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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을 찾아서]통의동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 한옥에서 배운 더불어 사는 삶
인연이 깊은 사진가 이한구 씨 가족과 <행복> 미술팀에서 8년간 동고동락한 그래픽 디자이너 박광자 씨가 통의동 한옥에서 한집살이를 시작했다. ‘더불어 사는 맛’에 푹 빠져 있는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과 그래픽 아트 스튜디오 여름의 식구들을 만났다.

1 ㄷ자 한옥 두 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류가헌(02-720-2010)은 갤러리와 카페, 사진 작업실과 디자인 사무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옥 두 채가 맞닿는 쪽 벽을 모두 통유리창으로 마감해 공간에 재미를 더했다. 2 갤러리 류가헌의 외관. 대문은 좁은 골목 안으로 자리한다.


아직 북촌과 한옥이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시절, 삼청동 거리와 가회동 골목길은 지금과 사뭇 다른 낭만과 정취가 있었다. 오랜 세월 개발의 혜택에서 소외된 탓에 6백 년 고도가 근현대화를 거치면서 남긴 흔적을 지표 아래 퇴적층처럼 고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반대 급부가 따르게 마련으로, 어느덧 한옥이 강남 아파트 못지않은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오늘, 전통의 보존과 개발이라는 쌍두마차의 논리 아래 날로 화려해져만 가는 북촌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 카페와 각종 숍이 즐비한 삼청동, 매끈하고 세련된 현대 건축물과 고급스러운 신축 한옥으로 위엄을 더해가는 가회동…. 날로 위풍당당해지는 북촌에서 그 옛날의 낭만이 사라져가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에 비해 오래된 동네의 그 느릿한 정서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경복궁 서촌 일대. 가회동의 고급 신축 한옥처럼 한 번에 세월의 때를 벗겨내려 하지도, 삼청동 거리처럼 상업적으로 물들지도 않으며 ‘조심스럽게’ 새로운 문화 지대로 거듭나는 모양새가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1 ㄱ자 모양의 한옥에 마련한 갤러리 전경. 한옥 고유의 깊은 공간감이 멋스럽다. 2 집을 개조하면서 창고에서 찾아내 수리한 빈티지 책상으로, 사진가 이한구 씨가 사무실에서 사용하고 있다.


통의동 좁다란 골목길에 새롭게 문을 연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 모든 것이 더디게 움직이는 옛 고을 서촌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기도 힘겨워 보이는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햇살 좋은 중정이 손님을 반긴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갤러리와 카페 공간이 마주하는데, 양쪽 벽면을 모두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 너머로 또 한 채의 ㄷ자 한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또 하나의 한옥도 카페 공간과 접한 대청마루의 양쪽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해 한옥 두 채가 서로를 꿰뚫어보고 있는 형상이다. 잔디 정원을 품은 오른쪽 한옥이 갤러리와 카페로 열린 공간이라면, 중정에 빨간색 벽돌을 깔아 마당을 꾸민 왼쪽 한옥은 디자인 사무실과 사진 작업실로 이루어진 공간. 이 매력적인 이란성 쌍둥이 한옥의 주인장은 <행복>의 오랜 친구들이다. 8년 동안 <행복> 미술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그래픽 디자이너 박광자 씨, <행복> 지면을 통해 꾸준히 서정적인 사진을 선보여온 사진가 이한구 씨가 바로 그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의 안내를 받아 1930년대에 지었다는 한옥을 둘러본다. 사진가와 디자이너. 안목과 감각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들이라지만 공간 디자인뿐 아니라 공사의 대부분을 직접 감행했다 하니 그 또한 <행복>의 친구들답다. 1950~60년대에 덧단 것이 아닐까 싶은 밋밋하기 그지없는 합판 소재 미닫이문, 1980년대에 지은 아파트에만 해도 흔하디흔했던 목창, 1990년대 이후 대중화되기 시작한 온돌 마루, 최근 공사를 통해 더해진 통유리창과 아코디언식 슬라이딩 도어에 이르기까지, 집 안 곳곳에서 70여 년의 세월을 지나오며 때로는 덜어내고 때로는 더해진 크고 작은 개조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사를 계획하면서 처음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원금을 받아 엄격한 기준에 맞춘 전통 한옥으로 복원할 것이냐, 지원금을 포기하고 필요에 맞는 공간으로 개조할 것이냐를 두고요. 전통 한옥으로 복원하면 서울시에서 꽤 많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거든요. 지원금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제아무리 큰돈을 들여 번듯한 한옥을 마련한들, 허점투성이일지라도 오랜 세월을 살아낸 한옥이 지닌 정서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지원금을 포기하고 알뜰살뜰하게 마련한 공간을 바라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류가헌 대표 박미경 씨가 말한다. 사진가 이한구 씨의 갤러리로 알고 찾아왔건만 낯선 이가 대표라며 인사를 건네 의아한 표정을 짓자니, 그는 이한구 씨의 아내란다. 사진가는 응당 사진을 찍어야 하니 박미경 씨가 갤러리 살림을 맡아 운영하는 것이라고.



