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임대가 끝난 테라스형 원룸. 총 일곱 세대인데 모두 다른 구조로 설계했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물이 빼곡하다. 환기와 통풍은 포기했고 채광도 그리 좋지 않다. 창문이 있다 해도 건너편 건물 때문에 마음 놓고 열 수도 없다. 이건 OECD 회원국의 도시 중 인구밀도로는 최고인 서울의 흔한 원룸 모습이다. 빡빡한 일상에 치여 살다보니 집은 단지 잠을 자기 위한 곳일 뿐 어떻게 먹고 자고 사느냐에 관한 고민은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1인 가구를 위한 주거 환경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혼자 사는 사람이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증이다.
지상철을 등지고 계단식으로 경사진 건물. 각 꼭대기 층마다 테라스형 원룸이 있다.
방보다 큰 테라스가 있는 원룸
노원역 1번 출구에서 8m 앞,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건물이 있다. 건축사무소 엔이이디N.E.E.D.가 ‘상계 341-5’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설계한 이 건물은 AIANY(미국건축가협회 뉴욕 지부) 디자인 어워드에서 건축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1백70여 점이 출품해서 수상작 열세 점 중 미국 내 건축이 아닌 것은 단 두 점. 건축가 비야케 잉엘스Bjarke Ingels의 건축사무소 BIG가 설계한 덴마크 국립해양박물관과 김성우•김상목 소장이 이끄는엔이이디의 상계동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이미 계획안으로 2013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을 받았고 AIANY 외에 미국건축가협회 중 가장 역사가 깊은 보스턴건축가협회(BSA)와 미국등록건축가협회(SARA)의 디자인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다. 오피스텔과 상업•주거 공간이 한데 모인 이 건물은 천편일률적인 원룸형 다세대주택을 탈피해 주목을 받은 것.
가장 꼭대기인 8층의 테라스형 원룸. 테라스 면적은 약 15㎡로 세대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테라스가 지상철을 등지도록 설계해 어떤 방에서든 시원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김성우 소장은 최근 초소형 주택에 관한 건축계의 관심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만 실제 상계동 건물은 이목을 끌 만큼 특별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DC 등 대도시는 최근에 법적 최소 주거 면적을 하향 조정하고 비싼 임대료와 부족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초소형 주택을 주목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초소형 주택을 연구해왔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 단계다. 국내외 건축계에서 인정받은 상계동 건물이 그 단초가 된 셈이다.
상계 341-5 프로젝트 건물의 공식 이름은 ‘큐비스트 빌딩’.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지만 이 건물은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한 형태가 아니다. 6층부터 8층까지 계단처럼 층이 졌다. 총 8층 건물인데, 지하 1층과 1•2층은 카페, 3•4층은 상업 시설, 5층은 오피스텔, 6~8층은 주거 공간 그리고 옥상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쉽게 말해 주상 복합 초소형 주택인 셈이다. 눈여겨볼 점은 6층부터 8층까지 총 열네 세대가 모두 다른 형태라는 것.천고가 높은 복층 타입, 테라스가 있는 타입, 작은 발코니가 딸린 원룸과 투룸 등이 있는데, 같은 타입도 내부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 원룸과 투룸은 천장고를 3m로 높이고 창을 크게 만들어 공간을 시원하게 틔웠으며 1.2㎡ 크기의 발코니를 두어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도록 했다.
1 단 한 세대뿐인 복층형. 창을 높이 달아 위층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2 건물 내•외부의 노출 콘크리트는 검은 안료를 섞어 색을 어둡게 하고 송판 무늬 거푸집을 사용해 나뭇결 질감이 살아 있다.
특히 방보다 넓은 테라스가 있는 일곱 세대는 다른 곳에 비해 임대료가 비싼데도 가장 먼저 입주가 끝났다. 실제로 테라스형 입주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볕이 잘 들어 빨래를 말리기 좋은 것은 물론 저녁에는 테라스 밖으로 붉은 노을이 물들어 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라고. 테라스는 야외용 의자를 두거나 캐노피를 설치하는 등 각 세대마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김 소장은 이러한 시장의 잠재 욕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도심 속 주거 환경이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피스텔, 원룸, 고시텔 등 이름만 다르지 사실 형태는 거의 같잖아요.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이 건물은 작은 원룸에서도 발코니를 통해 외부와 통할 수 있게 설계했지요.”
