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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3백 년 역사적 산실, 당진 인씨 고택
서울에서 1시간 30분, 충남 당진군 통정리에 가면 4차선 도로 바로 옆에 3백 년 역사를 가진 교동 喬桐 인씨 印氏 고택이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 나무 무역을 했다는 이 집안은 중국에서 뗏목으로 수입한 소나무만 사용해 집을 짓고, 후대에는 경복궁의 기와를 얹는 등 3백 년 동안 전통 한옥의 맥을 이어왔다. 당진이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지였다는 사실을 품고 있는 역사적 산물이다.


대문 앞 만개한 백일홍이 인상적인 인씨 고택. 간척지 사업과 개발로 산 위에 있던 집이 지금은 4차선 도로 바로 옆에 자리한다.

충남 당진군 석문면 통정리. 이 일대는 수백 년 된 인씨들의 집성촌으로, 대대로 당진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교동 인씨 고택 한 채가 남아 있다. 저택의 사랑채와 행랑채는 세상 풍파에 휩쓸려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어찌어찌 본채만 겨우 남아 있다. 당진 일대에서 떵떵거리던 만석꾼의 저택이 몰락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없는 고택이 되어버렸지만, 이 집이 중요한 이유는 중국에서 바다를 통해 건너온 중국산 소나무로 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서까래에 기록된 연도로 유추하면 1672년에 건축했거나 증축한 집이다. 17세기 후반, 조선 현종대의 건축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어떻게 중국의 목재를 이곳 충남 당진까지 운반해올 수 있었을까?


1 여자들이 살기 편한 동선으로 고친 인씨 고택. 종부 윤주임 씨가 시집올 때 남편 고 인목헌 씨가 현대식으로 개조해 서까래, 대청 마루 등 옛 한옥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마루 쪽에 제기를 두는 수납장이 자리하고 있다.

집을 지은 연도로 따져보면 중국 청나라 시절이다. 당진은 해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하여 이름 또한 당진 唐津 아닌가! 삼국시대부터 중국 당 唐나라로 가는 항구인 탓이다. 당진에서 조류와 바람을 잘 만나면 불과 이틀 만에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중국과의 최단거리 해상 고속도로라고나 할까. 육로를 거치면 두 달 이상 걸릴 거리를 이틀에 갔다면, 이는 실로 대단한 속도다. 특히 맨몸이 아니라 화물을 싣고 갈 때는 바닷길의 위력이 훨씬 크다. 지게에 쌀을 얹은 채 어찌 험준한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겠는가. 배에 실으면 한번에 많은 화물 적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당진 일대는 수많은 배와 사람이 화물을 싣고 오가던 해상로다. 그렇다면 당진에서 출발한 배가 도착하는 지점은 중국의 어떤 지점일까? 대개는 산둥 반도였다. 산둥 반도는 한반도를 향해서 툭 튀어나온 반도 지세다. 산둥 반도에서 보면 한반도가 안산 案山에 해당한다. 안산은 바람을 막아주고 기운을 반사하는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강물은 대개 서해안 쪽으로 흘러나오는데, 거시풍수 巨視風水로 보면 산둥은 이 한반도 강물의 기운을 받는 지점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런지 산둥은 중국 전역에서도 걸출한 인물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도 산둥 출신이고, 음양오행 사상도 산둥에서 만들어졌고, 신선 사상도 산둥이고, 제자백가의 수많은 사상가들도 산둥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진액은 산둥이고, 이 산둥은 한반도의 서해안 당진 일대와 최단거리 지점이다. 당연히 한반도와 가장 역사적 교류가 활발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는 고려에 비해 중국과의 무역이 위축된 시기였다. 공식적으로는 육로를 통해 중국 연경에 간 사신을 통해 간간이 무역이 이루어졌을 뿐 민간 차원에서는 중국과의 무역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당진 사람들은 그러한 조선시대에도 바다를 통해서 산둥과 장사를 많이 한 모양이다. 당진의 교동 인씨 집안은 산둥과의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집안이다. 당진 상인들은 조선에서 나는 인삼과 토산품을 배에 싣고 가서 중국의 물품과 교환한 듯하다. 그런데 인씨들은 그 물건 대금으로 중국산 소나무를 샀다. 그러고는 이 소나무들을 뗏목으로 만들어 당진으로 들여온 것이다. 벽돌이 소용되지 않는 나무집인 한옥을 짓는 데 소나무가 필수 목재이기 때문이다. 벽돌은 흙으로 찍어내면 그만이지만, 한옥을 지으려면 산에서 둥치가 굵은 나무를 잘라 운반해야 하는 데다 목재로 쓸 만하게 자라는 데도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대들보에 올릴 만한 큰 둥치의 소나무는 당시 조선에서 무척 귀했다.


