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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장 뤼르사의 흔적을 찾아서 씨실과 날실이 모여 인생을 잣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위대한 예술가의 아틀리에를 만나게 됩니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 화가, 아울러 가장 위대한 태피스트리 작가로 불리는 장 뤼르사의 집입니다. 그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머문 투르 생 로랑 성도 공개합니다. 프랑스 현지 매체에서도 접근할 수 없었던 비밀의 두 집, 그 안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태피스트리란? 다채로운 선염색사 先染色絲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원래의 용도는 벽걸이, 가리개, 휘장, 실내장식품 등이지만 운반하기 쉬운 점 때문에 대형 회화의 복제에도 이용되고 있다. 사상 최대 최고를 자랑하는 태피스트리의 명작은 14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앙제 성당 ‘요한 묵시록’인데, 높이 약 5.51m, 길이 24m의 큰 천 7장을 합친 것에, <요한의 묵시록>에서 취재한 90개 장면을 나타내 전체 넓이가 720㎡에 달한다.

<행복> 독자에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행복>의 지면은 응당 독자들의 것인데 이번 기사만큼은 필자의 욕심에 눈이 멀어 취재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변명하자면 이렇다. 대부분의 미술사가(현대미술을 연구하는 미학자나 평론가를 제외하고)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예술가나 과거의 사조를 연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예술가가 남긴 메모라든가 편지, 신문 기사 등 아티스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참으로 귀하게 대접한다. 한때 로댕이 남긴 백화점 영수증을 모아 로댕의 소비 성향에 대해 쓴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적이 있다. 그다음 달 독자 투고란에는 이 논문을 흥미롭게 보았다는 미술사가들의 투고가 빗발쳤다. 미술 사라는 것이 근사해 보이지만 실제 이 학문은 좀스러운 자료라도 소중히 모아 한 발씩 디뎌야 하는 지난한 노릇의 산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유명 예술가가 남긴 아틀리에를 방문할 기회는 놓칠 수 없는 행운이다.

(왼쪽) 3층 거실은 희귀한 가구로 가득한데, 자단 테이블은 앙드레 뤼르사의 작품으로 화가인 형을 위해 좌우로 펼쳐지게 디자인했다. 앙드레 뤼르사의 가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이 테이블은 무척 귀한 작품으로 꼽힌다. 소파는 피에르 샤로의 작품이고, 의자들은 장 뤼르사가 디자인했다. 태피스트리는 이 집과 아틀리에를 위해 장 뤼르사가 제작한 것.

처음 장 뤼르사 Jean Lur at(1892~1966년)의 집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는 지나는 풍문인 줄만 알았다. 장 뤼르사가 누구인가. 태피스트리를 현대화해 20세기 미술사에서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 아티스트이자 거물 컬렉터들이 그 작품을 소장하기를 꿈꾸는 화가다. <행복> 2010년 3월호에 소개한 라코스트 가문(스포츠 패션 브랜드 라코스테의 창업주 가문)의 자손이자 유명 갤러리스트인 자크 라코스트도 장 뤼르사의 태피스트리를 소장하고 있다. 장 뤼르사는 또 <행복>에 등장한 메종 드 베르(2010년 9월호)를 지은 건축가 피에르 샤로 Pierre Chareau의 절친한 친구이며, 메종드 베르에 소장된 피에르 샤로의 오리지널 가구를 태피스트리로 장식하기도 했다. 그런 아티스트의 아틀리에가 공개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르 코르뷔지에처럼 진작 재단을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든지, 연구 서적에라도 등재했어야 한다. 은밀하게 컬렉터의 손으로 넘어갔다 해도 소문이 돌게 마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소식에 빠른 갤러리스트조차 그의 아틀리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풍문이라 하기에는 제법 구체적인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남편의 작품을 정리하고 전시회를 여는 데 열정을 다한 뤼르사의 미망인 시몬 뤼르사 Simone Lur at 여사 덕분에 장 뤼르사의 아틀리에와 살림집이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 또 그 집은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모던 건축을 이끈 주역이자 뤼르사의 동생인 앙드레 뤼르사 Andr Lur at가 형을 위해 지은 집이라는 것, 시몬 뤼르사 여사가 2009년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그 집을 프랑스 아카데미 보자르에 기증했다는 것, 뤼르사 재단을 만들기 위해 미술계 큰손들이 그 아틀리에를 다녀갔다는 것 등등. 그래서 수 소문 끝에 뤼르사 파운데이션 창설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맡고 있는 아카데미 보자르의 자비에 에르멜 Xavier Hermel 씨를 찾아 가보기로 했다. 물론 <행복>을 앞세우고서 말이다.


