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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전주 강암 고택 아석재 물과 돌 곁에서 유연하고 단단하게 살리라
전북 전주시 교동에 있는 아석재 我石齋는 강암 송성용를 위해 친구들이 마련해준 집이다. 별반 특별해 보이지 않는 소박한 한옥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대가가 휘호한 것이고, 집 안 곳곳에는 평생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고 산강암의 지조가 어려 있다.

집을 구하는 경로도 그 사람이 쌓은 업장 業障에 따라 각기 다르다. 복이 적은 사람은 10년이 넘게 주택부금을 부어야만 집을 갖는다. 집 한 채 장만하기 위해서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물건을 억제해야만 한다. 이리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러고 나서야 아파트 한 채 갖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부모가 남겨준 유산으로 집을 갖는 경우도 많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큰 복이다. 팔자에 초년운이 좋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난 경우다.

이와 달리 특이한 경로로 집을 장만하는 사람도 있다. 친구들이 돈을 걷어 도와줘서 집을 갖는 경우다. 역사적으로 그 예를 살펴보면 북송 北宋의 도학자인 소강절邵康節(1011~1077년)이 그러하였다. 가난한 소강절은 그의 친구들 20여 명이 돈을 모아 낙양의 천진교 天津橋 옆 언덕에 소옥 小屋을 지어주었다. 그 집의 이름이 안락와 安樂窩였다. ‘안락한 토굴’이라는 의미다. 이 친구들이 누구인고 하니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지은 사마광 司馬光과 그 일당이다. 왕안석 王安石의 신법당과 대립하던 당대 북송의 구법당 소속 명류들이 소강절을 후원한 것이다. 사마광은 소강절을 형님처럼 따르고 좋아했다고 한다. 북송의 소강절만 그런 줄 알았더니만, 전주의 서예가이자 유학자인 강암 剛菴 송성용 宋成鏞(1913~1999년)의 집도 친구들이 마련해주었다.

1965년 김제에 살고 있던 강암을 전주로 오게 하기 위해서 친구들이 나서서 강암의 서예 작품을 전시하게 하였고, 그 서예 작품을 모두 구입하여 그 대금으로 집을 구입한 것이다. 당시 집값은 63만 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주시 교동에 있는 강암의 고택인 아석재는 남향집인데, 집 앞에 전주천 全州川이 흐르고 있다. 아석재 앞으로는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남천교 南川橋가 놓여 있다. 천진교 옆에 안락와가 있었다면, 남천교 옆에는 아석재가 있는 셈이다. 최근에 이 남천교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청연루 晴煙樓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천년 고도 千年古都다운 격조가 있고 고풍이 완연하다. 완산팔경 完山八景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 寒碧晴煙’이다. ‘한벽’과 ‘청연’을 대구 對句로 사용해서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다. 강암 말년에는 고택 터 일부에 강암 서예관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붓글씨인 서예만을 위한 갤러리를 만든곳은 오직 이곳뿐이라고 한다.

(왼쪽) 강암 송성용을 위해 친구들이 돈을 모아 마련해준 아석재는 외모가 무척 검박하나 그 속에 품은 콘텐츠는 아주 풍부한 집이다.

호남 예향의 축을 이루는 집, 아석재 친구들이 모아준 돈으로 마련한 집이어서 그런지 현재의 아석재는 그리 웅장하거나 화려한 멋은 없다. 겉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저 그런 한옥일 뿐이다. 그러나 외형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들여다보면 ‘콘텐츠’가 매우 풍부한 집이다. 무엇이 콘텐츠란 말인가? 아석재는 호남 예향의 한 축을 이루는 집이라는 뜻이다. 호남을 가리켜 흔히 ‘예향’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 가장 물산이 풍부하고 의식이 넉넉한 지역이 바로 호남이었다. 그런데 예술은 식후사 食後事인 걸 어떡하겠는가. 예술은 ‘밥 먹고 난 뒤의 일’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호남에서 풍류와 예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호남 예향의 원조 격 되는 집이 해남의 윤씨 집안인 ‘녹우당 綠雨堂’이다. 조선 중기 이래 녹우당은 실세 失勢한 기호남인 畿湖南人들이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하던 호남 최고의 살롱이었다. 이 집은 엄청난 부잣집이었기에 몰려드는 식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녹우당에 걸려 있는 편액이 바로 예업 藝業 아닌가! ‘예술을 업으로 하겠다’는 당찬 선언이다. 녹우당의 예술혼이 근래에까지 이어진 사례가 광주의 의재 毅齋 허백련 許百鍊이고, 목포의 남농 南農허건 許楗이다. 둘 다 그림이다. 글씨는 전북의 전주로 넘어왔는데, 그게 바로 남천교 옆의 아석재요, 강암 송성용이라고 본다.

