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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 장명숙 씨 인생과 연애하는 지금이 즐겁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요즘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1등보다는 ‘최초’가 더 의미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여기, 자신의 삶에서 최초라는 성적을 새 번이나 거둔, 인생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샘솟는 호기심, 세월에 연마된 세련미. 이 두 가지 코드를 갖고 매일을 다른 일상으로 디자인하는 장명숙 씨. 이제 세상은 그를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라고 부릅니다.


1년의 반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장명숙 씨.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시내에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을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특별한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주변에서 먼저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의 흰머리라고 보기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발의 쇼트커트, 아담하다고 표현하기엔 강단 있는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련된 패션에 차갑고 도도한 표정이 어울릴라치면 이내 환한 웃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꼭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게 됩니다. ‘분명 아는 사람? 아니 뭔가 특별한 사람이긴 한데….’ 내게 꽂힌 관심은 아니지만 그 옆에서 왠지 우쭐해지는 기분, 꽤 괜찮습니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며 오래전부터 계획해 만든 집. 검박하고 겸손한 집을 짓기 위해 ‘뺄셈의 미학’을 주제로 삼았다. 거실은 벽난로와 TV만 새로 구입했을 뿐, 나머지 살림살이는 재활용품이다. 교자상은 커피 테이블로 쓰고, 육중한 가죽 소파와 데이베드는 광목으로 만든 커버를 씌워 담백한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1세대라는 고행이자 행운을 즐기다
포털 검색어에 이름을 치면 나올 법한 ‘포스’를 지닌 장명숙 씨. 하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찾을 수도 없고, 그렇게 드러나고 싶지도 않다 합니다. 그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또 그 안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 진짜 삶이 중요하기에 남에게 감지될 만큼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은 30~50대로 충분하다 말합니다. 하지만 그 족적이 얼마나 굵은지, 장명숙 씨의 지난 30년을 설명하면 어느 대목에서든 한 번쯤 그와 만나는 접점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우리가 패션과 디자인을 ‘밥 먹듯’ 생각하지만 그 용어조차 낯설던 시절, 장명숙 씨는 34년 전 한국인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으로 국제적 패션 학교 마란고니Istituto Marangoni에서 무대의상과 스타일리스트 과정을 전공하고 돌아와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관련 학문을 가르친 교수였지요. 또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도약하던 시기, 1986년 아시안 게임의 개・폐회식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이듬해 세계적 오페라하우스 라 스칼라에서 동양복 컨설턴트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장명숙 씨는 순수한 예술 애호가로서 라스칼라 단원을 한국에 소개했고, 그 결과 국내 최초 <투란도트> 공연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렇게 밀라노와 서울을 오가며 교수와 디자이너로 활약하던 그는 패션 디렉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해외 패션 시장에 대한 폭넓은 경험과 뛰어난 직관력, 당시 30대 후반이던 그는 국내 굴지의 패션 회사에 상무로 스카우트되었고, 해외 수입 명품 브랜드가 하나 둘 론칭하던 시절, 이탈리아 패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한 백화점의 패션 고문으로 살바토레 페라가모, 막스마라를 소개했지요. 아마 지금의 30~40대라면 모두가 기억할 겁니다. 당시 젊은 층의 패션fashion이자 패션passion이던 보성 어패럴의 ‘겟 유스드’ ‘야!’ ‘보이 런던’ 등이 모두 그가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었답니다. 아, 이 패션은 당시 서태지가 즐겨 입었다지요!

“물론 개인의 눈물 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선배’가 없었던 1세대로서 얻은 행운도 있었습니다. 저는 늘 길을 물어 가야 하는 나그네였어요. 유학도, 무대의상 디자인도, 패션 브랜드를 론칭할 때도. 늘 호기심 많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성격이기에 자유롭기도 했지만 대신 미래를 위한 선례가 되어야 했기에 그 사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진대, 사명감까지 느낄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한 일이 시초가 되고 희망이 되어 꿈이 될 수 있어야 다음 세대가 존재하는 법. 개인적으로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행복하게 간직할 수 있으려면 후배가 생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쉽지 않은 시대라고. 하지만 용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용이 되는 시대와 용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스스로 용이 되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장명숙 씨의 생각,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싶습니다. 

1 원목으로 심플하게 제작한 책장과 책상을 배치한 정갈하고 편안한 서재.

2, 3 빈 병을 모아 새로운 용도를 찾아주는 게 취미라는 장명숙 씨는 각종 유리병을 화병으로,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옛날 양조장 술병을 스탠드 조명등으로 만들었다.