아틀리에에는 수백 점의 화폭이 보관되어 있다. 태피스트리와 소파의 텍스타일, 테이블은 장 뤼르사의 작품이며 의자는 마티외 마테고의 작품.

20세기 초 유행한 디반이라는 가구와 대리석 바닥으로 꾸민 시몬 뤼르사의 방.

(왼쪽) 이 세라믹 작품은 장 뤼르사가 단 한 점씩만 제작한 특별 에디션이다.
(오른쪽) 장 뤼르사가 만든 테이블웨어. 간간이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귀한 작품이다.


20세기 최고의
태피스트리 아틀리에가 탄생하기까지

장 뤼르사의 집은 빌라 쇠라 Villa Seurat라는 파리 14구의 작은 길에 있다. 파리에서 보기 드문 1930년대 주택들이 자리 잡은 빌라 쇠라 길에는 약관 30세로 막 건축 학교를 졸업한 앙드레 뤼르사가 형 장 뤼르사를 위해 지은 4번지를 필두로, 다섯 명의 아티스트를 위해 지은 집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빌라 쇠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블랑쉬(<행복> 2010년 4월호에 소개)와 함께 20세기 초 건축계를 주름잡은 모던주의 건축 운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여섯 채의 주택 외부는 모두 하얀색 콘크리트로 간결하게 지었다. 예술가들을 위해 지은 집이라 규모가 작고 소박하지만 검은색 창문의 배치와 공간의 불륨감은 ‘아! 바로 이것이 모던주의 건축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대적이다. 4번지 앞에 서니 예사롭지 않은 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르데코 시대 철물, 주물 장식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레이먼드 수브 Raymond Subes가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는 현관문 너머로 풀이 무심하게 자란 정원이 보인다. 주인이 떠난 마당은 봄볕에도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왼쪽) 호베르 두아노가 찍은 장 뤼르사의 아틀리에 풍경. 장 뤼르사는 벽면 가득 종이를 붙여놓고 그 위에 밑그림을 그렸다. 중세 시대 벽화를 그리던 미켈란젤로처럼 사다리 위에 서서 온몸으로 그려야 하는 작업이다.

오랫동안 찾는 이가 없던 집은 공기마저 묵직하다. 시몬 뤼르사 여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내려와 남편의 유작과 문서를 정리했다는 1층에는 손때 묻은 문서가 담긴 상자가 겹겹이 쌓여 있 었다. 장 뤼르사의 생존 당시 1층은 뤼르사의 집으로 태피스트리나 그림을 보러 오는 화상을 위한 공간이었다.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드는 화상들이란 혹여 공개하지 않은 작품이 있을까 안테나를 세우며 염탐하게 마련인데 이런 간섭을 질색한 장 뤼르사는 부러 1층에 작품을 내려놓고 화상을 만났다. 동시대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뉴욕과 스위스를 오가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친 뤼르사는 유명해진 뒤에도 이 집만은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 집이 비밀 정원처럼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외부인을 들이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런 형을 위해 동생은 작품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그야말로 형의 라이프스 타일을 꿰뚫고 있는 동생이 지은 집답다.

