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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효주 허만정 고택 손꼽히는 풍수 명당에 지은 의로운 부잣집
고택경상남도 일대에서 돈이 모이는 명당으로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勝山里 일대가 손꼽힌다. 이곳의 대표적 집안이 GS그룹의 허씨와 LG그룹의 구씨 일가다. 구한말의 만석꾼인 허준과 그 아들 허만정은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고, 학교를 세웠으며, 좌우익 충돌의 완충 역할을 한 의로운 부자였다. 만석꾼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박한 이 집이 바로 허씨 집안 융성에 불을 지핀 아궁이 같은 곳이다.

1920년에 만석꾼 허만정이 지은 미음 자 형태의 한옥. 본채, 사랑채, 곶간채와 학생들의 공부방인 안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에는 손님을 접대하느라 소다리가 매일 걸려 있을 정도로 인심이 후했다.

부잣집영남의 명당 반촌 班村을 말할 때 네 군데를 꼽는다. 경주의 양동마을에는 우재 愚齋 손중돈 孫仲暾의 후손인 손씨와 회재 晦齋 이언적 李彦迪의 후손인 이씨들이 산다. 안동 하회마을은 하회 류가의 집성촌이다. 안동의 내앞(川前)마을은 의성 김씨들의 터전이다. 봉화의 닭실(酉谷)마을은 충재 沖齋 권벌 權의 후손들이 터 잡고 있다. 이 네 곳이 영남에서 거주할 만한 곳으로 꼽히는 명당이자 양반 동네이다. 그런데 이곳은 모두 경북에 집중되어 있다. 경남은 한 군데도 없다. 영남 우도인 경남에 어찌 명당이 한 군데도 없겠는가? 경남은 남명 南冥 조식 曹植의 수제자인 내암 內庵 정인홍 鄭仁弘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이후 발언권이 사라진 것 같다. <택리지 擇里志>를 쓴 청화산인 靑華山人 이중환 李重煥만 하더라도 당색이 남인이다. 경북의 퇴계 쪽 학맥은 당색이 같은 남인이므로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꼈겠지만, 경남은 정인홍 이후 북인이었으므로 이중환과 당색이 달랐다. 그러다 보니 이중환도 경남 지역의 동네에 대해서는 다소 거부감 내지는 편견이 있었을 수 있다. 그래서 경남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소략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경남 지역을 여러 군데 답사해본 결과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일대는 손꼽을 만한 명당이다. 무슨 연고로 명당인가? 재물로 명당이다. 돈이 모이는 터라는 이야기다.
동네의 전체 지세가 방어산 防禦山에서 내려온 맥이 한 바퀴 돌아서 터를 이루고, 그 맥이 다시 출발지인 방어산을 쳐다보는 형국이다. 이른바 풍수에서 말하는 회룡고조 回龍顧祖형이다. 이렇게 되면 지맥의 기운이 뭉쳐 있다고 본다. 게다가 동네를 둘러싼 주변 산에 살기가 없다. 돌출된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다음에는 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펴야 한다. 동네 앞에 두 가닥의 냇물이 흐르는 데, 실개천은 동네를 관통하면서 흐르고, 큰 개천은 동네를 감아 안으면서 흘러간다. 그런데 이 바깥 개천의 물이 빠져나가는 길목인 수구 水口를 구슬등이 잘 감싸 안고 있다. 풍수에서는 물이 빠져나갈 때 그냥 맥없이 나가버리면 돈도 곧바로 빠져나간다고 본다. 못 빠져나가도록 물을 한 번 막아주는 천연 장치가 필요한데, 대개는 이 수구막이 용도로 일부러 나무를 심기도 한다. 승산리는 구슬등이 수구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특히 이채롭다. 구슬등이 손목을 구부린 것처럼 물을 한 번 막아주는 형국이다. 돈을 모아주는 풍수적 장치인 것이다. 구슬등 반대쪽에는 ‘떡바위’라고 부르는 네모진 바위가 있는데 이 역시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동네 바로 앞에는 밥상처럼 생긴 안산 案山이 자리 잡고 있다. 네모진 밥상 모양의 이 안산도 아름답다. 마치 진수성찬을 한가득 차려놓고 동네 사람에게 ‘잘 드십시오!’ 하고 대기하는 모습이다. 이런 점들이 승산리가 부자 터임을 말해주는 요건들이다.
