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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_아름다운 집]주)파나소닉전공신동아의 배홍기 회장과 박남희 씨 댁 다도의 풍류가 넘실대는 바다 너머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들여온 부산의 다도 茶道 문화는 지금껏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해운대 바다 너머 오륙도를 품은 아파트에 사는 박남희 씨 역시 다도가 일상이다. 집 안에 다실을 세 곳이나 만들어놓고 상념을 떨쳐버리는 그에게 해운대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 다실에서 즐기는 일상다반사.


해운대부터 오륙도까지 절경을 담아내는 이 집은 스위치, 플러그 등을 생산하는 (주)파나소닉전공신동아의 배홍기 회장과 박남희 씨 부부의 집이다. 배홍기 씨는 해외 출장으로 촬영에 함께하지 못했다. 거실은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동시에 다도를 위한 명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부산 토박이라면 바다가 보이는 집이 익숙하지만 객지 사람들에게 집 안에서 바다가 덩그러니 보이는 풍경은 낯설고도 환상적이다. 부산 토박이, 그것도 해운대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박남희 씨 조차 이토록 바다를 깊이 들인 집은 처음이었다. 2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온 이유도 오륙도까지 한눈에 보이는 깊은 바다 풍경에 반해서다.

“해운대 일대의 아파트에서 20여 년을 살았어요. 이전에 바로 맞은편 주상 복합 아파트에 살았는데, 바다는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구석이 있었더랬죠. 그런데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보금자리를 찾은 것 같았어요. 건너편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했더니 가족들도 의아해하더라고요.”

지은 지 10년쯤 된 아파트라 구석구석 손볼 곳이 많았는데, 박남희 씨는 집이 다도를 위한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길 바랐다. 물방울을 표현한 김창열 작가, 선과 점으로 말하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거실에 걸린 것만 보아도 그의 취향이 얼마나 간결함을 추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차를 마시는 공간은 자고로 ‘비움’의 미학이 필요하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왼쪽) 주방에서 바라본 다이닝 룸의 풍경. 도예가 이기조 씨의 그릇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남편은 집에 오면 TV 보며 쉬길 원했지만, 그림과 풍경이 그 자리를 대신했어요.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고 부부끼리 사는데 살갑게 대화할 시간을 만들자며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옛 선비들은 초당에서 차를 마시며 시를 읊거나 자연을 바라보며 도를 깨우치기도 했다지요.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눈부신 황홀경입니다.”

무엇이든 큼직큼직한 걸 들여놓았지만 거실이 넓어 보이는 이유는 입체적 가구 배치 때문이다. 거실과 연결되는 다이닝 룸에도 빅 테이블을 두었는데 정작 주방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요리하는 모습이 거실에서 보이지 않도록 주방 공간을 깊숙이 만들었기 때문. 이 집에서 거실은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동시에 다도를 위한 명상의 공간이다. 따라서 심플한 화이트 주방 가구를 거실에서 드러나지 않는 벽 뒤쪽에 설치해 조리 공간과 먹는 공간, 그리고 휴식 공간을 분리했다.

1 현관 입구의 벤치와 벽에 걸린 작품은 들어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2 오랜 시간 모아온 찻잔과 다기. 다실은 한옥 느낌을 내기 위해 창호문의 장을 짜넣었다.

3 침실에는 침대와 의자 하나 외엔 별다른 장식이 없다. 꽃무늬가 잔잔히 흐르는 침구와 바다 풍광이 반길 뿐.
4 집 안 곳곳에 놓인 고가구는 이사를 오면서 시댁인 하동으로 많이 보냈다고. 골동품과 모던한 아파트의 조화로운 풍경이 이 집의 매력이다.


차를 마시며 바다에게 배운다
무작정 집 안을 비운다고 해서 다실다운 공간이 완성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집을 비우느냐인데, 박남희 씨는 수납할 물건은 숨어 있는 장 속에 넣고, 되도록 집 안의 군더더기를 없앴다. 겉으로 드러나는 장이라곤 거실의 고가구뿐. 작은방에 만든 별도의 다실 역시 찻장을 벽 안으로 매입했고, 옷장이나 화장대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멋진 장식도 화려한 가구도 들여놔봤지만 언제부턴가 바다가 있는데 무얼 그리 많이 채우나 싶었어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도 온전히 품지 못하는데 갖가지 장식까지 있다면 과욕이죠. 유일하게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은 찻잔과 그릇입니다. 손님 초대할 일이 잦아 백자 그릇을 모으는데, 도예가 이기조 선생의 정갈한 그릇에 한식을 차려내면 외국인들도 무척 좋아한답니다.”

박남희 씨의 다도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듯싶겠지만, 특히 부산에서 다도는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1970년대 한국 차문화의 태동기에 부산과 경남 지역에선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도 붐이 일었다. 다른 지역보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상류층 부인들은 일본의 다도에 매료되어 다실을 만들고 다회를 열었다. 이 시절에 지은 일본식 다실은 양산, 동래, 해운대 등에 20여 개 흩어져있다. 일본 다도를 통해 일찌감치 차에 눈을 뜬 부산 사람들의 다도 문화는 흥미롭게도 지금껏 명맥을 잇고 있다. 한국적인 차 문화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핸드드립 커피까지 이어진 21세기 다도의 산실이 바로 부산인 것이다. 박남희 씨 역시 다도 붐이 일어난 초창기부터 자연스럽게 다도를 접해왔고,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집을 꾸미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주방과 거실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다실이라면 작은방에 마련한 다실은 박남희 씨가 홀로 명상하며 즐기는 아지트다.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찻상과 골동 가구, 창호문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하다. 초의스님이 지은 <다신전 茶神傳>에는 ‘차는 중정中正’ 이란 말이 나온다. 찻물은 너무 끓어서도 설익어도 안되므로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용의 멋을 담은 이 집의 표정과 일맥상통한다. 해가 저물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관조하며 새로운 풍류에 젖어든다는 박남희 씨는 해운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다.

(왼쪽) 다도는 박남희 씨에게 일상이다. 차이니스 레스토랑인 ‘칸지고고’ 를 운영하면서 인생이 두 배로 바빠졌다는 그는 다도를 통해 내면의 행복을 되찾는다.

“집 안 곳곳의 창을 통해 변화하는 해운대의 모습을 지켜봐왔어요. 저 멀리 장산까지 내다보이던 풍경이 2년 사이에 아파트로 빼곡해졌답니다. 7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 바람이 잘 순환하지 못해 해무가 생기는 것 같았어요. 한편으론 모두 함께 누려야 할 해운대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리란 걱정에 변화의 시계를 늦추고 싶어요.”

부산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다는 선입견도 있지만, 목소리만 컸지 오래 보고 묵직이 생각한 뒤 표현한다. 차를 우려내는 시간만큼 바다를 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박남희 씨의 집은 이러한 부산 사람의 성향을 꼭 닮아 있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그녀를 만나도 지금처럼 따뜻한 차를 건네며 해운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글 배효정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