장 뤼르사는 살아 있는 동안 대가라는 칭호를 누리며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집 내부는 참 간소하고 간결했다. 그나마 이 집에서 호사스러운 공간이라면 3층에 위치한 거실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던 뤼르사 형제는 친구들의 작품으로 거실을 꾸몄다. 격의 없이 지낸 친구인 피에르 샤로의 소파와 마티외 마테고 Mathieu Mattego의 의자, 앙드레 뤼르사가 만든 테이블과 장 뤼르사가 직접 태피스트리를 입힌 가구들이 거실을 채우고 있다. 바닥에는 고급 목재인 자단으로 된 마루를 깔아 왠일인가 했더니, 앙드레 뤼르사가 어느 집 공사를 해주고 남은 목재를 가져와 깐 것이라 한다. 재미난 사실은 검박하게 꾸민 이 거실의 가구가 지금은 모든 디자인 전문 갤러리스트가 탐내는 으리으리한 작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덤 속의 뤼르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황당해할까?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에르 샤로의 소파는 경매장에서 몇백만 유로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또 장 뤼르사가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을 마티외 마테고의 의자는 마테고의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그 가격을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더구나 앙드레 뤼르사의 테이블과 장 뤼르사가 직접 태피스트리를 입힌 가구들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작품이다.

아틀리에에도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 쓴 뤼르사 형제의 손길이 가득 했다. 장 뤼르사가 디자인한 텍스타일을 이용한 소파와 말년에 취미를 붙인 도자기, 앙드레 뤼르사가 만든 붙박이장으로 치장한 아틀리에에는 큐비즘에서부터 뤼르사 특유의 동양적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까지 장 뤼르사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그림을 그리다 자리를 비운 듯 팔레트며 유리잔, 사방에 걸려 있는 태피 스트리까지 뤼르사의 체취가 물씬 풍겨왔다.

인기 화가, 태피스트리 작가로 변신하다
우체국에 근무하던 아버지와 취미로 수채화를 그리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장 뤼르사는 군의관이 되라는 부모의 기대를 꺾고 아르 누보의 대가 중 한 명인 빅토 푸르베 Victor Prouv 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만 타면 당장 어디든 떠나고 싶어지기 때문에 부러 차를 사지 않았다는 말년의 고백처럼 뤼르사는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스위스를 필두로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이르기까지 20대의 장 뤼르사는 세상을 떠돌며 다양한 문화에 흠뻑 젖어든 보헤미안 아티스트였다.

1928년 뉴욕 전시를 시작으로 인기 작가로 등극한 장 뤼르사가 태피스트리라는 분야를 만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때문이었다. 평화주의자에 반전주의자였지만 1차 대전에 참가한 뤼르사는 1915년 부상을 입고 시골 마을의 부모 집에서 요양을 한다. 전쟁 중이라 물감도 구하기 어려울 때 어머니가 심심풀이로 들여놓은 태피스트리 직조기를 만지작거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나 트 레이시 슈발리에가 소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섬세하게 그려냈듯이 태피스트리 작업은 10년 이상 된 숙련공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태피스트리는 밑그림을 견본으로 날실과 씨실을 교차해 밑그림을 실로 옮기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40cm짜리 작은 수채화를 바탕으로 태피스트리를 짰지만 결과물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왼쪽) 장 뤼르사의 집은 프랑스를 주름잡았던 앙드레 뤼르사의 건축 철학이 담긴 모던한 건축물이다.


작업 공간은 큰 화폭을 걸고 작업할 수 있게 고안한 벽체와 붙박이장으로 꾸며졌는데 벽체와 붙박이장 모두 앙드레 루사의 작품이다. 이동식 나무 벽체를 쓴 점이나, 철제와 나무를 안배한 붙박이장 모두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장 뤼르사의 회화 작품에선 큐비즘의 영향이 느껴진다.