지수면에는 일제강점기에도 만석꾼 한 집, 오천석꾼 세 집, 천석꾼 여덟 집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지역에 이처럼 부자가 몰려 있다 보니 그 당시에도 영업용 택시가 두 대나 있었다.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도 택시를 이용할 손님이 그만큼 있었다는 이야기다. 승산리에는 정육점도 세 군데나 있었다. 평소에 고기를 사 먹는 수요가 그만큼 많았음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지수면에 자리한 지수초등학교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동학 同學한 학교다.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효성의 조홍제 세 사람이 지수초등학교 동창이다. 삼성 三星이라는 이름을 명명한 계기도 재미있다. 처음에 삼성을 시작할 때에 세 사람이 동업을 했는데 이병철, 조홍제 그리고 허씨 집안의 허정구다. 이 세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삼성’이라고 지었다는 것. 이병철은 사장, 조홍제는 부사장, 허정구는 전무를 맡았다. 동업을 해오던 세 사람은 4・19 직후에 서로 갈라섰다. 무엇보다 승산리의 대표적인 두 집안을 꼽으라면 허씨와 구씨 일가다. 허씨는 오늘날 GS그룹을, 구씨는 LG그룹을 이뤘다. 원래 LG의 구인회가 1947년에 락회화학공업사를 창업할 당시 같은 동네에 살던 허씨들이 투자를 했고, 50년 넘게 사이좋게 동업을 유지해오다 이 두 집안이 몇 년 전에 합의하에 분리했다. 이른바 ‘아름다운 이별’이다. 성씨도 다른 두 집안이 소송 없이 아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이별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아름다운 이별이다. 두 집안 모두 유교적 가풍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러한 미담이 생겨났다고 본다. 가풍이란 돈 앞에서도 집안 어른의 말을 들을 때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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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입구 지붕 너머 밥상처럼 납작하게 생긴 안산이 바라다보인다. 승산리가 부자 터임을 말해주는 요소 중 하나다. 2 본채와 곳간채 사이에 자리 잡은 아담한 우물이 정겹다. 3 본채 뒤안에 빽빽하게 심은 대나무는 뒷산에서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가림막 역할을 한다.

승산리에 입향한 역사를 추적해보면 허씨들은 약 5백 년이 되었다. 터줏대감인 것이다. 허씨 가문이 본격적인 만석꾼이 된 시기는 구한말의 지신정 止愼亭 허준 許駿 때부터다. 의병 활동을 하던 면암 勉庵 최익현 崔益鉉이 지신정을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경상도이지만 허씨 집안은 역대로 노론 老論이고, 부자였기 때문에 최익현이 의병 자금을 부탁하러 온 듯하다. 이 시기부터 허씨들은 의장답 義莊沓을 운영하였다. 의장답이란 공공사업을 위하여 허씨들이 사유재산을 출연해 조성한 땅을 이른다. 흉년이 들면 구휼하고, 공공사업, 장학금 등에 이 돈을 썼다. 지신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효주 허만정의 후손이 특히 번창하였다. 허만정은 만석꾼의 아들이었지만, 항일 감정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우선 독립운동 단체인 백산상회에 거금을 투자했다. 말이 투자지 사실 독립운동을 위해서 돈을 기부한 셈이다. 이 백산상회는 경주 최 부자, 옆 동네인 의령 출신의 백산 白山 안희제 安熙濟, 그리고 지수면의 허만정이 주도적으로 돈을 내고 운영한 상회였다. 허만정은 일경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독립 자금을 댔다. 학교도 세웠다. 허만정은 진주에 남자 고등학교를 세우려고 부지도 이미 매입했지만 일제가 학교 설립 허가를 거부하였다. 독립운동가를 양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할 수 없이 여학교를 세웠는데, 그 여학교가 지금의 진주여고다. 진주여고는 오늘날 공립학교로 되었지만, 원래는 허만정이 돈을 출연해 설립한 학교였다가 해방 후 허씨 후손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공립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하층민인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사 운동’에도 허만정이 돈을 댔다. ‘만석꾼 아들이 백정 운동을 도와줬다’고 해서 당시 화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남해대교 밑에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었는데, 이 충렬사를 중수할 때도 허만정이 돈을 기부하였다. 혹시 모를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허만정은 중수기에서 이름의 끝 자인 ‘정 正’을 ‘정’ 자 위에 갓머리를 씌운 ‘정 ’자로 바꿔 써서 이름을 남겼다.
