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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움과 시원詩園 비우고 채우고 움트는 공간과 시의 정원
경남 합천군 모산재 아래 부부가 손수 가꾼 1만여 평의 정원은 천연 계곡, 저수지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웬만한 결심이 아니었다면 ‘무모한 정원’이 됐을지도 모를 이곳을 말 그대로 ‘사랑’으로 가꿔온 부부. 성숙한 그림을 보여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9년 차 정원이지만 손진기ㆍ박귀전 부부에겐 아주 특별한 곳이다.

5월 중순 산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황매산 끝자락에 있는 모산재, 그 아래 천연 계곡을 끼고 있는 석정 지역에 연수원과 정원을 조성했다. 

 

다소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는 이 정원을 소개하는 걸 한사코 거부했으나, 결국 기꺼이 맡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7년 전 그들이 필자를 찾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2007년 여름의 어느날, 사업 관련차 방문한 경남 합천군의 현장에서 필자를 찾아온 장년의 부부를 만났다. 자기 집을 정원 조성하는 데 조언해줄 정원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알고 보면 정원 조성은 인생의 축소판이어서 우리 인생이 각자 다르고 그에 따라 배어나오는 얼굴과 표정이 다르듯 정원 모습도 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정원에는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이 정원의 미학을 논하기도 하고, 미사여구를 몰라도 정갈하고 소박하게 텃밭을 가꾸는 이도 있고, 화려하지만 천박해 보이기도 하고, 단순하지만 울림이 깊은 정원도 있다. 관련 학자나 교수도 아니고 업계 종사자도 아닌 정원 구경꾼에 불과한 필자를 찾아온 부부의 의도가 꽤 궁금했다.

그들의 정원은 두 곳으로 나뉜다. 경남 합천군과 산청군을 경계로 하는 산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황매산 자락이 남쪽으로 내달으면 화강기암이 병풍을 두른 듯 거대한 바위산을 만나는데, 이산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즐겨 찾은 영암사지 석탑을 껴안은 모산재이다. 모산재 아래 천연 계곡을 끼고 있는 ‘석정’ 지역과 산 아래 저수지를 내려다보는 ‘구실’ 지역 두 곳이 그들의 정원이었다. 미완성의, 아니 이제 겨우 발걸음을 내디딘 정원을 접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미스매치mismatch였다. 정원과 주인이 잘못 만난 느낌!

열정적 사업의 황금기와 맞바꾼 남편의 정원은 시름시름 앓던 아내에게 치유의 정원이 되었다. 

 

남편의 정원: Secret Garden-passacaglia(절박하고 진중한)
그는 oo홀딩스 회장이라는 직함을 쓰고 있었으나 사업 현장에서 은퇴했다 말했고, 그러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으며, 언행이 온전하고 이성적 사고와 치밀한 성정의 교회 장로였고, 언제나 수첩을 지니고 다니는 실사구시형의 사업가 풍모를 갖추어 감성적으로 다소 딱딱하게 보여 정원사로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며 어떤 목적으로 운영하는지 모호했기에 두 곳을 합쳐 1만 평이 넘는 정원은 너무 넓어 보였다. 더구나 두 곳은 정원을 가꾸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절경지로 손색없는 풍광이어서 초보 수준의 정원사와 조합하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진심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여러 의문점을 해소했으나, “한때 연 3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강소 기업의 대표이던 그는 왜 시골로 들어와 정원 뒷바라지를 하는가?”라는 원초적 의문의 답을 과묵한 그에게서 기대할 수 없었기에 마지막 퍼즐을 최근에야 맞출 수 있었다. 우선 첫인상의 미스매치는 필자의 착오였다. 그는 건실한 사업가 출신으로 감성과 미감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치밀하고 이성적 분석으로 최적의 터를 골라내는 비범함이 있었고 매우 깐깐했다. 배려와 경우가 분명했으며 건축 재료 하나를 선택할 때에도 사례 확인과 비교 우위의 결정과 재시공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원 공사는 아예 업체에 맡기지 않고 부부와 그들이 함께한 오랜 식구들만이 참여한 예술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1 최근 연수원 옆에 건강한 자재만 이용해 2층의 힐링하우스를 두 채 지었다. 부부가 설립한 장학재단 후원회를 위한 회원제로 운영된다. 특히 게르마늄석과 황토로 꾸민 찜질방은 요즘처럼 비가 많은 시기에는 최고의 휴식처이다. 
2 이 정원의 명예정원사인 이동협은 틈날 때마다 들러 조언을 하고 정원의 사계를 사진으로 기록 중이다. 지난 5월에는 정원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부부에게 바깥세상의 정원을 구경하라고 이곳 연수원의 작은 갤러리에서 사진전 <정원소요>를 열었다. 구실 지역 시원詩園의 여름 풍경. 

