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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경주 교동 최씨 고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조선 팔도 최고의 부잣집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지만 경주 최 부잣집은 12대에 걸쳐 3백 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다. 동학혁명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변란을 겪으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가문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와 함께 대를 물린,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주변 백 리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와 같은 금욕적 원칙을 지키고 나눔을 실천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명가>의 주인공이 바로 경주 최 부잣집이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으로, 이곳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키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했다. 최 부잣집 터는 원래 신라 요석 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진다.<행복>에서는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집이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기운을 풀어보는 백가기행을 연재합니다.

돈과 도 道. 이거 결합하기 어려운 주제다. 사상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두 가지 명제를 결합시키는 논리를 개발해내는 일일 것이다. 결합시키는 사상(논리)을 개발해내지 못하면 양자가 따로 논다. 따로 놀면 생기는 문제가 갈등과 싸움 그리고 죄책감이다. 청교도(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고민한 문제도 ‘돈’과 ‘도’였다. 막스 베버가 제시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사상적 해결이었다. 그렇다면 유교 문화권은 어떤가. 한국은 사농공상이었다. 상 商을 천시했다는 점이 한국 유교의 특징이다. 상인을 천시하다 보니 돈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기 어려웠다. 철학이 없으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속으로는 돈이 좋으면서 겉으로는 돈을 천시하는 척한다. 대놓고 돈을 좋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돈을 무시하지도 못한다. 한국 문화는 돈에 대한 철학, 즉 사회 구성원이 모두 받아들일 만한 보편적인 철학을 미처 정립하지 못한 채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와버렸다. 그러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 졸부 猝富다. 돈은 있는데, 도대체가 철학이 없는 사람이다. 졸부는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한다. 돈 있는 사람이 존경받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이 온다. 어떻게 하면 돈과 도를 결합시킬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전범을 보인 집안이 바로 경주 최 부잣집이다. 12대 만석꾼이었다고 전해진다. 대략 3백 년 동안 부를 유지했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 포드도 3대째 와서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 최고의 부자도 3대를 넘기기가 힘든 것이다. 그런데 3백 년이라니, 3백 년을 지탱한 내공은 무엇인가? 최 부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 논 사지 마라.’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과객 대접을 후하게 하라.’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마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1 최씨 고택은1970년에 일어났던 화재로 사랑채와 별채를 잃었다. 사랑채는 3년 전 복원되었지만 별채는 아직도 주춧돌만 남아있다. 사진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ㅁ자 구조의 안채 풍경.
2 최 부잣집은 집을 지으면서 반월성 주춧돌과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요석궁 석재를 그대로 이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이 최 부자가 3백 년 동안 실천한 돈과 도의 결합이다. 한국에서 발효시킨 유교적인 ‘돈 철학’ 즉 자본주의 철학이다. 이 ‘돈 철학’의 내공으로 최 부자는 동학혁명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변란기에도 몸과 재산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회 변혁기에 부자는 목숨을 잃는 법이다. 이 시기에 재산과 집안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검증을 거쳤다는 증거다.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같은 금욕적 원칙을 최 부자는 어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최 부자 선대에서 한 스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이 스님의 재물관이 독특했다. ‘재물은 똥과 같아 집에다가 가만히 쌓아두면 주변에 냄새가 진동하고, 밭에다 거름으로 주면 곡식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쌓아두지 말고 주변에 뿌려야 한다는 말이다. 최 부자의 철학은 불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경주는 불교 유적이 많은 도시다. 신라가 불교 국가였고 경주는 이 신라 천년 왕국의 불교 유적이 집중된 수도였다. 한국의 자본주의 철학은 다름 아닌 천년 왕국의 수도 경주에서 태동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불교의 주요한 사상이 인과 因果 사상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 善因善果 惡因惡果가 그 골자다. 적선하면 좋은 인을 심는 것이고, 그 결과로 좋은 과보를 받는다고 여긴다. 이는 유교 경전 <주역>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이 불교의 인과 사상과 맞닿는다. 필자가 우리나라 5백 년의 명문가 수십 군데를 돌아본 결과 공통점이 바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다. 이는 유교적 <주역>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인과 사상과 같은 내용이다. 유불의 공통 사상이 적선 積善과 적덕 積德인 것이다. 최 부자의 철학도 따지고 들어가면 <주역>과 불교에 뿌리를 둔 셈이다.

