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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선가의 풍류 가득한 옥정호의 조어대
임실의 조용한 호숫가에 낚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가 이남식 씨와 <행복>의 오랜 독자인 최은영 씨가 살고 있다. 창고를 개조한 소박한 목조 주택이지만 사랑채와 다실에 앉아 있으면 시시각각 바뀌는 호숫가의 사계절 풍광이 오롯이 내 것이 되는 ‘행복이 가득한 집’. 겨울에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곡 선율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여름이면 마치 우주에 있는 듯 새까만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진다.


운암리 호숫가 집 ‘조어대’. 집주인 이남식 씨는 낚시를 하러 왔다가 호수 풍광에 반해 호숫가 창고를 개조해 집을 짓고 덱 위에 사랑채를 증축해 다실과 음악실로 활용한다.

집을 취득하게 되는 사연도 가지가지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 호숫가에 자리 잡은 이 풍광 좋은 집은 낚시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낚시를 좋아하는 집주인 이남식 씨는 20년 전부터 물 반 고기 반인 이 옥정호에 낚시를 하러 오곤 했다. 어느 날 커다란 잉어가 낚싯대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며칠 후 그 낚싯대를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집터가 바로 이곳이다.

원래는 허름한 농협 창고 건물이 있던 자리인데, 집주인의 남다른 안목으로 이 농협 창고를 개조해서 오늘날과 같은 호숫가의 전망 좋은 집이 되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난 셈이다. 집이 있으면 으레 당호가 있어야 하는 법. 사람들이 이 집을 두고 ‘창고집’이라는 격조 없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필자가 이를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여겨 생각 끝에 붙인 이름이 바로 ‘고기를 낚는 언덕(臺)’이라는 뜻의 ‘조어대 釣魚臺’라고 지었다. 중국의 북경에도 조어대가 있긴 하지만, 북경의 조어대는 일반인이 함부로 낚시를 할 수 없는 국빈급 숙소 이름이다. 낚시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집주인의 본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기에는 조어대라는 이름이 딱인 것이다.

소리를 낚는 산신, 조음선인 釣音仙人의 쉼터 한자 문화권에서 호숫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롭게 앉아 있는 모습은 세상사에 초연한 은자 隱者를 상징한다. 또는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강태공과 같은 도사를 가리킨다. 중국 고사를 보면 광무제의 어릴 적 친구이던 엄광이 그 좋다는 고위 벼슬들을 사양하고 야인으로 남아 항주의 부춘산 富春山에 숨어 살았다. 부춘산 옆으로는 동강이라는 강이 흘렀다는데, 엄광은 여기에서 평생 동안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고 살 면서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어릴 적 친한 친구인데도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숨어 사는 그 지조는 무엇인가. 그래서 낚싯대를 어깨에 둘러멘 어부는 뜻이 높은 고고한 은자를 상징 한다. ‘귀거래사’의 도연명보다 한 수 위가 엄광인 것이다. 그만큼 낚시꾼은 동양 지식 사회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동양화에 보면 ‘어초문답도 漁樵問答圖’가 있다. 산길에서 어부 漁夫와 나무꾼인 초부 樵夫가 만나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세상 풍파에서 벗어난 탈속의 장면이다. 낚시를 좋아하다가 이 풍광 좋은 옥정호에 집을 마련하게 된 이남식 씨도 탈속한 선풍 仙風이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조음선인 釣音仙人’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소리를 낚는 신선’이라는 뜻이다. 어찌 과거에만 신선이 있고, 현대에는 없으라는 법이 있는가?

(왼쪽) 사랑채 다실에서 바라본 호수 풍경. 물과 산봉우리가 풍수적으로 좋은 기운을 전해준다.

이 조어대는 주변에 상가가 없고, 숙박업소도, 횟집도 없다. 무엇보다 불빛이 반짝거리지 않아서 좋다. 밤이 되면 불빛 없이 주변이 어두워야 깊이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밤에 불빛 없는 공간이 그립다. 현대 문명은 어둠을 모른다. 양 陽만 좋아하고 음 陰을 싫어한다. 어둠에서 휴식이 이루어지고 쉬어야만 창조가 시작되는데, 어둠과 음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 정신병이 많다. 무엇보다 한적한 시골 동네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점이 대단하다.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공간에서 한 번쯤 살아보아야 할 것 같다. 생각이 공간을 지배하지만, 공간이 사람에게 생각을 주기도 한다.