전쟁 후 다시 본업인 그림으로 돌아간 장 뤼르사가 본격적으로 태피스트리에 천착한 것은 1937년,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우연히 앙제 Angers 대성당에 들른 뤼르사는 거기에서 운명이라 할 만한 작품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태피스트리이자 가장 귀한 태 피스트리로 알려진 장 반돌 Jean Bandol의 ‘요한 묵시록’이었다. 1375년 앙주 공작이 주문한 중세 시대의 걸작 중 하나 앞에 선 장 뤼르사는 그 미스터리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수백 가지의 색채 톤을 써서 화려하게 짠 18세기의 태피스트리와 달리 단 20개의 색채 톤만으로 짠 문양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인공적으로 만든 물감이 아니라 자연에서 가져온 눈부신 색채가 화폭을 메우고 있었다. 몇 가지의 실을 썼는지, 어떻게 실을 조합해 이런 색채를 만들었는지 살펴보던 뤼르사는 문득 이 태피스트리를 만든 과거의 장인들을 떠올렸다. 단 하나의 태피스트리를 짜기 위해 10년 넘게 베틀에 매달려 있던 장인, 은퇴하기 전까지도 태피스트리가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난 중세 시대의 장인을 그려보면서 그는 전율을 느꼈다.

태피스트리라는 다소 엉뚱한 분야는 아무래도 뤼르사의 천직이었던 것 같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태피스트리로 이끈 또 다른 만남이 뤼르사 앞에 나타났다. 18세기부터 태피스트리의 원산지로 명성을 떨친 오뷔송 Aubusson 지역에서 대를 이어 작업장을 운영하던 타바르 Tabard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태피스트리는 케케묵은 유물 정도로 인식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대대로 태피스트리를 만들던 직공은 실업자가 되었고, 유명 작업장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타바르가 장 뤼르사를 찾아나선 것은 태피스트리를 만들 밑그림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18세기 궁정화가로 이름을 떨친 프랑수아 부셰 Fran ois Boucher의 태피스트리처럼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은 보통 당대 유명 화가가 맡는 것이 관례인데, 타바르는 사양길에 접어든 태피스트리를 현대적으로 되살려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뤼르사를 찾아온 것이다. 스페인계답게 ‘정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뤼르사와 타바르는 뜻이 잘 맞았다. 둘은 마치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위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태피스트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뤼르사는 중세 시대의 직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태피스트리에 들어가는 색채의 숫자를 20여 개로 줄이고 그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였다. 밑그림에는 색칠을 하는 대신 색채 번호를 써 넣어 직조공으로 하여금 밑그림을 정확하게 태피스트리로 옮길 수 있게 했다. 물론 이 작은 혁명에는 반발도 만만찮았다. 오랫동안 똑같은 방식으로만 작업해온 직조공들은 뤼르사의 새로운 작업 방식을 못마땅해했다. 터줏대감인 직공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뤼르사는 뉴욕과 파리 같은 예술의 중심지에서 살며 성공한 화가로 대접받던 생활을 버렸다. 오뷔송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직공 옆에서 먹고 자면서 모든 것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씩 서로를 이해해가면서 그들은 마침내 ‘빛나는 태피스트리’라는 별칭을 지닌 놀라운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나갔다. 직공들에 대한 뤼르사의 의리는 평생 계속되었다. 소수의 작품만 만들어 비싼 가격으로 판다면 평생 작품 제작비는 물론 생활비 일체를 책임지겠다는 화상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직공들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뤼르사의 바람 덕택에 오뷔송은 20세기 최고의 태피스트리 아틀리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뤼르사가 찾은 또하나의 파라다이스,
투르 생 로랑 성
별을 찾는 남자, 기묘하고 몽환적인 동물,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운 나비 같은 환상적인 세계를 태피스트리로 옮긴 장 뤼르사의 작품 중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슬픈 작품도 많다. 뤼르사는 20대에 1차 대전을, 40대에는 2차 대전을 겪은 비운의 세대다. 전쟁은 뤼르사의 증언처럼 유럽인에게 지옥처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끝도 없는 피란민의 행렬과 죽음, 그중에서도 전쟁 중 독일군에게 생포되어 고문으로 생을 마친 수양아들을 둔 뤼르사는 전쟁 후 외부로부터 격리된 그만의 파라다이스를 찾아나섰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중부 지방의 숲에 은거하며 레지스탕 스 활동을 한 덕분에 그 지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뤼르사는 그 인연으로 생세레 St. Cr et 마을에 있는 투르 생 로랑 Tours St. Laurent 성을 구입했다. 전쟁 직후인 데다 중세 시대부터 내려오던 낡은 성이라 그야말로 헐값에 넘겨받을 수 있었다.