4 장명숙 씨와 그의 멘토 브라가 교수. 여든이 가까운 나이지만 여전히 복장예술학교 마란고니에서 강의하는 브라가 교수와 30년 전 학생이던 장명숙 씨는 이제 머리 색깔이 같아지면서 친구 처럼 지낸다고.
5 장명숙 씨는 2001년 한국과 이탈리아의 우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삶의 방향타가 된 제2의 고향, 밀라노
그렇게 잘나가는 삶을 뒤로하고, 지금 장명숙 씨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요?
앞서 언급했듯, 그는 여전히 세간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장명숙’ 그 자체로 잘 살고 있습니다. 여기는 밀라노로 향하는 비행기.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밀라노에 가는 장명숙 씨 옆에서 한 아가씨가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 밀라노에 사세요?” “아니요, 그냥 자주 왔다 갔다 살고 있어요.” “그럼 밀라노에 대해 많이 아시겠군요. 제가 밀라노는 처음이라서요. 참,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젊은이가 나에 대해 뭐가 그리 궁금하신가?” 한참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장명숙 씨가 밀라노를 오가며 살아온 30여 년의 이야기가 끝을 달릴 무렵 이번에는 승무원까지 대화에 합세했다지요. 그것도 이렇게 직설 화법으로. “대단히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신지요? 왠지 특별한 일을 하는 분 같아서요.” 사실 한두 번 들은 찬사(?)가 아닌지라 ‘그저 이놈의 인기란!’ 묻어둘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말을 자주 들으니, ‘내 삶이 특별하긴 하나 보다’ 묘한 주술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리하여 3년 전, 그는 수필집을 냈답니다. 오랜 시간 경험한 이탈리아의 속살을 이야기한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입니다.

“제2의 고향, 제 몸에는 한국인 다음으로 이탈리아 유전자가 있는 듯해요. 그만큼 유학 시절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지금도 그들의 삶 속에서 좋은 것,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있죠.” 어릴 적 영화 <라스트라다>와 시민회관에서 열린 이탈리아 테너 가수 클라우디오빌라의 칸초네 공연을 보고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과 운명을 느꼈다는 그는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후 결혼해 남편과 함께 유학의 꿈을 이뤘습니다. 어렵게 떠난 유학인 만큼 누구보다 열정을 다했던 시간. 3년이라는 예정된 기간 안에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는 그야말로 진심을 다해 모든 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 친구 그리고 이웃 덕분에 학업은 물론 그들의 생활 문화까지 섭렵하며 이탈리아 유학을 입체적으로 완수했다지요. “세 살배기 아들을 두고 유학을 온 제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현지 문화 속에 늘 제 자리를 마련해준 사람들, 그리고 그때 체험한 이탈리아의 인간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는다> 의 한 장을 펼쳐봅니다.
브라가 선생님은 첫 한국인 제자인 내게 조용한 관심과 배려를 보내주셨다. 아동복 디자인 수업 시간 아동복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기 위해 유아 심리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한국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처지를 알고 있던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씀하셨다. “계속할까? 아니면 다음 시간으로 미룰까?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할지 생각해 봐. 너희 모자의 미래를 위해서.” (중략) 내가 이탈리아에 갈때 나의 어머니가 되어주는 마팔다 첼라도는 90세가 넘었지만 규칙적인 일상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매일 오전 집 안 청소를 끝내고 11시에 집을 나서서 슈퍼마켓에 간다. 이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색깔을 맞춰 의관을 정제하는 등 결코 여성성을 포기하는 순간이 없다. (중략) 남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고 신세를 한탄하는 일도 없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창조해가는 것이다.


장명숙 씨는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는 궁극의 심플함을 지향하는데, 옛날 물건을 재활용해 꾸민 침실이 그와 닮은 듯하다.

1, 2 침실에 있는 방형 욕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개 화장대와 삼촌이 쓰던 여행 가방 등의 소품이 눈에 띈다.

3 “요즘 인테리어도 빈티지가 유행이라는데, 우리 집은 자체가 빈티지예요.” 오래되고, 유행이 지난 가구도 이 집에서는 장명숙 씨의 스타일링을 통해 당당하게 존재한다. 서울 집 안에는 천장 높이까지 자란 ‘빈티지’ 화초가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4 자연의 색으로 연출한 그의 집에는 사는 이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밀라노에 가기 전날, 장명숙 씨는 첫째 아들 민수홍 씨와 한가로운 오후 한때를 즐겼다.

