구가 들어간 날도, 러그와 커튼 등 추가 패브릭 미팅으로 이 집을 찾은 날도 이렇게 꼭 밥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이 바뀌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고맙다고 몇번씩 말씀하시죠. 사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겠어요? 제가 만든 건 일부에 불과해요. 어머님이 수십 년간 쌓아온 취향의 맥락이 훨씬 더 논리적이고, 견고하죠. 이번 작업을 하면서 채워진 게 더 많아요.” 모든 것을 뜯어내고 새로 단장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집은 쇼룸이나 모델하우스와 다르다. 주거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언어는 자연스러움.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 부드럽게 들어오는 빛처럼 사용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장치가 소곤소곤 말을 거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혜영은 케이디에이그룹과 투래빗디자인 등에서 실무를 익히고, 2015년 인테리어디자인 설계 전문 체크인플리즈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설계와 디자인, 시공까지 직접 진행하며 단순히 스타일링에 치중하는 게 아닌, 구조적 관점으로 인테리어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메종드음메’ ‘오밀조밀하우스’ ‘힐사이드테라스’ ‘덩치네하우스’ 등 개개인에 커스터마이징한 주거 프로젝트와 산수화 티 하우스를 진행했고, 현재 프랑스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글 이지현 | 사진 박찬우 | 설계와 시공 김혜영 by 체크인플리즈스튜디오(www.checkinnplzstudio.com)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