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몸이 허약해서 움직이기보다는 주로 가만히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는 김정화 씨. 그는 곤충이나 식물의 색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똬리 틀고 앉아 있는 뱀을 볼 때면 또래 아이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지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뱀의 오묘한 빛깔을 바라보며 ‘정말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경기 驚氣에서 깨어나는 일이 잦던 시절 엄마 등에 업힌 채 바라본 기명색(석양 무렵 불타는 붉은색) 하늘의 기억 때문일까? 막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궁이에서 활개 치는 불꽃 놀음을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그는 결국 촌로들을 찾아다니며 배운 전통 염색으로 떨칠 수 없는 기억 속 ‘붉은색’의 한을 푼다.
“내가 본 그 아름다운 붉은색을 크레파스로는 표현할 방도가 없었어요. 눈에 보이는 색깔과 쓸 수 있는 색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갑갑했지요. 그러다 깨달았어요. 직접 색을 만들면 되겠노라고. 자연에서 본 빛깔, 자연 속에 그 답이 있을 거라고요.”
이미 1920년대에 화학 염색법이 들어왔기 때문에 30년 전 염색을 배우기 시작할 때도 80~90세 넘은 노인들만이 전통 염색을 전수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맑으면서도 깊은 붉은색 ‘대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공정만 무려 32가지를 거치는 복잡한 홍화 개오기법을 전수해야 했다.“홍화 꽃잎을 잿물에 넣어 색소를 빼내고 빨래처럼 치대면 홍색 물이 나옵니다. 그 홍색 물에 식초를 섞어 묽게 한 뒤 먼저 무명천을 넣어 물들이지요. 다음 염색한 무명에서 색을 게워낸 뒤 명주를 담가 염색합니다. 무명을 염색해 게워내면 무명이 노란 물을 흡착해 선홍빛의 염색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게워내고 담그는 과정을 반복해 명주에 노란 물을 뺀 순색을 염색하는 것을 ‘개오기’라고 합니다. 이런 염색 과정을 거쳐야 색이 빠지지 않는 온전한 홍색이 나오는데, 이런 과정을 40~60번 반복하면 왕의 색 ‘대홍’을 얻을 수 있지요.”
대홍은 인공적인 빨간색과는 다르다. 빨간색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 잘 익은 홍옥ㆍ채송화ㆍ산딸기 등을 보고 설레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크레파스의 말끔한 빨간색이 아닌 자신이 본 석양의 붉은 노을,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 불꽃 등을 표현하고 싶어 전통 염색을 시작한 그는 이후 맑으면서도 깊은 색을 내는 우리 천연 염색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식물 염색은 회화적인 느낌이 나는 문양염으로 한 단계 올라가면 그 맛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이 노역이지요. 염색을 배우러 오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옷 짓고 싶다고 하면 시간 낭비라고, 사서 입으라고 말합니다. 전통 염색을 제대로 하려면 너무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지금도 쇼핑이 제일 어려워요. 하지만 염색은 다릅니다.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색을 키우는 재미가 있지요.”
지난 30여 년 동안 200여 종의 식물을 만졌지만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라 말하는 김정화 씨. “지금 제가 이 색이 대홍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색 아닌데?’라고 이야기한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이 색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라며 함께 토론하고 싶어요. 전통 염색을 하는 사람이라도 좋고, 아니면 문화 비평가도 좋고요.” 제아무리 미세한 컬러 칩이 있더라도 우리가 보는 자연 색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 색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에 반해 그가 만들어 쓰는 식물 염료는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 색과 거의 비슷하다. 그것을 계속 보고 만지노라면 우리는 색의 참모습과 속내를 알 수 있고, 살아 있는 색깔이 주는 감동까지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오른쪽) 전통 염색가이자 식물 염색 예술가로 활동하는 김정화 씨.
지난 2월 12일부터 27일까지 종로구 명륜동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왕의 색, 대홍> 전시가 열렸습니다. 전시장 곳곳에는 주홍빛에 물든 무명, 비단 천 뭉치가 걸려 있고 인고의 세월이 느껴지는 핑크빛 무명천들이 설치 작품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김정화 씨가 어린 시절부터 오매불망 재현하려 애써온 우리 전통 빨간색 ‘홍색’과 ‘적색’의 모습입니다.
취재 협조 짚풀생활사박물관(02-743-8787)
- [행복 인터뷰]紅, 담박한 자연을 담다 김정화의 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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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붉은색을 ‘색의 여왕’이 아닌 ‘색의 왕’이라 표현했다. 빨간색은 힘과 적극성 모두 강력한 컬러로 남성적이다. 중국에서도 빨강은 남성의 색으로 여기며 이집트의 프레스코 벽화에도 여성의 피부는 노랗고 남성의 피부는 빨갛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도 빨강을 남성적인 색이라고 인식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우아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여성의 색, 감성을 자극하며 더욱 깊은 열정을 드러내는 색으로 조명되는 빨강. 그 중심에는 전통 염색가 김정화 씨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