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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고창 인촌 김성수 고택 남과 다른 길이 최고의 명당을 만든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북향 北向집 가운데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암탉이 알을 품듯 뒷산의 물줄기가 집을 감싸고, 멀리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집터는 재운은 물론 독특한 풍류와 전망까지 지니고 있다. 예부터 북향집은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신념가들이 선호하는 방향이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고택은 그 형태가 화려하거나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호남 만석꾼의 여유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지 3천 평, 인촌 김성수의 아버지 김기중과 작은아버지 김경중 일가가 함께 살았던 인촌 생가. 집은1861~81년까지 20년에 걸쳐 지었다. 솟을 대문을 사이로 왼편이 작은집, 오른쪽 안채가 큰집이다

집터의 방향이 어떠냐에 따라 거기에 내포된 의미도 각기 다르다. 먼저 동향 東向집이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집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태양은 생명의 기운을 상징하는데, 양기 陽氣의 극치가 바로 태양이다. 하루 시간대로는 진시 辰時에 해당한다. 오전 7시부터 9시까지가 진시이며, 진 辰은 용 龍을 가리킨다.
우리 선조들은 왜 태양의 기운이 환하게 비치는 이 시간대를 ‘용’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양기 때문이다. 이 양기는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단전호흡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간대의 양기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진시의 태양 기운을 받아야만 불로장생하는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사 道士가 지은 도관이나 산속에 자리한 토굴은 그 창문이 거의 동쪽을 향해 나 있다. 아예집의 방향을 동쪽으로 앉히기도 한다. 명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이나 정상 부위에 넓적한 바위가 많은데 이런 바위는 대개 단학가 丹學家들이 해 뜨는 시간에 단전호흡을 하던 장소인 경우가 많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바위가 동향으로 앉아 있으면 더욱 묘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동향은 공부하는 학생의 방으로 많이 정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늦잠을 자기 어려우므로 일찍 일어나 공부하라는 뜻으로 공부방을 동향에 배치하였다.

남향 南向은 일조량이 풍부해서 가장 선호하는 방향이다. 더위는 문제 될 것이 없으므로 집터로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이 최상의 방향이었다.
그렇다면 서향 西向은 또 어떤가. 해 저무는 낙조를 볼 수 있는 서향집은 오후 늦도록 햇볕이 깊숙이 들어온다. 늦게까지 방 안으로 쏟아지는 석양볕은 장단점이 있다. 석양을 바라보며 낮 시간 동안 쌓인 긴장을 푸는 장점이 있다. 특히 호수나 바다로 지는 낙조를 볼 수 있는 서향집이라면 휴식을 취하며 명상을 하기에는 최적의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이라는 경전을 보면 서방극락을 보기 위해서는 평소에 16관 觀을 연습해야 하는데, 그 16관 가운데 제일 첫 번째 관 觀(바라보는 법)이 일몰관이다. 즉, 서향을 많이 보라는 가르침이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한시간 정도 바라보고 나면 마음에 깊은 평화가 찾아들고 상처가 치유된다. 분노도, 허무도 명멸하는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 치유된다. 그렇다면 서향집의 단점은 무엇인가. 햇볕의 대비가 너무 심해 감정의 기복이 심할 수 있고, 자칫 잘못 조절하면 오히려 마음이 흔들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서향집은 예술가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런가 하면 간좌 艮坐 집도 있다. 간 艮 방향은 풍수가 사용하는 지 남침에서 볼 때는 서남향을 가리킨다. 이 방향은 햇볕을 가장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좌향 坐向이다. 동양의 고천문학 古天文學에서는 이 간좌 집에서 부자가 많이 배출된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천시원 天市垣이라는 별자리권이 있는데, 이 천시원은 그야말로 하늘의 시장이다. 많은 재물을 교환하고 모이는 자리인지라, 간좌의 집을 지으면 그 방향이 이 천시원을 향한다고 보았다. 하늘의 재물이 모이는 천시원을 향하면 하늘의 재물이 지상의 인간계 집으로 자연히 쏟아져 들어올 게 아닌가. 그래서 예부터 풍수에서는 ‘간좌 집이 부자터이다’라는 속설이 전한다.