집주인에게 조어대의 선가적 仙家的 풍광이 무엇인지 소개 해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새벽에 동틀 때가 장관입니다. 여명의 시간대가 되면 주변에 서식하는 온갖 새가 지저귀기 시작하고, 물안개가 호수 수면에서 피어오릅니다. 이 물안개를 보고 있으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기도 하고, 몽환적 분위기에 젖어듭니다. 현실 세계를 잊어버리죠. 우리 사는 삶에는 너무 몽환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을 줍니다. 다른 세계에도 가보아야만 이 세계가 즐겁다고 느낍니다. 이 세계에만 붙어 있으면 지겹습니다. 그 차원의 전환을 바로 새벽녘 물안개가 느끼게 해줍니다. 그다음에는 호수의 물고기들이 아침밥을 먹는 시간이 됩니다.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뛰어오르죠. 특히 피라미가 수백 마리씩 한꺼번에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부챗살 같습니다. 생명의 힘과 약동이 느껴지지요. 삶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여겨지고요.”

“이 호수의 물빛도 계절마다 색깔이 바뀝니까? 1년 중 어느 계절이 가장 좋은 시절입니까?”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기간이 가장 좋습니다. 호수에 물이 가득 차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이때는 물빛이 아주 투명합니다. 바닥이 들여다보이죠. 거울 같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거울처럼 맑은 물이 호수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주 상쾌한 일입니다. 내 마음도 덩달아서 거울처럼 맑아지고, 삶의 때가 씻겨 내려간다는 느낌을 줍니다. 여름에는 광합성 작용으로 녹조 현상이 발생해 감동이 덜합니다. 한겨울에 호수가 언 다음 눈이 약간 쌓여 있는 모습도 감동입니다. 조지 윈스턴의 깔끔한 피아노곡인 ‘디셈버 December’를 들으면 제격입니다. 특히 한겨울 밤에 눈보라가 날리는 장면도 기가 막힙니다. 가로등 불빛에 눈보라가 날리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영화 속 어느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요.”


1 여행지에서 사온 이국적인 소품과 공연 포스터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벽이 인상적이다.
2 다실 한편에는 이남식 씨가 손수 만든 나무 가구와 컬렉션한 소품을 두어 카페처럼 꾸몄다.

3 전주 MBC에서 음악 프로그램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이남식 씨는 집 안에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차를 마시는 부인 최은영 씨.
4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가구를 만들고…. 그야말로 다양한 취미를 즐기는 부부. 집 안 곳곳이 모두 부부의 놀이터이자 작업실이다.


자연의 사치를 누리며 사색을 즐기다 이 집의 구조는 본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본채라고 해봐야 원래의 농협 창고를 내부만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다. 창고 건물이라서 천장이 5m 정도 높다. 살림하는 공간인 본채의 실내가 높으니 소리에 울림이 있다. 공간이 높으면 남자의 기 氣가 살고 낮으면 눌린다. 내면에 집중할 때는 천장이 낮은 집이 좋고, 이걸 풀어 버리는 단계가 되면 높은 집이 좋다. 천장이 높으면 여름에 특히 쾌적하다. 이 본채는 지붕이 양철로 되어 있다. 비 오는 날에는 양철 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감상한다. 겨울에는 어떻게 난방을 하는가. 이 집 난방은 장작 난로다. 주인이 벽에 설치한 무쇠 벽난로에서 타닥 타닥 장작이 탄다. 이 벽난로는 보일러 기능도 겸하고 있어서 방바닥도 덥혀준다. 벽난로의 장점은 냄새에 있다. 장작 타는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데, 일종의 아로마테라피다. 소나무 타는 냄새가 다르고, 참나무 타는 냄새도 다르고, 대나무를 태우면 또 다른 냄새가 난다. 소나무 타는 냄새는 한국인에게 내재된 민족성과 끈기를 자극하는 냄새이기도 하다. 마당에서 굴뚝을 통해 나가는 장작 냄새를 맡으니 삶의 의욕이 생긴다.

사랑채는 원래의 창고 건물 옆에 덧대 만들었다. 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을 재우기 위해서였다. 사랑채에는 2층에 방이 하나 있는데, 이 방 전망이 또한 일품이다. 방에 앉아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 호수가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밤이 되면 더 장관이다. 방바닥에 누워 있어도 하늘의 별이 보이는 구조인 것이다. 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있는데도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는 대단한 사치가 아닐 수 없다. 별은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로는 조용한 침묵을 머금고 있는 호수가 있다. 별과 호수의 말 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 ‘정청어독월 靜聽魚讀月’이라는 옛 선사들의 시구가 있다. ‘지극히 고요해지면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나 고요했으면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이 집 사랑채의 2층에 누워 창밖으로 전개되는 밤하늘의 별빛을 보고, 호수를 보면 ‘정청어독월’이 어떤 경지인지 약간 감을 잡을수 있다. 이 방에 누워서 생각을 했다. ‘고생만 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아니다. 이처럼 한가하게 즐기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그처럼 부산하게 살았던 것일까!’

