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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아티스트 윌리엄 플립스의 집 여행 그리고 추억
아름답고 아담한 수로, 자유롭고 활기차며 친절한 사람들, 또 재기 발랄한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는 벨기에의 문화 도시 겐트 Ghent. 따사로운 봄날 유난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공간을 소개한다. 여행지에서 사 모은 골동품과 나무 조각 오브제, 유니크한 가구, 다채로운 컬러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곳…. 아티스트 윌리엄 플립스의 집이 그곳이다.


1 윌리엄 플립스의 집 현관 입구. 그의 집은 아티스트들의 아지트로 유명하다. 입구부터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한눈에도 아티스트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2 수로와 맞닿은 그의 정원은 돌멩이들과 골동 조각품, 조개들로 장식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 윌리엄 플립스 William Phlips는 1953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멀티플레이어 작가다. 벨기에 알스트 Aalst 아카데미에서 페인팅과 데커레이션을 전공한 그는 1973년부터 무대 디자이너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을 단지 무대 디자이너로만 국한하기에는 활동 영역이 너무도 방대하다. 그는 벨기에에서 퍼포밍 아티스트 performing artist(팬터마임 등 육체 행위를 중심으로 한 무대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다 Dada 연극 그룹의 멤버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퍼포먼스를 무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선보이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그의 집이다. 사람들을 초대해 접시를 공중에 던져 그 위에 음식을 얹는다거나 팬 위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등 마치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요리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생활의 때가 묻어 있는 집 구석구석을 전시장으로 꾸며 다양한 테마의 전시를 여는 것.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물건을 오랫동안 컬렉션했는데 이 소품들은 그가 디자인한 가구, 예술 작품들과 어우러져 집 안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천장이 삼각형인 작은 침실은 올라가는 입구를 사다리로 만들어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편안한 인상을 주기 위해 벽은 파란색으로 선택,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낮은 스툴은 삼각형 천장 구조와 잘 어울린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언제나 열려 있는 나의 집, 나의 무대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오브제 트루베 objets trouvés(발견된 사물들)’라 부른다. 세기와 장소를 초월해 모인 컬렉션들은 공간에서 장식품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다른 매개체와 어우러져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작업은 2003년 겐트의 타임 페스티벌에 소개되었으며, 2005년 안트베르펜의 북 페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폴레폴레 페스티벌 Pole Pole Festival, 2002년과 2004년의 안덴 세라믹 페스티벌, 2005년과 2006년 윈터부르 페스티벌, 2005년 프랑스 릴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체어 페스티벌 등에 참가해 높은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또한 알랑 플라텔 Alain Platel, 에릭 드볼더 Erik Devolder, 더크 포웰스 Dirk Pauwels 그리고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 디자이너 마르텐 반 세베렌 Maarten Van Severen 등의 디자이너와 협업해 가구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수많은 디자이너의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의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일컬어 흔들림과 호기심, 놀라움이 한데 뒤섞인 카오스 자체라 말한다. “한계가 없는 활동 영역 중 한계를 느끼는 것은 오직 내 인내심과 시간뿐입니다.”

25년 전부터 살고 있는 이집은 초창기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는 텅 비어 있던 집을 하나씩 채워가는 작업부터 시작해 공간을 재구성하고, 문과 창을 새롭게 설계했으며 다채로운 컬러를 입히기 시작했다.

우선 여러 사람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일이 잦았던 그는 특히 다이닝 룸을 꾸미는 데 중점을 두었다. 주방에는 차가운 느낌의 싱크대 대신 자연스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까만 돌판을 설치했다. 마치 중세 시대의 주방을 보는 것 같은 아일랜드 조리대 맞은편에는 스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을 두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다이닝 룸의 커다란 테이블을 마주할 때입니다. 식사를 하거나 요리를 하고, 일을 할 때도 그 큰 테이블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요. 특히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은 일상에서 가장 신나는 순간 중 하나인데, 이것이 바로 제 집의 콘셉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 많은 사람이 제 집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을 상상하며 꾸몄습니다.”

1 그가 직접 제작한 큰 테이블과 검정 돌 상판을 얹은 조리대, 촛대 샹들리에를 활용해 카페처럼 꾸민 다이닝 룸.
2 하얀색 회벽 칠은 정크 스타일의 설치 작품들과 잘 어우러진다.

3 음식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예술품이 탄생할 것만 같은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 주방 조리대의 모습.
4 일정하지 않은 자유로운 선으로 디자인한 윌리엄 플립스의 스툴.


실제로 그의 집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 화려한 색상과 이국적 테마를 가진 방이 매우 많다. 그 때문에 각각의 방을 구경할 때면 마치 다른 나라의, 다른 세기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무 프레임과 타일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현관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카페나 바를 연상시키는 홀과 다이닝 룸이 나온다. 누구든 환영하는 공간, 다이닝 룸은 윌리엄 플립스의 집에서 꽃과 같은 역할을 한다. 거친 느낌의 까만색 돌 조리대는 음식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예술품처럼 정교하고, 세월의 흔적을 품은 듯한 회벽 칠은 무척 자연스러워 그가 차려놓은 정크 설치 작품과 잘 어우러진다. 다이닝 룸 위에 복층으로 설계한 사무실은 아래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구조로 재미를 더한 공간이다. 또 한 층을 오르면 작은 침실이 나오는데, 서재로도 쓰는 이 방의 테이블 위에는 멋진 일본 무사의 검이 놓여 있다. 창고로 쓰던 다락방은 두 층으로 나눠 메인 침실과 아늑한 작은 침실로 변신했다. 강렬한 오렌지 컬러를 사용한 메인 침실은 동남아시아ㆍ중앙아시아ㆍ아프리카 등에서 사 모은 골동품, 재미있는 모양을 한 나뭇가지로 장식되어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박공지붕 다락방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 삼각형 모양의 침실은 동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왼쪽) 짙은 주황색으로 칠한 벽과 동남아시아ㆍ중앙아시아ㆍ아프리카 등에서 사 모은 골동품, 재미있는 모양의 나무 오브제가 자유롭게 배치된 침실 모습.