삶의 자세에서 빛이 나는 사람,
살아온 흔적이 담긴 집
디자인의 본고장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장명숙 씨. 당연히 그의 집이 궁금합니다. “우리 집은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스타일이에요. 아, 그리고 고물이 많죠?”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느낀 것은 담백한 기운이었습니다. 광목의 부드러운 우유 빛깔 그리고 은은한 나무 색의 담담한 조화. “이 수납장은 어머니가 쓰던 거고, 소파는 오래된건데 광목으로 커버를 만들어 재활용해 쓰고 있죠.” 새로 사기보다는 있는 것을 어떻게 어떤 용도로 새롭게 써볼까 ‘변화와 변덕’을 즐긴다는 장명숙 씨. 그는 말합니다. 진정한 디자인이란 주인공도 없이 시간을 앞서 제안하는 공허함이 아닌, 살아온 흔적을 담아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는 그가 늘 그려왔듯 ‘담백, 당당’한 장명숙만의 라이프스타일 코드로, 세월이 흐르며 연마된 ‘세련미’까지 더해지면서 빛을 발합니다.

3년 전, 남편이 설계하고 그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한 경기도 마석 전원주택에는 장명숙 씨 삶의 흔적이 또 한 번 담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단출한 박스형 모던 하우스. 노출 콘크리트 벽면만 다를뿐 광목으로 커버링한 옛날 소파, 커피 테이블이 된 교자상, 할머니가 갖고 있던 양조장 유리병으로 만든 스탠드 그리고 삼촌이 쓰던 낡은 가죽 여행 가방으로 꾸민 공간. 서재와 침대만 매우 단촐하게 원목으로 제작했을 뿐,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삶과 인연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진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떻게 제 각각인 것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지 신기합니다. “저랑 같이 살아온 것들이니 겸손하되 당당하게 살고자 한 제 의지를 닮은 결과가 아닐까요.” 여기에 한 가지 더해봅니다. 한때 사회생활을 대단하게 한 그였지만 쓸고 닦고 허투루 버리는 것 하나 없는 ‘주부’로서 부지런한 근성 역시 한몫을 한 것, 맞겠지요? 

5 소박한 집을 꿈꾸며 지은 주말 전원주택.

구속을 버리는 자유, 무소유의 여유
요즘 장명숙 씨는 사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말합니다. 그에게 의뢰 들어오는 일, 계획하는 일이 꽤나 흥미롭기 때문이죠.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최초’인 그가 요즘 하는 일 또한 최초이니 말입니다. 패션 감각 못지않게 탁월한 인테리어 센스는 지인들의 집 단장에 유용한 지침서가 되고, 또 심리학을 공부한 후에는 천주교인으로 수녀님들과 함께 운영해오던 방과 후 공부방과 청소년 쉼터를 한층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삶, 봉사를 가치로 설정한 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트렌드라는 거대한 파동도 일으켜봤고 또 그 혜택도 누려본 사람.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아는 그는 지금 삶을 이렇게 디자인합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 파동을 치게 하는 삶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시구처럼 말이죠. 올해 목표한 일 중 하나는 파동이 시작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숨 고르기 중입니다. 궁금한가요? 또 그가 최초로 펼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작년 말, 수녀님과 함께 카메룬으로 봉사 활동을 갔어요. 말로만 듣던 아프리카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카메룬 아이들의 삶에 긍정적 파동이 될 수 있는 ‘배움’. 그는 아이들에게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오면 상금을 주는 형식으로 변화의 ‘동기부여’를 알려줬지요. 그리고 이곳에 학교를 짓기 위해 비용을 마련한 지 불과 6개월, 지난달 공사를 시작했다는 희소식입니다. 아직 아프리카에서 벌레 물린 자국들이 선명한데, 빨리 가보고 싶습니다. 아, 그 전에 현재 배우고 있는 프랑스어 실력이 아이들과 농담은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될는지, 그건 걱정입니다.


카메룬에서 만난 아이들. 봉지 한 가득 쓰레기를 주운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년이면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다.


뭐든 새롭게, 내일을 오늘과 다르게 살고 싶은 장명숙 씨에게 올해 남은 숙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 또한 상상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오랜 시간, 이탈리아 문화를 한국에 전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까지 받은 그는 이제 우리나라의 생활 문화를 이탈리아에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싶답니다. 매년 4월, 그는 밀라노에 갑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가구박람회에 초청받아 한국의 디자인 마켓과 관련한 강의도 하고, 디자인 흐름을 연구하기 위해서죠. 그가 유학했을 때는 그저 구경꾼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들의 생활 문화를 통해 오히려 우리만의 라이프스타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며 스스로의 삶에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가 된 장명숙 씨. 이런 그가 한국 문화에 매료된 이탈리아 디자이너와 뜻을 같이해 기획하는 전시는 밀라노에서 날개를 펼칠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그라면 이는 분명 누군가에게 깊은 울림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장명숙 씨가 말하는 즐거운 인생이니까요.

글 이정민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