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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지은 집]건축가 김승현 씨가 설계한 산청 주택 창이 액자가 되고 가구가 작품이 되는 공간
주택지리산 끝자락, 웅석봉 아래 새집처럼 조용하게 자리 잡은 벡터 하우스는 건축가 김승현 씨가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 지은 집이다. 살림하는 어머니가 편안하고, 목공예가인 아버지가 만든 가구가 가장 빛날 수 있도록 설계한 시골 공방의 갤러리 하우스.

종일 해가 들 수 있도록 벽면을 통창으로 설계한 안방. 병풍과 작은 함, 소반 등의 좌식 공간으로 연출했다.

경남 산청, 웅석봉 아래 시원스레 뻗은 계곡. 서울에서 네 시간 달려 도착한 지리산 끝자락 시골 마을에 목공예가 김동귀 씨의 공방이 있다. 지난 20년간 이곳에서 가구를 만들던 그는 얼마 전 공방 옆의 오래된 농가 주택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바로‘벡터 하우스 vector house’. 산사의 적막함이 감도는 시골 촌락에 이런 세련된 영어 이름의 주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구조적인 외관이 돋보이는 건축물은 ‘벡터 하우스’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처럼 무척 반듯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숲의 바람, 햇볕의 숨소리를 담다 촬영 팀을 반갑게 맞은 집주인 김동귀 씨는 진주 산업대학교 인테리어 재료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목공예가다. 이 집의 설계를 맡은 명승종합건축 김승현 씨는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젊은 건축가. 산골에 집을 짓는데, 그것도 구만리 길인 미국에서 유학 중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다니 그 특별한 사연이 무얼까 궁금했다. 건축주와 건축가, 두 사람이 부자 父子 사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학 졸업 후 건축사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히다 결혼 후 유학을 떠난 아들 김승현 씨가 고생하신 부모님을 위한 선물로 집을 설계했다는 가슴이 땃땃해지는 스토리를 듣노라니,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고 집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오른쪽)
어천 계곡의 작은 도랑이 흘러 연못을 만든다. 원추리, 철쭉 등 계절 꽃이 어우러져 따로 조경이 필요 없다.  (왼쪽) 지난 5월 초 잠시 귀국한 건축가 김승현 씨와 어머니 최경자 씨, 아버지 김동귀 씨.


집터 바로 옆에 자리한 계곡의 이름은 어천 魚川. 진주 시내에서 산청계곡으로 이사 올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 승현 씨는 어린 시절 놀던 계곡의 이름에서 모티프를 얻어 집을 물고기 형태로 설계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작은 도랑이 되어 집터를 가로지르는데, 도랑의 형태를 해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 집을 앉히다 보니 가운데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지다 다시 넓어지는 물고기 모양이 된 것. 설계 시 지형의 특성을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건축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형과 건축의 관계는 저의 끊임없는 관심사였습니다. 벡터 vector는 사전적 정의로 크기와 방향, 웅장함을 가지고 있는 물리량을 뜻하는데, 1900m에 이르는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이 집은 그 이름처럼 자연 지형의 크기와 방향을 그대로 담고 있지요.” 사실 자연 속에서 건축물을 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에서 발견하는 풍부한 이미지를 수용하려다 보면 이내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게 마련. 작은 도랑이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집터는 빛을 충분히 들여야 하는 동쪽 면은 계곡물이 넘치는 것을 대비해 옹벽을 높이 쌓아 늘 그늘져 있다. 또 산자락의 정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서북쪽이라 창을 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 같은 대지의 제한적 요소를 하나하나 고려해 집을 설계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비스듬하고 엇갈린 형태가 된 것. 직각 형태의 공간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어긋난 형태가 된 내부 벽면은 되레 동적인 묘미를 자아내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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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아래 거실에는 사방탁자부터 반닫이 등 그가 만든 가구와 조형 작품이 놓여 있다. 2 1층 서재와 게스트 룸. 설계상 꼭 필요한 내력벽을 파티션처럼 세워 공간을 분리했다.
3 창 너머 풍경이 하나의 그림이 되고 손수 깎아 만든 목공예품이 작품이 되는 갤러리 하우스. 4 비스듬한 벽면 구조와 수납 가구가 역동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주방.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해 등산객은 물론 여름에 래프팅을 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요. 더구나 목공예 공방과 가구 전시장이 있어 늘 사람이 끊이지 않지요.” 김승현 씨는 이러한 외부 요인을 집의 공간 구획에 반영했다. 방은 오직 2층 침실 하나뿐. 아버지 김동귀 씨가 주로 생활하는 서재는 전면 창과 덱 deck을 통해 마당과 공방, 가구 전시관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현관 앞쪽으로 비스듬히 좁아지는 형태의 복도를 지나면 주방과 거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2층 침실로 오르는 계단을 마주하게 된다. ㄱ자로 꺾인 계단을 오르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 사생활을 최대한 보호해주는 침실이 나오고, 전면 통창 앞으로 기다란 옥상 덱이 펼쳐진다. “친구들이 집에 오면 처음에는 무척 당황합니다. 방도 없고, 2층은 온통 덱뿐이니까요. 또 집이 왜 이렇게 비틀어져 있는지 묻곤 하죠.” 하지만 부부는 이 덱을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꼽는다. 비 온 뒤에 산하를 포근히 감싸는 산안개의 모습이나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숲 속의 나무들, 둔철산 위로 솟는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 해 질 무렵이면 웅석봉에 걸쳐 있는 노을의 아름다움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집, 자연과 함께 호흡하다 “지금은 곳곳에 펜션이 생겼지만 20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말 그대로 오지였습니다. 계곡 옆에 논밭만 있었지요.” 그저 나무가 좋아 계곡, 숲 옆에 터를 정하고 자그마한 농가 주택을 지었다는 김동귀 씨. 그가 손수 지은 주택은 논이던 지형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초마저 부실했던 터라 늘 습기가 찼고 공기 흐름도 원활하지 않았다. 김승현 씨는 겨울에 춥고 여름에 습한 기존 집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면에서 1m 이상 높이고 바닥 단열을 단단히 했다. 2층 침실은 동쪽으로 창을 크게 내 종일 해가 들어오는 구조지만 1층은 일반 주거 공간이라는 용도나 집의 규모에 비해 창이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 단열을 중요시한 결과로, 대신 작은 창들을 내 맞바람이 통할 수 있게 배치해 자연 환기가 원활하도록 했다. 지형의 흐름을 면밀히 계산해 창 너머의 자연 풍광을 액자로 담아내려 한 것이 포인트. “주방에서 일을 하다 문득 앞을 바라보면 창문 너머로 건너편 둔철산의 능선이 바라다보여요. 사시사철 자연을 담은 가장 훌륭한 작품이지요.” 어머니 최경자 씨는 창이 그림이 되고, 가구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침실에 그 흔한 침대 하나 없고 서재나 거실에도 낮은 좌탁뿐이다. 기본적으로 좌식을 염두에 둔 공간은 김동귀 씨가 만든 조선 목가구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좋은 가구는 공간에 녹아들 때 그 가치가 한층 돋보인다고 말하는 김승현 씨. 내부 자재부터 조명등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만든 목가구가 생활 공간에서 돋보일 수 있도록 전체 공간을 갤러리처럼 연출했다. 특히 현관에 들어서면 긴 복도가 펼쳐지는데 외부 계단으로 만든 입체적인 벽면 사이의 틈을 이용해 소품을 전시할 수 있게 했다. 복도가 이어지는 거실에 창을 최소화하고 각 벽면을 갤러리 월로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왼쪽) 집 중간 면에 홈이 파인 것처럼 연출한 미니 덱이 있다. 벤치를 두면 휴식 공간이, 장독대를 두면 다용도 베란다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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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김동귀 씨는 교사 생활을 하다 취미 삼아 목공을 시작, 공모전에서 수상한 후 목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다. 2 곧장 옥상으로 연결되는 외부 계단. 내부에서 보면 이 계단 아래 하부 공간이 바로 길게 뻗어 있는 수납장이다. 계단 구조가 주는 역동적인 묘미와 함께 틈새 수납공간까지 얻은 것.