3 사랑채와 별당 사이에 배치된 사당은 조선조 양반집의 원형을 보여준다.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너무나 눈부신 지침이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 수가 없는 게 또한 세상살이다. ‘흉년에 논 사지 마라’도 부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다.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한다. 1910년대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영남 일대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즐비했다. 호남은 평야가 넓어서 좀 나은 형편이었지만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영남은 먹을거리가 호남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호남에 비해 세 배나 더 배가 고팠다고 보면 맞다. 그만큼 굶주림이 심하던 지역이다. 이때 최 부잣집 사랑채 마루가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떼거리로 최 부잣집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몰려들어 서로 배급을 받으려고 아우성을 치다 보니 소나무로 튼튼하게 지은 사랑채의 마루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러한 흉년에는 논 값이 헐값이다. 덤핑으로 내다 팔았다. 심한 경우에는 흰죽 한 솥에 논 한 마지기를 내다 팔았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흰죽 논’이라고 불렀다. 최 부잣집에서는 ‘흰죽 논’을 사지 마라는 것이 선대로부터 내려온 가훈이다시피 했다. 경주에 있는 최 부잣집 터는 유서 깊은 곳이다. 원래 신라의 요석 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원효가 요석 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곳이고, 바로 옆에는 월정교라는 화려한 다리가 놓였던 흔적이 있다. 경주 남산에서 신라의 반월성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해당하는 다리다. 최 부자가 집을 짓기 전에는 이 터 옆에 경주향교가 있었다. 일반 주택이 자리 잡기 어려운 터였다는 이야기다. 현재 이 집은 영남대학교 재단 소유로 되어 있다. 최 부자가 영남대학 재단에 집을 비롯한 모든 토지를 기부했기 때문이다. 소유권은 그렇지만 최 부잣집 장손인 최염 씨 가족이 이 집에 거주할 수는 있다.
원래 이 집은 99칸 집이었다. 집터는 2천 평 규모에 후원이 1만 평이나 될 정도로 넓었던 집이다. 한국 상류 주택의 당당한 규모였다. 이 집에 상주하던 노비만 해도 그 숫자가 1백여 명에 달했다. 1백 명 하인이 상주할 정도라니 살림 규모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1년에 쌀 3천 석을 소비했다고 하는데, 과객 접대에 1천 석을 썼다고 한다. 오는 손님들 밥해주는 데 쌀 1천 가마라니! 하루에 평균 2가마 반을 밥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 이 집을 출입하는 과객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는 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왔다. 부잣집 사랑채는 숙식에 돈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에 쓸 만한 과객이 오면 여비도 해주고, 옷까지 해 입혀주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여행하는 방법이 이렇게 과객 접대 후하게 해주는 집을 점조직으로 연결해서 다니는 것이었다. 전국 주요 간선도로망과 인접해 있는 부잣집은 과객들에게 이미 그 정보가 노출되어 있었다. ‘어느 집에 가면 잘해준다’. 예를 들어 전라도 구례에 사는 선비가 금강산으로 구경 간다고 하면 노잣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30~50리 떨어진 곳에 어떤 집이 있다는 정보만 알면 되었다.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주인으로부터 여행 경비를 얻어 다음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 다음에 다시 노자를 얻어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신용카드가 없어도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과객 접대 시스템을 오늘날의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이는 일종의 부의 사회적 환원이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 과객들 사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집안이 또한 최 부잣집이었다. 과객 대접이 그만큼 후했기 때문이다. 최 부잣집에 있는 곳간채는 접대용 식량을 쌓아놓던 공간이다. 대략 7백~8백 석 정도가 들어가는 쌀 창고다. 이 큰 규모의 쌀 창고가 최 부잣집의 전성기를 말해주는 유물이다. 이 집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들도 예사롭지 않다. 신라 궁궐에서 쓰던 석조 유품일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에 집을 지으면서 바로 옆의 반월성 주춧돌과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요석궁 석재를 그대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다. 신라 궁궐 자재를 그대로 이어받아 지은 셈이다. 신라의 정신이 살아 있는 집인 것이다.