(오른쪽) 집의 당호 ‘아석재’는 ‘물과 돌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주자의 시구절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같은 예향이라고 해도 전남은 그림이요, 전북은 글씨인것이다. 물론 전남에도 진도 출신의 걸출한 서예가인 소전 小筌 손재형 孫在馨이 있다. 소전은 왜정 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서예가로 1970년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예 선생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후지스카 교수가 일본으로 가져간 추사의 ‘세한도’를 해방 무렵에 일본에까지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다시 찾아온 인물이 바로 소전 손재형이다. 그러나 소전은 전남에서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지는 않았고, 일찌감치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반면 강암은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주에 살았다. 강암의 그 고집스러움과 지조가 어려 있는 집이 바로 아석재이고, 이 아석재가 전북의 글씨(서예)를 대표하는 집이 된 것이다.

명장의 현판이 한자리에 이 집의 처마 밑에는 서예 대가들의 글씨가 나란히 걸려 있다. 우선 집의 편액인 아석재 我石齋의 글씨는 소전 손재형의 휘호다. 역시 당대의 명필답다. 소전이 강암을 만나러 전주에 내려와서 써준 것이다. 이 글씨의 유래는 원래 주자 朱子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주자의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딴 것이다. ‘물과 돌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는 뜻이다. ‘居然我泉石’이라고 나무에 새긴 또 하나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휘호다. 아석재 옆에는 남취헌 攬翠軒이라는 또 하나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씨는 일중 一中 김충현 金忠顯이 쓴 글씨다. 일중도 역시 강암을 만나러 전주에 왔다가 이 집에 들러 붓을 들었던 것이다. 왼쪽에는 액자에 강암청거 剛菴淸居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유당 惟堂 정현복 鄭鉉福의 글씨다. 진주의 ‘촉석루’ 편액을 쓴 이가 바로 유당이다. 이처럼 아석재에서는 당대 명필의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언젠가 지리산 천은사 泉隱寺에 들렀을 때, 경내 법당 곳곳에 동국진체의 대가로 일컫는 원교 圓嶠 이광사 李匡師 그리고 추사체의 추사 김정희, 덜덜 떠는 듯한 글씨체인 창암 蒼岩 이삼만 李三晩의 글씨가 모두 걸려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있다. 천은사에서 느낀 소감을 전주 아석재 현판과 편액들이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마네, 마티스, 피카소, 샤갈의 진품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왼쪽) 고택 옆에 있는 ‘강암 서예관’은 강암 말기에 지은 서예 전문 갤러리다.


1 집은 안채에 비해 정원이 큰것을 알 수 있다. 일부는 길로 내어주고, 일부는 강암 서예관 터로 내주어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정원이 크게 느껴지는 것.
2 대자리와 수석 등 소박한 가풍을 느낄 수 있는 소품들.


3 아석재의 유래가 된 현판 ‘거연아천석’.
4 기둥에는 총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렇다면 소전, 일중, 유당 같은 당대의 일급 대가들이 왜 전주까지 내려와 강암의 집에 들렀을까. 같은 업종이라 들른 것일까? 필자는 강암이 지닌 카리스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카리스마는 유학과 선비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킨, 강암이 보유한 무형의 재산이었다. 물론 강암의 글씨 탓도있겠으나, 글씨 이전에 강암이 지닌 인간적 매력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우선 강암은 패션이 남달랐다. 죽을 때까지 상투와 갓을 착용하고 한복을 입었다. 강암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이 유학자의 복장을 고수했다. 복장이 정신을 규제할 수도 있다. 상투와 갓을 쓰면 선비다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강암의 지론이었다.