사랑채 거실에도 역시 장작 타는 벽난로가 있고, 귀퉁이에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벽면에는 각종 음악 CD가 천장 가까이까지 꽂혀 있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면 앞으로도 호수가 들어오고, 옆으로도 호수가 들어온다. 남서향과 서향의 유리창이라 오후 늦게까지 빛이 들어온다. 서향집의 빛은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블라인드를 많이 쳐놓는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추는 석양볕을 쬐면서 집주인이 손님을 위해 틀어주는 기타곡을 들었다. 브라질의 형제 기타리스트인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 Loss Indios Tabajaras의 기타곡들이다.

집주인 이남식 씨는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1970년대 중반 이 형제 기타리스트가 이화여대 강당에서 연주할 때 들었다는데, 이남식 씨는 이 연주를 듣고 3일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그러니 ‘조음선인’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석양볕이 비치는 호숫가에서 장작 냄새를 맡으며 이 곡을 들을 수 있는 나도 나쁜 팔자는 아닌 것 같다. 그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인간 내면에 깃든 착한 본성을 일깨워준다. 아! 왜 이처럼 기타 선율이 심금을 울리는 것일까? 행복은 무엇이냐? 석양 무렵 이 조어대 사랑채에 앉아서 친구들과 함께 타바하라스의 기타곡인 ‘마리아 엘레나’를 듣는 일이다. 그렇다. 우리 살아온 인생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다. 그래, 여기까지 건너오느라고 수고했다. 상처 입은 부상병만이 다른 부상병을 위로 할 수 있다. 다 함께 이 풍광을 음미하면서 삶의 무상함을 씻어내자.

(왼쪽) 사랑채에 마련한 게스트 룸. 천장 아래 뚫린 작은 창으로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경험할 수 있다.

조금 일러도 좋은 전원생활의 즐거움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는지요?” “되도록이면 젊어서 들어오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1997년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오면 집 고치고, 마당 정리하고 주변 텃밭 관리하고 그러는 데만 6~7년이 소요됩니다. 예순 살이 넘어서 들어오면 집 짓고 고치다가 세월 다 갑니다. 또 집을 팔아야만 할 때도 제 값을 못 받습니다. 이사 오는 사람은 자기 스타일이 있어 전 주인이 해놓은 것을 다 뜯어고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공들인 집값의 반절도 받지 못하는데, 오래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좀 일찍 들어오면 즐길 수 있지요.”

안주인인 최은영 씨에게 텃밭은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물었다. “어지간한 채소는 자급자족해요. 토마토, 생강, 고추, 깻잎, 상추, 옥수수, 가지, 고구마, 감자, 오이, 호박 등을 직접 텃밭에 가꾸죠. 아침에 일어나면 1시간쯤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텃밭에 들러 채소를 따 옵니다. 자기가 키워 먹으면 시장에서 사 먹는 맛하고 다릅니다. 아주 신선하고 향이 좋죠. 깻잎을 직접 따서 먹으면 향이 아주 강하고,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부드럽죠. 상추도 그렇습니다. 바로 먹는 야생의 맛이 있습니다.”
“제철 음식을 먹을 수 있겠네요?” “네, 절기가 피부에 와닿습니다. 24절기가 되면 어떤 과일, 어떤 채소와 곡식을 심고 거두어야 하는지가 저절로 터득됩니다. 24절기가 생활의 주요한 사이클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텃밭을 관리하다 보면 저절로 운동도 됩니다. 저도 도시에 살 때는 몸이 좋지 않았는데, 여기 이사 와 14년 살면서 몸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시골에 살면 아침 5시에 저절로 눈이 떠지고 저녁 8시가 되면 꾸벅꾸벅 졸아요. 동네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죠. 아침에는 개 데리고 호수 주위를 산책하고 여름에는 마당에서 낚싯 줄을 호수에 던져 낚시도 합니다. 손바닥보다 훨씬 큰 붕어도 잡고, 가끔 커다란 잉어도 잡습니다.”
전주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인 운암리의 조어대는 21세기 선가적 풍류가 어우러진 집이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은 이런 집이 아닐까 싶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출간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글 조용헌 사진 이우경 기자 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