 

마지막 퍼즐의 드라마는 이렇다. 그는 사업에서 상승 곡선의 정점을 맞아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나 아내는 원인도 모르게 아픔에 시달렸다. 이제껏 일념으로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아내는 언제나 든든한 백이었지만 항상 미안했다. 시름시름 앓던 아내는 비상구로서 2000년 합천의 전원을 선택했고 그 효과는 탁월했다. 40년을 오직 가족과 자신을 위해 살아온 아내를 위해 그도 뭔가를 해야 할 결심이 필요했다. 5년을 끌다 마침내 2005년, 자기 인생을 버티어온 생명줄 같은 사업을 내려놓고 아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모산재 아랫마을로 귀촌했다.

그 후 지분을 정리해 9년 동안 후배와 사원을 위한 연수원을 짓고 아내를 좇아 정원을 조성했다. 특히 정원은 사업과는 달리 계획대로쉬이 되지도 않았고, 그의 열정을 태우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정원은 정적이나 살아 움직였고 더디게 성장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공간이었다. 그 기다림에 아내는 조급해했고 변덕을 부렸으나 그는 차츰 자신감이 생겼다. 아내를 위한 정원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인생을 바꾸고 얻은 절박한 자신의 정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3 뒷산인 모산재의 신록과 함께 아름지기 느티나무 아래 불두화, 작약, 산철쭉, 조팝나무 등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 말의 무늬원 입구. 
4 세어 보니 선녀탕이 여덟 개, 팔선계곡이라 할 만하다.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너럭통바위가 있는 이곳만은 9년 차 정원이 아니라 천년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석정의 가을. 2, 3, 4는 모두 사진 이동협. 

 

아내의 정원: Secret Garden-Poeme & Cadenza(詩와 내면의 분출)
그녀는 도시에서 최선을 다했다. 술ㆍ담배를 모르고 오직 일에만 매달리는 워커홀릭 남편을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40년의 세월 동안 불평 한 번 하지 않았고 사치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들과 딸은 잘 성장해 학업을 마치고 좋은 배필을 만나 각자 결혼해 곁을 떠났다. 남편은 여전히 일에 열성이었고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교회에도 열심이고 근면 성실하나 사는 게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내면의 감성과 끼를 발산하기 위해서 꽃꽂이도 배웠고 시작詩作도 배워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딱히 걱정도 없고 일상이 따분하지도 않으나 점점 몸이 처져갔다. 어떨 땐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낭패의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뚜렷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연로하신 친정어머니를 위해 남편이 시골에 20평 규모의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고마웠다! 어머니도 그렇지만 그녀 자신을 위해 더욱 고마웠다. 어머니보다 자신이 더 살 것 같았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시골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저녁 모임에 참석했다가, 몸이 아파 염치 불고하고 식당에서 드러누워 버린 후 마음을 굳혔다.