입주자만 출입할 수 있는 옥상 정원. 용적률을 해결하기 위해 1・2층의 천고를 높여서 일반 8층 건물보다 옥상이 높게 자리한다.
세로로 늘어난 건물
건축주인 김대식 대표는 본래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건축가 못지않은 전문 지식을 갖춘 그는 어떤 건물을 지을지에 관한 신념이 확고했다. 그는 3층짜리 상가를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사무소를 찾아다녔는데 모두 한결같이 개성 없는 건물을 제안했다고 말한다. 그러던 중 김성우 소장을 만났다. 네덜란드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의 젊고 신선한 감각이 마음에 든 김 대표는 설계를 부탁했다. 다만 5층 이상 상업 공간은 임대가 잘되지 않기 때문에 오피스텔이나 주거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리고 건축가에게 설계를 전적으로 맡기고 중간중간 피드백을 했다.
지하 1층, 1・2층은 건축주 김대식 대표가 운영하는 커피숍이다. 지하철 출구 앞이라 유동 인구가 많다.
건축가와 건축주 모두 제대로 된 건물을 짓고 싶은 마음에 공을 들인 나머지 계획부터 준공까지 약 3년이 걸렸다. 시간이 지연된 것은 열악한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이양재, 박승진, 권숙희 등으로 이뤄진 엔이이디 설계팀은 공사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지상철이 인접해 있어서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 터파기(흙 파내기) 과정도 쉽지 않았고 지상철 소음을 덜기 위해 5층 주거 공간을 일반 건물의 5층보다 높이 올려야 했다. 이 또한 입주자를 위한 배려였다. 다행히 건물의 높이 제한은 없었지만 용적률이 문제였다. 그래서 1•2층 층고를 높여 건물을 위로 늘리고 주거층을 가능한 한 높이 끌어 올렸다. 이렇게 용적률을 해결하고 6층부터 테라스를 차곡차곡 ‘쌓았다’.
건축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한 디자인이었다. 건축에서 외피 면적은 ‘돈’으로 직결되는데, 늘어난 건물 높이도 그렇지만 큐브형 테라스는 일반 직사각형 건물보다 외피 면적이 넓어서 건축주가 좋아할 만한 설계는 아니었다. 다행히 좁고 갑갑한 원룸이 아니라 살고 싶은 공간을 짓고 싶다는 건축주의 뜻과 딱 맞아떨어졌다. 테라스를 만들면 늘어날 비용이 걱정됐지만, 수익성을 따졌을 때도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건물을 짓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김 대표는 당장의 수익을 따지기보다 멀리 내다보았다.
김성우 소장과 김대식 대표. 큐비스트 빌딩은 좋은 건축가와 건축주가 만나 탄생했다.
상계 341-5 프로젝트는 엔이이디에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준공한 프로젝트가 거의 없는 신생 건축사무소에 여러 건축상을 안겨주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김성우 소장은 아무리 좋은 설계도 건축주가 용납하지 않으면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하며, 앞으로 삶의 질을 높여줄 소형 주택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살고 싶어 할 공간’을 고민하고 그런 공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이 모인다면 도시 주거 환경이 조금씩 변화하고 우리의 삶도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엔이이디(02-546-0206)는 서울대 건축과 출신 김성우•김상목 소장이 2008년 뉴욕 신진 건축가(ENYA) 어워드에서 수상하고 주목받으면서 2011년 서울과 뉴 욕에 문을 열었다. 서울은 김성우 소장이, 뉴욕은 김상목 소장이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상계동 건물은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고 진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다.
- 상계 341-5 프로젝트 하늘을 향해 열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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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역 1번 출구 앞,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건물은 일반 다세대주택과 다르다. 창을 열면 방보다 더 넓은 테라스가 펼쳐지고 작은 원룸에도 발코니가 있어 숨통이 트인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단칸방 같은 원룸이 아니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1인 가구 주택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