하얀 벽면을 타고 흐르는 은은한 빛과 목가구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가구를 최소한으로 배치하려면 그만큼 여유로운 수납공간이 필요한 법인데, 복도의 입체적인 벽면 아래에 길게 짜 넣은 수납장이 이를 해결한다. 어머니 최경자 씨가 특히 만족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수납공간이다.“대부분의 시간을 오롯이 부부가 보내는 공간인지라 굳이 방이 여러 개일 필요는 없었지요. 현실에서 불필요한 공간 구분으로 인한 낭비를 없애고 가급적 열린 공간으로 설계했습니다. 서재와 벽 하나를 파티션으로 나눠 게스트 룸, 거실, 복도 등의 공간으로 그 쓰임에 따라 때로는 갤러리로, 때로는 가족 공간으로 자유롭게 변용이 가능합니다.” 부모님의 라이프스타일을 최대한 반영해 공간을 설계한 김승현 씨는 지방이라는 지역 특성 때문에 시공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초기 계획은 외관을 노출 콘크리트로 시공해 최대한 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런 계획은 지방 공사의 기술적 한계, 원거리 공사 감리 등의 물리적 어려움 때문에 일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시공은 부산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아버지 김동귀 씨의 제자가 맡았다. 문부터 조명등, 손잡이 등 소소한 디자인 하나까지 건축가가 설계한 원안을 최대한 반영, 노부부를 위한 친환경 마감재로 일본에서 유행하는 화산재 타일을 골라 천장과 주방 벽면에 시공했다.

지난 4개월간 생활하며 겨울을 보낸 부부는 단열과 마감재에 공을 들인 만큼 집이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말한다. 여름에도 마주 보는 창문만 열면 시원할 테니 습기와 더위 따위는 아무 걱정 없을 듯하다고. 거실 한편의 커다란 창문을 여니 콸콸콸, 계곡물 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린다. 도랑을 따라 내려가면 물이 잠시 고이는 연못 속에 팔뚝만 한 잉어가 유유히 헤엄을 친다. 오래 살면 계곡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잉어와 철갑상어가 함께 노니는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익숙해진단다. “가끔 목공예를 시작하게 된 동기에 관해 질문을 받을 때면 그저 나무가 좋아서라고 대답합니다. 자연의 품은 너그럽기 그지없지요. 제 갈 길에만 바쁜 사람들 곁에 묵묵히 지키고 서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고 풍요로운 휴식을 전달하니까요.” 지난 5월 초, 세미나 일정차 잠시 귀국한 김승현 씨는 한달음에 산청으로 향했다. 부모를 향한 공경심, 아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 끈끈한 가족애가 가장 중요한 밑재료가 된 집에 온 가족이 함께 서니 비로소 그림 같은 풍경이 완성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의 삶만큼 중요한 가족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일이다.

(왼쪽) 넓적한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대 풍경.

건축가 김승현 씨는 1976년 진주에서 태어나 2003년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건축사 사무소 힘마에서 실무를 익히고 보스턴의 오피스 DA Office DA와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명승종합건축사 사무소에 재직 중이며, 현재 미국 SCI-Arc(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에서 M. Arch II 과정을 밟고 있다.
이지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