“시골에서 살아야겠어요. 당신 왔다 갔다 하면 안 될까요?” 남편은 아내의 의사를 따랐고 5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충격적 결정을 했다. 삶의 전부처럼 보이던 사업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시골에서 연수원 짓고 살겠다고. 그녀는 참으로 마음이 아팠고 미안했지만 좋았다. 주문 사항을 하나 더 넣었다. “시적 영혼을 교감할 수 있는 정원을 하나 만듭시다.” 그녀는 다가올 전원생활이 설레었으나 걱정이 앞섰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정 때문에 연수원 신축과 정원 조성에 노심초사할 자신이 미리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온 신경을 많이 써서 수십 번 몸져누웠고, 건축과는 달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정원 조성의 어려움으로, 팔아버리자는 폭탄선언까지 했으나 의외로 남편은 꿈쩍하지 않았다. 정원 조성을 시작한 지 9년의 시간이 위안과 탄식으로 흘렀다.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니 정원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원은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으로 정리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1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려 만든 야외 부뚜막과 굴뚝, 가지런히 줄 맞춰 세운 장독대에서 바지런한 안주인의 손길과 넉넉한 인심이 느껴진다. 
2 연수원과 힐링하우스의 작은 조각 공원. 옹기종기 늘어선 토우와 석상이 부부의 취향을 보여준다. 

 

희망의 정원: Secret Garden-Serenade to Spring(희망의 봄을 향한)
그들의 정원이, 가진 자의 여유와 사치라는 일말의 삐딱한 시선을 필자는 올 6월에야 걷어냈다.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명이 구체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이었다. 아직도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완성하지 못한 퍼즐을 거꾸로 엮어냈고 밑바닥에 흐르는 사나이의 과묵한 사랑을 발견했다. 

2005년 귀촌의 숨은 이유이자 막연한 예측이었기에 남편은 당황하지 않았고 의연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단은 정확했다. 1만여 평에 달하는 정원의 면적은 정원사의 고단한 노고를 생각하면 한없이 넓은 것이나 열정적 사업가의 황금기와 맞바꾼 정원이라면 도전해볼 만한 면적이라 생각했다. 특히 파킨슨병을 치유하는 공간으로서 정원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건강한 노동과 명상, 영적 교감의 화학작용이 그들을 희망의 봄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는다. 그들의 절박한 선택에 깔린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슴 밑바닥부터 애잔함과 울컥함이 소리 없이 저려온다. 정원은 이렇게 긴 시간과 함께 사랑과 슬픔과 희망과 기쁨으로 엮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생처럼! 

추신. 파사칼리아Passacaglia, 포엠Poeme, 세레나데 투 스프링Serenade to Spring은 뉴에이지 음악으로 유명한 연주자 그룹 시크릿가든의 연주곡들이다. 유튜브에서 보고, 들으면 이 정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뒤로는 모산재, 앞으로는 수원지를 바라보는 전형적 명당지인 시원, 아내가 가꾸기 시작한 정원이지만 이제 남편이 끌고 아내가 미는 부부의, 희망과 치유의 정원이다.

 

2010년 9월호에서 전원생활 특집 취재로 찾은 손진기ㆍ박귀전 부부의 집. 손수 완성해가던 정원이 예뻐 이듬해 봄에 소개하겠다고 독자에게 약속해놓고선 때를 기다리다 4년이나 훌쩍 지나버렸다. 그사이 정원도 차츰 모양새를 갖추고, 건강한 자재로 힐링하우스도 완성해 이렇게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글을 쓴 이동협은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했고 현재 SBS A&T의 미술본부장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조그만 정원을 17년째 가꾸면서 각지의 정원 탐방과 공부에 열심인 ‘꿈꾸는 정원사’다. 천리포수목원을 개방하기 전 1백 번 넘게 드나들며 그곳의 사계를 에세이식으로 정리해 <정원소요-천리포수목원의 사계>(디자인하우스, 2009)를 펴냈다. 

#정원
글 이동협 | 사진 김규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