최 부잣집은 옛날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축소된 상태다. 현재 음식점인 ‘요석궁’을 비롯한 그 일대가 모두 원래 최 부잣집이라 보면 된다. 분가한 아들들이 살던 집들이었으니 말이다. 손님이 많이 와서 본채에서 수용하는 인원이 초과되면 그 옆집으로 분산해서 과객들을 수용했다. 그것도 모자라면 주변의 하인들이 살던 집까지 빌려 손님을 받았다. 그것이 관례였다. 주인과 하인 간에 미리 약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손님들을 받는 하인 집에 대해서는 최 부자가 그만큼 소작료를 감면해주었다고 한다.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가훈을 지켜온 최 부잣집 마당에는 큰 규모의 곳간채가 있다. 이 집을 찾는 과객을 대접하는 식량을 쌓아놓았던 곳이다. 대략 쌀 7백~8백 석이 들어가는 이 창고가 최 부잣집의 전성기를 말해주고 있다.

최 부잣집 터는 좌청룡 우백호가 약한 편이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기존의 터를 3m 정도 깎아 내렸다고 전해진다. 뒤쪽에는 바람을 막아줄 수 있도록 느티나무를 심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한 방풍 기능의 조림이었다. 최 부잣집 터는 역사적으로는 매우 의미 있는 지역이지만, 풍수적으로 볼 때 집 앞 냇물인 문천 汶川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배산보다 상대적으로 임수 臨水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물은 재물과 관련있다. 물이 터를 감고 돌아야만 돈이 모인다. 그래서 부잣집 터는 물이 관건이다. 최 부자는 이 요석궁 터에 집을 지을 때 냇물이 감아 도는 것을 재물과 연결시켜보았을 것이다. 귀 貴는 집터 앞 삼각형의 문필봉에서 나온다. 대문 앞에서 멀리 보이는 조산이 삼각형 비슷하게 생겼다. 아주 단정한 문필봉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문필봉 작용은 하게 생긴 봉우리다. 부잣집은 귀보다 부를 중시했다. 문필봉보다 감아 도는 물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역대 최 부자가 살았던 조선 후기는 영남의 남인들이 기호의 노론들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던 시기다. 만석꾼 최 부자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최 부잣집 후손들이 과거를 통해 벼슬을 하려고 해도 고위 벼슬은 하기 어려웠다. 이런 시기에 남인의 배경을 지닌 최 부자 후손들이 무리하게 벼슬을 원했을 경우에는 정치적인 탄압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 길만 가자. 귀는 포기하고 오로지 부만 얻자. ‘진사 이상 하지 마라’는 가훈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최 부자는 9대 진사를 기록한 집안이다. 진사까지는 했다. 1970년대의 유행가 가사 중 ‘최 진사 댁 셋째 따님’이라는 대목은 아마도 최 부잣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에 진입했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 10위를 하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문제는 여기에 걸맞은 ‘자본주의 정신’을 정립할 수 있는가다. 그 자본주의 정신이란 ‘공감할 수 있는 부자’일 것이다. 이걸 세워야 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막스 베버가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는 역사 속에서 3백 년 동안 부를 유지해온 최 부잣집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외국의 사례가 아니다. 나를 낳아준 우리 선조의 이야기다. 토착적 전통에서 우리 선조들이 쌓아놓은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낯설지 않다. ‘빠다’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우리 몸에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철학이자 유산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 부잣집의 교훈은 ‘유교적 자본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최 부잣집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 전통이기도 하다. 이것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킬러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최 부잣집을 둘러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