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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아니고 ‘함께’ 세 가구가 사는 풍년빌라
여기, 함께 살기를 꿈꿔온 세 가구가 있다. 서로 조금씩 나누고 각자의 공간을 확장하며 새로운 주거 형태를 실험하는 사람들. 풍년빌라는 이들과 건축가 김대균의 섬세한 합작품이다.


풍년빌라 1층에 위치한 임태병 소장 가족의 거실은 세 가구 모두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늘 음악과 커피 향, 사람의 온기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거실 맞은편에는 주방이 자리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친구들끼리 함께 사는 집이 등장한다. 방이나 층으로 공간을 나눈 채 서로 독립적이면서 공동체적 일상을 꾸리는 친구들.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타인처럼 적당히 서로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삶. 상황이나 이유야 각자 다를 테지만, 이런 형태의 공동 주거는 대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꽤 합리적(심지어 로맨틱하기도 한) 대안처럼 보인다. 건축가 임태병에게도 그런 꿈이 있었다. 과거 홍대 인근에서 ‘비하인드’란 카페를 운영한 그는 이른바 ‘비하인드 네트워크’의 여러 친구와 모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진행해왔다. 그중 하나가 하우스 셰어링이다. “당시엔 그저 막연하게 꿈꾸던 일이었어요. 큰 집을 얻어 같이 살아볼까, 아예 집을 한 채 지어볼까,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봤죠. 몇몇 이와 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고요.” 번번이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히며 오래도록 표류하던 프로젝트는 드디어 2017년 좋은 투자자와 만나며 현실적인 접점을 찾았다. 임 소장은 세 가구, 여섯 명이 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불광천이 흐르는 응암동 귀퉁이에 터를 구한 뒤 곧바로 착착건축사무소의 김대균 소장과 만났다. 자신도 건축가이긴 하지만 직접 살 집이라 생각하니 객관화하지 못할까 걱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가 설계 과정에서 흐트러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김 소장님의 작업은 오랫동안 봐왔어요. 언젠가 내 집을 지을 때 설계를 직접 하지 않는다 면 소장님에게 의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해 겨울, 좋은 동료이자 지인이던 둘의 관계가 기획자와 건축가의 관계로 확장된 시점이다. 풍년빌라는 2019년 완공했고, 그해 5월 모든 친구가 입주를 마쳤다.

대문 앞 통로를 지나 풍년빌라 안에 들어서면 아담한 카페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카페 오른쪽에 따로 문이 있고, 임 소장 가족의 집이 자리한다.

빌라 4층에 있는 작가 부부의 휴식 공간. 친구들을 불러 함께 술 마시기 좋은 공간으로 꾸몄다.

3층에 자리한 두 가구의 공간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어, 문만 열어두면 하나로 연결된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 공간. 작지만 아늑하다.
공유가 아닌 ‘함께’ 살기
흔히 다세대 빌라 하면 떠오르는 구조가 있다. 4층짜리 건물에 세 가구의 주거 공간, 여기에 공동 운영할 카페 공간까지 마련한다면 상상하긴 더 쉽다. 풍년빌라의 독창성은 당연히 한 층에 한 공간씩 채워지리라 예상한 바를 완전히 깨는 데서 시작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선 커피와 도넛을 파는 카페 공간이 1층 한편을 채우고, 나머지 공간과 2층의 절반이 한 가구, 2층의 반과 3층의 반이 다른 한 가구, 3층의 반과 4층이 마지막 한 가구의 주거 공간이다. “같은 층에 공간이 섞이면 우연하게라도 한 번 더 만나게되고, 그럼 대화 한마디라도 더 나누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시작이었죠.” 김대균 소장은 입주자들 사이의 ‘관계’에 설계 포인트를 두고자 했다. 핵심은 층마다 주거공간을 교차해 각각의 접점을 만드는 것. “이 접점이란 게 공용 공간의 형태는 결코 아니에요. 공용 공간을 아무리 잘 갖춰도 결국 쓰레기장이 되거나 버려진 공간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대신 그는 때에 따라 유연하게 확장할 수 있는 연결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현재 풍년빌라 내 모든 세대의 주거 공간에는 현관문 너머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는’ 비교적 널찍한 공간이 딸려 있다. 그 곳을 현관으로 쓰든 거실로 쓰든 각자의 자유지만, 대부분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손님을 맞거나 간단히 회의하는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즉, 문을 닫으면 개인 공간, 문을 열면 공용 공간이 되는 일종의 ‘완충지대’인 셈이다. 처음엔 용도를 몰라 난감해하던 입주자들도 지금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고 만족하는 상태. 현관에 여유가 생겨 반려견과 산책 준비를 하기 편하다는 이도 있고, 일로 만나는 파트너를 프라이빗한 공간까지 안내하지 않아도 돼 좋다는 이도 있다. 사실 이 공간을 가장 자주 드나드는 건 서로 현관을 맞대고 사는 이웃사촌들이다.