1 갤러리에 마련한 카페 공간에는 국내외 사진가들의 작품집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2, 4 갤러리 사무실 풍경. 책상 맞은편으로 차경을 둔 찻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벽에 걸린 작품은 이한구 씨의 사진이다.
3 박미경 씨와 디자이너 박광자 씨가 갤러리 가족과 함께 툇마루에 모여 앉았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찍히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이한구 씨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류가헌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년 전으로 지금 자리의 맞은편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한구 씨가 작업실로 쓸 요량으로 한옥을 마련했는데 30여 평 공간이 너무 넓게 느껴지더란다. 현대 건축물 30평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감이었다. “이 넓은 공간을 혼자 사용하는 것이 사치이자 낭비다 싶어 작업실을 문간방으로 옮기고 대청마루와 안방 등을 전시 공간으로 꾸몄어요. 정식으로 허가받은 것도 아니고 상업적인 목적을 둔 것도 아닌, 그저 주변의 실력 있는 사진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아직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한 젊은 작가들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을 벌여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평소 가족처럼 지내는 이한구 씨 부부와 박광자 씨가 의기투합해 일을 벌인 것이 지금의 류가헌이다. 모두 각자의 생업이 있는지라 십시일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 효율적으로 갤러리를 운영하기 위해 갤러리, 사진 작업실, 디자인 사무실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고 보면 갤러리 류가헌을 운영하는 방식은 일종의 재능 도네이션으로 보인다. 물론 전시를 여는 경우 최소 운영 비용으로 대관료 50만 원을 책정해놓기는 했으나, 리플릿이나 포스터 제작 등 전시 홍보와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일체의 비용 없이 이루어진다. 베테랑 편집 기자(류가헌 대표 박미경 씨는 각종 매체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와 베테랑 디자이너 그리고 사진가의 아이디어와 시간, 땀방울을 무료로 지원하는 셈이니, 이것이 재능 도네이션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 담벼락에 전시한 작품은 사진가 한금선 씨 작품. 툇마루에 앉아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2 카페 한 코너를 장식하는 빈티지 릴 플레이어가 멋스럽다.


작품을 만나기 위해 류가헌을 찾는 이들이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쉬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한 카페는 또 다른 전시장이다. 카페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은 다름 아닌 사진집들이다. 지금 전시 중인 작가의 사진집, 전시 예정인 작가가 이전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집과 리플릿 등을 준비해놓아 전시장에다 못다 본 다른 작품들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카페 한구석 메뉴판의 ‘모든 음료 3천원’이라는 문구를 보고 구색만 갖춘 그렇고 그런 음료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갤러리 대표가 직접 내려주는 신선한 핸드드립 커피, 지리산 자락에서 재배한 오미자로 담근 오미자 차, 박광자 씨가 부암동 빌라 마당에서 수확한 매실로 직접 담갔다는 매실차 등의 맛이 가히 일품이다. 이한구 씨가 전국 팔도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며 인연을 맺은 이들이 청정 지역에서 농사지어 손수 만든 유기농 음료를 제공하는데, 일종의 생활협동조합처럼 정직하게 농사지은 먹을거리를 갤러리를 찾는 손님들과 직거래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역할도 하고 싶다고.
1년 전 이한구 씨가 마련한 작업실이 한옥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류가헌은 없었을 것이라 한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바로 낡고 오래된 한옥이었다. 안과 밖이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열린 공간에서 독립된 공간으로 변모하는 한옥에서 더불어 살며 나누는 삶의 행복을 배웠다고. 살림집도 같은 빌라 앞뒤 동일 정도로 한가족이나 다름없다는 이한구 씨 부부와 박광자 씨의 오래 묵은 장맛 같은 우정과, 아직은 가난하지만 재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작가들을 위해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류가헌의 마음이 오래된 한옥의 깊은 맛과 여유를 닮았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