허만정이 1920년대에 지은 자신의 집이 현재 이 고택이다. 미음(ㅁ) 자 형태로 된 한옥으로 본채는 5칸, 사랑채는 4칸이다. 안사랑채가 있고, 안사랑채 맞은편에 곳간채가 있는 그리 큰 집은 아니다. 보통 몇백 석 하는 동네 부자가 살 만한 크기의 집이지, 만석꾼의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박한 규모다. 재목으로 최고급 홍송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송진이 조금씩 배어 나온다. 정지(부엌)에는 손님을 접대하느라고 매일같이 소다리가 걸려 있었다고 하며, 특히 생선인 대구탕을 많이 해서 접대하였다. 대구는 트럭으로 들여올 정도로 많이 소비하였다. 경남에서는 남자들이 술 마신 다음 날 가장 시원하게 먹는 음식이 대구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밥상 모양의 안산이 앞에 바라다보이고, 대문 앞으로는 실개천이 내당수 內堂水 기능을 하면서 흘러가는 이 집에서 허만정은 형평사 운동, 백산상회, 진주여고 설립과 같은 일들을 벌였다. 그리고 이 집에서 첫째 허정구, 둘째 허학구, 셋째 허준구, 넷째 허신구, 다섯째 허완구를 비롯한 남매들이 태어나고 자랐다. 이 가운데 셋째인 허준구는 일찍 작고한 작은아버지 허만옥(허만정의 동생)의 양자로 들어갔다. 허준구의 아들이 바로 허창수, 허정수, 허진수, 허명수, 허태수인데, 장남 허창수는 현재 GS그룹의 회장을 맡고 있다. GS칼텍스 회장을 맡고 있는 허동수는 첫째인 허정구의 차남이다. 어떻게 보면 GS그룹은 허씨 집안 전체가 운영하는 가업이다. 집단 지도 체제라고나 할까. 회장 일인 소유라기보다는 집안이 공동으로 운영하는데, 회장은 잠깐 그 직책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유교적 자본주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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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정의 부친 허준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신정 止愼亭’이라 이름 붙인 아름다운 정자. 허씨 집안의 개인 쉼터이자 손님 접대 공간. 2 사랑채와 본채를 잇는 통로. 재목은 최고급 홍송을 써서 지금도 송진이 조금씩 배어 나온다. 3 허씨 집안 사람으로서 이 집을 관리하는 허성호 씨와 인터뷰하는 조용헌 씨.

이 동네는 6・25 때에도 인명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주들이 많은 부자 동네에서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소에 쌓아놓은 적선이 없으면 난리가 터졌을 때 그 피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해방 직후에 당시 친일적 親日的이던 지수 면장을 죽이려고 동네 청년 30명이 죽창을 들고 왔을 때, 이를 안 허만정이 그 청년들을 가로막아선 일화도 전해진다. “면장을 죽이려거든 나 먼저 죽이고 가라”라며 큰 소리로 외쳤는데, 분개한 동네 청년들이 항일에 앞장선 어른인 허만정을 모를 리 없었다. 허만정의 기개 덕에 면장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지리산에는 북으로 가지 못한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지리산과 가까운 지수면에도 우익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빨치산 선발대가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빨치산 의령대장이 함안 조씨였다고 하는데, 이 대장 역시 허만정이 나서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지수면에는 살생이 없었다. 얼마 후, 우익 쪽에서 좌익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나섰을 때도 효주 공이 우익을 설득하였다. 효주 공은 출신 성분이 지주 집안인 덕에 우익 인사들도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발발해 전세가 역전되어 빨치산과 인민군이 합세하여 우익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했을 때도, 역시 효주 공이 전면에 나서서 살생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지수면이 이처럼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 그리고 6・25라는 살상전에서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격랑의 시기, 아버지인 효주 공과 함께 차남인 허학구가 보인 행적도 이채롭다. 허학구는 경기고를 다녔다. 운동을 많이 해서 힘이 좋았던 허학구는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 형사 요시다를 서울 계동의 골목에서 만나 실컷 두들겨주었다고 한다. 허학구의 친한 친구이자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인물이 박갑동이다. 허학구와 박갑동은 나란히 퇴학당한 뒤, 나중에 두 사람 모두 일본 유학을 떠난다. 허학구는 메이지대 경제학과를 다녔고, 박갑동은 와세다대를 다녔는데 허씨 집안 의장답에서 박갑동의 유학 장학금도 댔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에 박갑동은 남로당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조직을 거의 총괄하는 직책에 있었고, 허학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향 지수면에 돌아와 동네 이장을 하였다. 만석꾼의 아들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허학구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어떤 공직에도 나가지 않고 동네 이장을 했다는 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허학구가 이장을 맡은 시기는 해방 이후부터 6・25 직전까지였다. 좌우익이 격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항일 의식이 강한 허학구가 이장을 맡음으로써 명분 없는 살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지 싶다. 보도연맹 사건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좌익 쪽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도연맹인데, 우익에서 어느 날 이 사람들을 죄 불러내서 모두 총살시킬 예정이었다. 이 낌새를 알아챈 허학구는 보도연맹 연루자들에게 비밀리에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일 자네 나오라고 부르거든 절대 나가지 말게. 나가면 죽을 테니 오늘 밤에 피신하는 게 좋겠네” 하며 귀뜸해 여러 사람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허학구는 1950년대에 부산으로 가서 럭키전자 전무를 지냈다. 구인회가 사장을 맡고, 허학구가 전무, 구자경이 상무를 하던 시절이다.
만석꾼이면서도 항일운동에 많은 자금을 대고,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에서도 완충 작용을 하며 사람들을 살린 허학구. 그의 후손들은 모두 잘되어서 오늘날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심이 바로 지수면의 승산리에 있는 효주 허만정 고택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