지극히 편안하며 지극히 역동적인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의 방들은 사실 그의 성격과도 무척 닮아 있다. 그에게 공간은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지친 인간을 보듬어주는 존재다. 이와 동시에 공간에는 ‘문’이라는 마술 같은 존재가 있어 공간에 또 다른 세상을 펼쳐 보이며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어떤 열악한 공간일지라도 제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빈 공간을 보는 순간 그곳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공간이 내뿜는 고유한 분위기를 어떻게 살릴지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지요.”

집에 관한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는 수많은 장소를 만나며 여행한 경험으로 생겨난 것일 터.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에서 느낀 감정과 풍경이 기억 속에서 혼합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형상을 띤 아이디어로 턱 하니 떠오른다. 그런데 최근 여행에 관한 생각이 좀 바뀌었단다. “수많은 장소를 끊임없이 여행하다가 지치면 돌아오는 것이 이전의 여행이었죠. 그런데 얼마 전 아프리카 토고 서쪽 해안가의 작은 집115에서 5개월을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50m만 걸으면 드넓은 대서양이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었죠. 끝없는 바다와 고요한 정적만이 존재할 뿐 아무것도 저를 방해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펼쳐진 많고 많은 바닷물을 매일매일 바라보는 일, 공간과 자연이라는 경계를 무색하게 하는 대단히 인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채우는 것에 많은 기쁨을 느끼며 집을 꾸몄지만, 요즘은 비우는 작업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공간과 사람, 추억이 만들어내는 하모니
윌리엄 플립스는 공간을 꾸미는 작업과 동시에 가구 디자인에도 큰 열정을 가진 작가다. 그의 가구는 최소량의 에디션으로만 제작되는데, 그의 집에서 대표작을 만날 수 있었다. 페인팅을 전공한 그가 가구 디자인으로 영역을 넓힌 계기는 무엇일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심플한 의자 하나로 벨기에를 대표하는 세계적 디자이너가 된 마르텐 반 세베렌이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위한 가구라는 멋진 존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죠. 마르텐이 지향하는 가구의 선은 매우 직선적이고 도시적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선과 형태를 갖춘 심플한 가구죠. 그런데 저는 심플함에도 ‘규정되지 않는 곡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약간은 주저하는 듯한 선, 어쩌면 크레용으로 그린 듯한 구불구불한 선이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기계로 만든 선이 아닌 사람 손으로 그린 직선은 절대 완벽한 직선일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결과는 항상 유니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만져보고 쓰다듬게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지요.”

(오른쪽) 아티스트 윌리엄 플립스. 그는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리트벨드 아카데미와 벨기에 브뤼셀의 리츠 퍼포밍 예술 아카데미, 쿤스트후마니오라, 겐트의 센트 루카스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스툴과 콘솔, 조명 기구 등 그가 만든 가구는 우선 흙으로 본을 뜨고 주물 틀을 제작한 후, 폴리 소재로 완성한다. 돌의 질감이 살아 있어 언뜻 보면 무척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속이 텅 비어 있어 매우 가볍고 이동이 용이하다. 여러 가지 색상으로 제작해 분위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고, 소재의 특성상 아웃도어 가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그의 집을 구경하다 보면 누구든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자가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져온 의상용 패브릭이 멋진 커튼으로 변신했고,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에게서 모아온 낮은 스툴들이 함께 모여 있어 마치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원주민의 골동품부터 현대적인 가구까지,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공간에 머물던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함께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공간의 하모니를 깨는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침실 겸 서재로도 쓰는 노란 방.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창문으로 따스한 빛이 새어나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테이블 위 멋진 일본 사무라이의 검과 벽 장식이 인상적.

겐트의 수로 위에 버드나무와 함께 세워진 윌리엄 플립스의 작은 보금자리.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수로 위에 피어오른 안개가 창문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둑해질 무렵이면 반가운 손님들이 손에 맥주와 포117도주를 들고 찾아온다. 집 안 구석구석에 그의 가구와 설치 작품들이 펼쳐져 있지만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전혀 방해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집은 내게 작업실이고 연구실이며, 수많은 감정을 겪는 삶의 터전입니다. 자신을 담는 공간이 그 자신을 닮지 않으면 그곳은 보금자리라 말할 수 없어요. 또한 공간을 꾸미는 일은 끝이 없는 프로세스입니다. 끝없이 변화하는 저의 생각에 공간 역시 진화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곳을 즐기고 사랑해주는 이가 없으면 공간으로서 의미를 잃고 만다.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고, 어떤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으로도 치장하지 않았지만 끝없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윌리엄 플립스의 집. 이 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문화와 취향이 다른 현지인을 만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며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윌리엄 플립스. 그가 공간을 통해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작은 부티크 호텔로 오픈했다. 유쾌하고 여유로운 벨기에인의 생활을 알고 싶다면, 또 아티스트가 꾸민 개성만점 공간을 탐험해보고 싶다면 윌리엄 플립스의 집을 방문해보자. 문의 William.phlips@telenet.be
글 지은경 사진 세바스티안 슈티제 (ⓒSebastian Scutyser)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