2 아궁이 아래 마차 바퀴가 남아 있다. 집안에 내려오던 전통 운송 수단으로 나무를 옮기는 데 사용했을 것이라 전해진다.
3 대대로 손이 귀하던 교동 인씨의 조상들. 1900년대 초 사진사를 불러 인물 사진을 찍을 정도니 당시 어느 정도의 재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은 집집마다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난방을 해결했기 때문에 산에 큰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또한 소나무 벌목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민간인이 허가 없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면 치도곤을 당하고 벌금도 물어야 했다. 그런데 청나라 산둥 일대에는 집을 짓는데 필요한 둥치 큰 소나무 목재가 많았던 모양이다.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가 목재 수입인데, 목재는 육로를 통해서는 결코 운반할 수 없다. 아스팔트 도로도 없고 트레일러도 없던 그 시절에 지름 1m, 길이 10m가 넘는 목재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방법은 바다였다. 물에 뜨는 목재의 성질에 더군다나 당진은 산둥 반도를 잇는 최단거리 항구였다. 그러므로 목재 무역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당진 일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종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청운 조용헌 선생과 종부 윤주임 씨.

인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산둥에서 출발한 소나무 뗏목은 석문면 통정리 인씨 고택 앞의 개흙밭까지 도달하는 데 대략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돛을 단 배는 바람을 맞으면 빨리 갈 수 있지만, 수백 개의 소나무를 엮은 뗏목은 돛이 없어 바람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진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진의 물길은 세 군데에서 오는 물이 모두 합수 合水를 이루는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고 한다. 이 부분은 배를 타본 당진 토박이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뗏목을 타고 황해를 몇 번이나 건넌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말에 따르면 물길은 세 가지 조건이 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는 해류 海流로, 쿠로시오 해류를 예로 들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 쪽을 향해 올라오는 거대한 바닷물의 흐름인데, 이 해류를 거슬러 항해할 수는 없다. 둘째는 조류 潮流이다. 해안가에서 나타나는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바닷물의 흐름을 말하는데 보름일 때의 물길과 그믐일 때의 물길이 달라, 이 조류의 흐름을 모르면 배가 엉뚱한 지점으로 갈 수 있다. 셋째는 바람인데, 한반도의 여름철에는 동남풍이 불고, 겨울에는 북서풍이 분다. 항해는 바람을 타야 하므로 산둥에서 소나무 뗏목단을 이룬 인씨 선조들은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감안하며 당진으로 오는 항로를 개척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번 소나무 뗏목이 석문면 통정리에 도착하면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석문면 일대의 땅을 사들여 인근 대부분의 땅이 교동 인씨 소유가 되었다. 원래 인씨 고택 앞은 개흙밭이었는데, 이 때문에 산둥에서 가져온 소나무를 보관하기 좋았다.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을, 지금은 간척해 논으로 변한 것. 한옥을 짓는 데 사용하는 목재는 충분히 건조해야 한다. 건조가 안 된 생나무를 이용해 집을 지으면 완성한 후 골격이 뒤틀리고 나무 틈새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짠 바닷물에 담긴 채 산둥에서부터 한 달 정도 걸려 도착한 소나무는 일급 상품으로 쳤다. 게다가 통정리 앞 개흙밭에 장기간 방치한 소나무는 자연스레 해풍과 바닷물에 자연 건조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짠 바닷물이 방부제 역할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소나무는 집 짓기에 가장 적합한 목재로 거듭났다. 인씨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둥 뗏목 장사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강풍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황해를 건너오는 도중에 뗏목을 엮은 줄이 끊어져 나무가 망망대해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이 없으면 풍랑에 손해 보고, 운이 좋으면 엄청난 이득을 보는 일종의 투기성 사업인 셈이다. 이런 목재 무역상이 당진에 여러 집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재미를 많이 본 집이 인씨 집안이었다. 중국과 무역을 하려면 중국어가 필수 조건인데, 이 집안은 주특기가 중국어였다 한다. 특히 교동 인씨 55세손인 인정호(1775년생) 씨는 머리가 비상하고 사업 능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집에 사용한 목재들을 보면 색깔이 좀 어두운 편인 데다 거무스름한 색이 배어 있다. 다른 전통 한옥의 목재보다 더 어둡다. 기둥으로 사용한 나무의 형태도 반듯하지 않으며 약간씩 뒤틀려 있다. 집 구조도 일반적인 한옥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 마루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의 네 채가 배치되어 있는데, 방과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앞쪽과 뒤쪽은 툇마루가 있어 마루를 거치지 않고 방에서 건넌방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동선을 고려해 편안하게 지은 셈이다. 여자들이 살기에 편안한 것은 남아 있는 이 집이 안채였기 때문이다. 맨 왼쪽 방은 마루가 1m 가까이 올라와 있다. 마루 밑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고, 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공간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마루를 높여 설계한 것이다. 안채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이처럼 높게 만든 것도 일반 한옥에서 보기 힘든 점이다. 대개 이런 높은 아궁이는 사랑채에 있다. 왠지 모르게 중국의 영향이 느껴지는 집이다. 1672년에 지었다면 어언 3백50년 된 집으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집의 원형이 변모되었다.