(왼쪽) 장 뤼르사는 투르 생 로랑 성의 식당 벽면에 자연의 생명력이 가득 담긴 나무뿌리를 그렸다. 중세 시대의 천장 대들보에는 다양한 문양을 그려 장식했고, 심지어 거대한 벽난로 안에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투르 생 로랑 성은 아찔하리만큼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장 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으스스한 외관을 보자 전쟁의 절망이 그를 여기까지 몰아세운 건가 싶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에덴동산을 닮은 작은 정원이었다. 나무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는 생 세레 마을을 비롯한 산과 들,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초록으로 가득찬 자연이 사방을 뒤덮은 그곳에서 뤼르사는 그야말로 자연인으로 살았다.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아침이면 빵을 사러 언덕길을 너털너털 걸어 내려오고, 농부들과 격의 없는 농담을 나누면서 술을 마시던 뤼르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양의 에너지가 숲을 가득 물들이는 이곳에서 장 뤼르사는 전쟁을 뒤로하고 행복한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었다.

중세의 유물로 가득한 성에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태피스트리를 제작한 뤼르사는 성 곳곳에 수많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당장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중세 시대의 천장에는 별과 꽃, 나비와 기하학 문양을 그렸다. 거실에는 뿌리가 달린 거대한 나무를 그림으로 심었다. 부엌에는 한 장 한 장 채색해 구워낸 타일을 깔고 시몬의 방에는 사랑을 담아 유쾌한 문양을 가득 그려넣었다. 눈길을 돌리는 어디나 열정이 가득한 아티스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는 것은 모두 예술이라고 외치는 듯한 그 공간에서 필자는 비로소 태피스트리를 비롯한 뤼르사의 작품을 온건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별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횃불을 들고 희망을 찾아 나선 남자와 그의 주위를 파랗게 밝히는 나비와 꽃, 그리고 고대 신화에 나올 법한 동물, 황금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태양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이다. 그것은 마음껏 예술을 향유하기를 원했던 예술가, 자연 속에서 살면서 삶의 기쁨을 노래한 예술가의 가슴속에서 나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이 그곳에 있었다.

(오른쪽) 언덕 위에 올라선 거대한 중세 시대의 투르 생 로랑 성은 어딘가 외부 침입을 거부하는 성체 같다.


(왼쪽) 그 는 집 안 곳곳에 나무 패널을 붙이고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을 했다.
(오른쪽) 장 뤼르사의 작품으로 꾸민 거실.


별을 찾는 남자, 기묘하고 몽환적인 동물, 섬뜩하리만큼 아름다운 나비 같은 환상의 세계를 태피스트리로 옮긴 장 뤼르사의 작품 중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슬픈 작품도 많다. 씨실과 날실이 만들어낸 장중한 예술이다.

빌라 쇠라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시몬 뤼르사 여사가 기증한 작품과 빌라 쇠라는 현재 뤼르사 파운데이션 건립을 위해 애쓰는 자비에 에르멜이 관리 중이다.
투르 생 로랑 성은 뤼르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46400 saint laurent les tours, 05 65 38 28 21, 매일 9시 30분부터 12시까지, 오후 2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문을 연다.

 

 

이지은(오브제 아트 감정사) 사진 마티유 페리에 Mathieu Ferrier 

담당 최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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