필자가 과연 그런가 하고 전국의 부자 명문가 집을 답사한 결과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 있는 조지훈 고택이 간좌 집이고, 대구 화원의 만권당 萬卷堂을 갖춘 남평 문씨의 고택 또한 패철을 들이대보니 간좌였다. 이 두 집 모두 영남에서는 알아주는 부잣집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꺼리는 방향, 북향집이다. 북향은 조도 照度가 일정하다는 장점이 있다. 빛의 변화가 적기 때문에 상대 적으로 마음이 안정된다. 책을 읽거나 시험공부를 하는 데는 일정한 조도를 유지하는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 더군다나 빛이 잘 들지 않아 실내가 약간 추우므로 정신이 번쩍 난다. 따라서 예외적으로 아이 공부방은 북향을 선호하였다. 그렇지만 춥고 해가 빨리 지는 탓에 어지간하면 북향은 집 지을 때 고사하는 방향이었다. 조선시대 단학 丹學의 대가 정렴 鄭은 호가 북창 北窓이었는데, 이때의 북창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남다른 의지의 표현이었다. 도를 닦는다는 자체가 보통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만큼, 북향은 이처럼 시대 조류를 거스르고 유아독존 격으로 인생을 살겠다는 신념가들이 선호하던 방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명문가 중에서 북향집이 발견된다. 충남 아산의 설아산 자락에 위치한 ‘맹씨행단 孟氏杏壇’이 바로 북향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드높인 고불 古佛 맹사성 孟思誠(1360~1438년) 대감의 집터다. 설아산의 맥이 북쪽으로 흘러내린 자락에다 집을 지은 것이다. 뒷산의 지맥이 북향인 탓에 할 수 없이 그 지맥을 따라 지었다고 보인다. 땅의 기운이 올라오는 지맥 地脈을 제 일차적으로 고려하다 보니, 부득불 북향이라는 단점을 감수한 셈이다. 그만큼 지맥의 기운을 중요하게 쳤다. 지맥을 중시할 것이냐, 좌향을 중시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면 풍수는 지맥을 우선시한다. 왜냐하면 밑에서 올라오는 지기 地氣가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의 건강과 운 運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지구 온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름철이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온난화 시대에는 북향집도 괜찮다고 본다. 난방 시설이 발달해 더 이상 겨울 추위는 문제 되지 않지만, 여름이 길어지면서 더운 날씨가 삶을 압박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무더위에 는 북향집이 최고다. 30년 전에 ‘후천개벽이 되면 북향집이 좋아진다’ 던 어른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기후 변화로 지구가 따뜻해진다는 의미였던 듯싶다.


돌담 너머 인촌 김성수가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랑채가 보인다.

10만 석 대지주의 여유가 묻어나는 호남 최고의 명당 북향집 가운데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집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인촌 김성수 고택이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 태어난 집터로, 인촌 선생의 조부께서 1861~81년까지 20년에 걸쳐 지은 집이다. 대지만 3천 평이 넘고, 특이하게 두 집이 한데 살았다. 큰아들인 김기중 金祺中의 집과 작은아들인 김경중 金暻中이 같이 산 것이다. 이 집은 북향일 뿐만 아니라 줄포만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이 저 멀리 바라다보인다. 고창군 줄포만의 바닷물이 활처럼 멀리에서 이 집 주위를 감싸는 형국이다. 바다를 면하면서 북향으로 앉은 집은 우리 땅에 아마 이 집 한 채뿐일 것이다. 그만큼 희귀한 방향과 전망이다. 풍수에서 그 집터에 재물이 많은지, 적은지를 판단할 때 보는 첫 번째 기준이 물이다. 집 주위에 냇물이 휘감아 돌아가거나, 아니면 집터 앞쪽으로 호수나 연못이 있으면 돈이 모이는 터라고 본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특징도 휘감아 도는 강물이고, 이 강물이 곧 재물을 상징한다. 인촌 고택이 굳이 북향으로 터를 잡은 것도 줄포만이라는 바닷물을 중시한 때문이다. 과연 인촌의 선대는 이 집에서 큰돈을 벌었다. 이 집을 짓고 나서 호남 최고의 부잣집이 되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어찌 된 연유로 울산 김씨인 인촌의 조부가 이 터에 집을 지었을까?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터줏대감은 연일 延日 정씨 정계량 鄭季良이었다. 정씨 일가가 현재의 인촌 생가터 옆에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정씨 집안 역시 만석꾼으로 큰 부자였다. 만석꾼 정계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는데, 이 외동딸에게 데릴사위로 장가를 온 인물이 바로 인촌의 조부인 낙재 樂齎 김요협 金堯莢이었다. 김요협은 가난하지만 총명하고 성실한 청년이었기에 만석꾼인 정계량이 자신의 외동딸을 내준 것이다. 당시 김요협은 고창군과 이웃한 전남 장성군에 살았는데, 장가를 들면서 처가 동네인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잣집 데릴사위로 오면서 재산은 얼마나 받았을까. 당시 쌀 8백 석 이었다는데,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80억 원 정도 될까. 인촌의 조부인 김요협은 이재에 능해 8백 석을 종잣돈으로 재산을 불렸는데,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처갓집 옆 터에 새로 집을 지은 것이다. 본디 이 터는 연못이었다고 전하는데, 이처럼 연못을 매립해서 집을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드물게나마 불찰 佛刹 가운데 연못을 매립해서 짓는 경우는 가끔 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가 그런 경우고, 김제의 금산사 터도 연못을 숯으로 메운 다음 지은 사례다. 하지만 이렇게 매립해서 지은 터는 기운이 세다고 말한다. 종교 시설이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거처할 집을, 그것도 연못 터에 짓는 것은 상당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도박을 감행한 것을 보면 주변에 상당한 내공을 갖춘 풍수가 조언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험한 도박에 큰돈 남는다’는 속설처럼 김요협은 연못을 매립한 후 줄포만을 끼고 북쪽을 바라보는 매우 과격한(?) 집을 짓는 도박을 감행했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고명한 지관 地官을 만나는 것도 인연복 因緣福이다. 괜스레 돌팔이 만났다가는 패가망신한다.