1 언덕 위에서 바라본 안채와 장독대, 별채 모습.
2 동경대 토목과를 졸업한 후손의 조부는 생전에 터널과 고속도로 등 굵직한 나라 사업을 도왔던 인물이다. 궁궐 공사를 맡아 지휘하던 그는 경복궁 보수를 하면서 남은 기와를 가져와 집을 보수하는 데 사용했다. 유난히 까만 기둥은 우리나라 소나무를 사용했기 때문. 집을 짓다 기둥 하나가 모자라 우리나라 소나무를 사용했단다.



3 아궁이 때문에 계단식으로 한 단 올라간 쪽마루. 집안에 내려오는 문헌과 족보도 잘 정리되어 있다.
4 대문 옆 아담한 장독대의 모습.


20세기에 들어와 진행된 그 변모 과정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경 안채에서 후원을 내다보는 창에 유리를 달았다. 1920년에는 행랑채 일부를 헐어내 머슴에게 주었다고 한다. 1920년~1935년 무렵에는 일제의 영향으로 행랑채와 사랑채를 모두 철거했다. 그리고 16칸 마루에 방 6칸, 부엌 4칸의 아래채를 지었다. 일본식 유리문을 단 집으로, 기둥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소나무를 사용했다. 아직도 그 유리문이 보존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었던 최초의 유리다. 현 후손의 조부인 인권식 印權植 씨는 일제강점기에 동경 일고를 나와 동경대 토목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는데, 그가 서울 궁궐 공사를 맡아 지휘하던 중에 경복궁 기와를 보수했다 한다. 그때 보수하고 남은 경복궁 기와를 가져와 지금 남아 있는 집의 지붕 기와로 다시 올렸다고. 즉, 지금 얹힌 기와가 경복궁의 기와인 것이다. 아래채를 지을 당시에는 일본의 유명한 도편수를 데려와 손을 봤다. 그 때문에 어두운 위채와 달리 아래채는 유리문을 달아서 실내가 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웃들이 아래채를 구경하기 위해 종종 들르곤 했다. 1940년에는 일본 도편수가 지은 집이 낡아 비가 새자 이 집을 헐고 당시 당진 읍내의 신행여관을 짓는 데 자재로 사용하도록 하고, 지금의 문간채를 지었다. 1975년에는 문간채의 부엌을 없애고 방을 2칸 반으로 개조했다. 부엌을 개조해 집 안에 목욕탕과 화장실을 만들고, 지난 1990년에는 다락을 없앤 후 입식 부엌을 들였다. 아래채도 부엌을 없애고 긴 방을 만들었다. 이런 부침을 거듭한 결과 남은 집이 현재의 고택 형태다.
이 집은 구조나 외관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별반 볼품도 없다. 대대로 목재 무역업을 한 인씨들이 산둥 반도에서 바다를 통해 뗏목으로 운반한 중국 소나무를 썼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그 시기도 조선 중기인 1600년대 후반이다. 반면 이는 민간인이 독자적으로 배를 띄워 산둥까지 교역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진이 지닌 한·중 해양 교류사의 비중을 웅변하는 집인 셈이다.
당시에는 한 달이 넘게 걸려 도착한 이 소나무를 이용해 지은 집이 많았겠지만,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집은 이 한 채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사실만으로도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하지 않는가.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중국 산둥, 당진과 활발하게 해상 교류를 했왔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조용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