물론 각 세대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했기에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는 전부 다르다. 이를테면 2층과 3층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경우 공간 구성을 오롯이 ‘수납’에 집중한 반면, 3층과 4층에 사는 작가 부부는 ‘친구들과 술마시는 공간’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했다. 1층과 2층에 사는 임 소장 가족의 최우선 조건은 ‘생활 공간과 휴식 공간의 완전한 분리’였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요청한 사항이 많긴 해요. 제가 다른 프로젝트를 하며 실험하고 싶던 걸 여기에 다 적용해보느라 김 소장님 옆구리를 계속 찔렀죠.” 김 소장은 그 모든 과정이 건축가의 당연한 역할이라며 허허, 사람 좋게 웃었다.

작가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4층 테라스. 봄이 되면 식물의 빛깔이 한층 선명해질 것이다.

임 소장 딸의 침실. 2층에는 가족의 휴식 공간이 모여 있다.

임 소장이 가장 아끼는 공간은 손님을 맞거나 일하거나 식사를 즐기는 1층 거실이다.

카페 옆의 현관문을 열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편에 임 소장 가족의 거실 공간이 있다.

풍년빌라 전경. 창문을 길게 내 햇살이 깊이 파고든다.
공간이 변화시킨 일상
풍년빌라에는 집과 지역의 관계에 대한 김 소장의 건축 철학이 녹아 있다. 그는 사회가 이기적이면 집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집이 이기적이면 지역도 이기적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리 고민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건축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김 소장은 그런 믿음을 토대로 두 가지 설계 방향을 정했다. 한 가지가 앞서 말한 ‘함께’의 개념, 다른 한 가지가 바로 ‘빛’이다. 풍년빌라 건물은 기본적으로 북향인 데다 여섯 채의 다른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층 하나를 전부 써도 면적이 20평밖에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계단 때문에 3평 가량 빠진다. 그가 구석구석 창문을 내어 반사된 빛을 모으고, 너도밤나무로 마감해 빛의 촉감을 매만지고, 선과 면을 긴밀히 교차시켜 거주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불광천을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한 건 그 때문이다.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처음 살아보니 불편한 점도 많았어요. 그런데 새록새록 각 공간이며 디테일이 참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예를 들면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창문이 있는데, 거기서 내리쬐는 햇살이 무척 기분 좋아요. 창이 많으니까 전혀 어둡다는 느낌이 안 들고, 시간마다 색과 온도가 다른 빛이 사방에서 쏟아지거든요.” 3층과 4층에 거주하는 오수진 작가의 말이다. 그는 아내의 친구인 이곳 입주자들과 처음부터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좋은 프로젝트구나 싶어 합류하긴 했는데, 주거 공간은 좁고, 프라이빗한 느낌도 적고, 자신의 삶이 다 노출되는 것 같아 저항감도 있었단다. “그런데 내 공간을 조금 내주고 다른 이의 공간을 내가 활용하기도 하면서 점점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공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니 결국 라이프스타일도 바뀌더라고요. 단순히 이걸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조금 다른 거주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분명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과 공간의 관계, 세대와 세대의 관계, 건물과 사회의 관계, 이 모든 관계에서 ‘집’이 어떤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풍 년빌라의 입주자들은 지금 그것을 실험하고 있다. 매일 아침 모여 앉아 커피 한잔을 나누고, 틈틈이 서로의 공간을 넓혀주며, 아주 유쾌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말이다.


김대균 소장은 착착건축사무소 대표이자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 강사로 활동 중이다. 양구백자박물관, 고령성당, 소록도 작은 미술관, 이상의 집 레노베이션 등을 설계한 한편, 건축의 사회적 역할, 건물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해왔다. 2018년 설계해 2019년 완공한 풍년빌라가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김동규(kimdonggyu.com) 설계 착착건축사무소(02-736-1242, chakchakchak.com)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