“나의 팔십 평생을 지켜준 것은 상투와 갓이었다”는 것이 강암의 술회다. 그러면서도 성품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암의 4남인 송하진(58세) 전주 시장은 ‘지기추상 대인춘풍 持己秋霜 待人春風’으로 자신이 받은 가정교육을 요약하였다. ‘자기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이 강암의 처세관이었다. 이 아석재에서 강암은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대인춘풍’의 매너를 보여준 것이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강암의 명성을 듣고 남천교 옆의 아석재를 방문하였다. 글씨를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노령의 강암은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모모한 방문객이 요구하는 글씨를 쓰느라고 말년까지 고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이해타산이 걸린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이 점은 아주 칼날 같았다.

(왼쪽) 평생 붓을 놓지 않은 강암 송성용 선생.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을 위해 글씨를 써주셨다.

고향 산천 전통을 고수한 강암의 이러한 전통 고수는 선대의 가르침에서 유래하였다. 강암의 부친이 바로 유재 裕齋 송기면 宋基冕(1882~1956년)이다. 유재는 전북에서 소문난 유학자였다. 호남 3재의 한 명으로 구한말 기호학파의 종장이던 간재 艮齋 전우田愚의 고제였다. 유재는 글씨도 잘 쓰고 문장도 좋았지만, 행실이 더 뛰어나다고 칭송받던 선비였다. 유재는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일제의 탄압에 맞섰으며, 상투와 갓을 지켰다. 이런 전통이 아들인 강암에게 유언으로 전달되었다. 강암의 부인은 ‘호남 3재’ 가운데 다른 한 명인 고재 顧齋 이병은李炳殷의 여식이었다. 이 고재가 바로 전주향교의 맥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고재가 아니었으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 전주향교의 맥이 끊어졌을것이라고 회자된다.

‘호남 3재’는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남아서 일제에 절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자기 자존심을 지키면서 제자 양성과 유교 전통을 지키는 데 평생을 헌신하였다. 이것이 바로 간재의 사상이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부안의 계화도 繼華島에 들어간 간재를 비판한다. 유학자이면서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안 했다고. 전라도는 동학 때 다 죽었다. 죽창과 낫을 들고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지만 결과는 모두 떼죽음이었다. 간재는 이 동학의 처참한 죽음을 뼈저리게 보았을 것이다. 총들고 나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남아서 제자를 양성하고 유학의 맥을 지키는 일이 진정 자신이 할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간재로부터 발원해 제자인 유재, 고재로 다시 내려왔으며, 이 정신이 아들인 강암에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다들 도시로 나가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고향 산천에 남아서 전통을 지킨다. 누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 지킨다.

필자가 볼 때는 이것이 아석재에 남아 있는 가풍이라 여겨진다. 강암의 자식은 다 잘되었다. 장남인 송하철은 관선 전주 시장을 지냈고, 2남인 송하경은 성균관대 교수로 유학대 학장을 지냈으며,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루어 국전 심사위원도 하였다. 3남인 송하춘은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서 문과대 학장을 지냈고, 4남인 송하진은 현재 민선 전주 시장을 하고 있다. 이들 사 형제의 공통점은 모두 글씨를 잘 쓴다는 점이다. 집안이 잘되려면 3대가 모두 힘을 써야 한다. 조부 때 기초를 닦고, 아버지 때 빛을 발하고, 손자 때에 그 빛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아석재의 강암 집안은 이 공식에 딱 들어맞는다.


강암 서예관에서 바라본 교동 풍경. 아석재 앞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고덕산 자락이 집 앞산을 이룬다. 정면에 보이는 다리 위 정자의 현판 역시 강암 선생이 쓴 것.

아석재 앞에는 전주천이 감아 돈다. 풍수지리상 물은 곧 돈인데, 감아돌아야 돈이 모인다. 냇물 건너편에 자리한 안대 案對도 좋다. 고덕산자락이 집 앞산을 이루고 있다. 그 산자락 가운데 오른쪽으로 내려온 봉우리는 생김새가 삼각형인 필봉 筆鋒이다. 대서예가의 집에 어찌 필봉이 없겠는가? 생가필봉 生家筆鋒이요, 거가필봉 居家筆鋒이라! 호남 예향의 양대 맥이 전남은 그림이요, 전북은 글씨인데, 그 전북 글씨의 종장이 살던 집이 바로 전주 남천교 옆의 아석재인 것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 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 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 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 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출간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글 조용헌 사진 김동오 기자 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