(왼쪽)
큰댁의 안채. 김성수 선생의 조부모 사진이 걸려있다


안채의 세간은 모두 고려대학교에 기탁했다

(왼쪽) 김성수, 김연수 집안 모두 손이 많았다. 마당 한 켠 석조물에 자손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오른쪽) 김성수 선생의 좌우명 공선사후 公先私後.

인촌 집안은 대대로 풍수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인근에 이름난 지관이 있으면 이들에게 아주 후한 대접을 해온 것으로 소문나 있다. 요즘 돈으로 치면 지관이 자리 하나를 잡아주면 몇억 원씩 안겨주었다. 어떤 지관은 아예 인촌 집안에 방을 하나 차지하고 상주하였다. 그 이후 호남의 소문난 명당은 인촌 집안 차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줄포만 일대의 고깃배가 출어를 하려면 식량과 어구를 마련할 목돈이 필요했는데, 이 목돈을 빌릴 때 김씨 집안에서 빌리면 재수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일대의 선주 대부분이 인촌 집안에서 돈을 빌렸다고 전해진다. 집터 자체가 돈이 모이는 명당이고, 기가 센 만큼 그 돈도 재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이 윗집, 아랫집으로 살았다. 기중, 경중 대에 와서 재산이 3만 석으로 불었다는데, 혹자는 10만 석이라고도 한다. 동학혁명 무렵에 일본 쌀장사치들이 호남평야의 쌀을 대량으로 매입한 다음 당시 메이지유신으로 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에 내다 팔았는데, 서너 배의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일본 상인들이 이렇게 쌀장사를해서 큰돈을 버는 것을 보고 인촌의 생부 生父인 김경중과 양아버지인 김기중도 쌀장사에 뛰어들었다. 시대 흐름을 간파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거부가 된 기중과 경중의 재산을 인촌 김성수가 상당수 물려받았다. 인촌은 경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큰아버지인 기중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가 결국 두 집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은셈이었다. 물론 인촌의 동생인 김연수도 형 못지않은 재력가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최대의 회사로 꼽힌 경성방직이 두 형제의 작품이다.

김성수는 자식을 많이 낳았는데, 무려 13남매를 두었다. 인촌의 동생인 김연수도 슬하에 13남매를 두었다. 형제가 합해서 26남매를 두었는데 김성수, 연수의 수洙 자 항렬 다음이 상 相 자 돌림이었다. 즉, 이 상 자 항렬이 남녀를 합해 도합 26명이라는 이야기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김상만,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김상하, 삼양사 회장 김상홍, 김상기, 김상흠 등이 모두 이 상 자 항렬이다. 근래에는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을 겪은 전 농림부 장관 정운천이 인촌 생가에서 태어났다. 정운천의 조부 정해로가 정계량의 양자로 들어가 정운천 전 정관이 인촌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이다. 인촌 대에 고려대와 <동아일보>를 설립하면서 김씨 일가가 서울로 올라가자, 외가쪽 후손인 정운천의 아버지에게 이 집의 관리를 부탁하게 되면서 정운천 전 장관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언젠가 정운천 전 장관이 인촌이 태어난 아래채 골방에서 자신이 태어났으니 자신도 좋은 기를 받지 않았겠느냐며 필자에게 자랑한 바 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의 인촌 생가는 1800년대 후반 호남 부잣집의 주택 구조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한옥이 으리으리하게 크고 높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풍성함이 느껴진다. 3천 평이 넘는 집터가 호남 대지주의 여유를 보여주는데다, 줄포만의 바닷길이 보이는 집터라는 점에서 독특한 풍류와 전망을 자랑한다. 한마디로 한국 북향집의 전형이다.

(오른쪽) 안채 마당에 자리한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상.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출간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글 조용헌 사진 김동오 기자 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