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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 가구를 말하다 화안가구 변경숙 대표, 가람 김성수 원장

화안가구 마니아 피상순 씨 댁 다실에 놓여 있는 화안가구의 다기장과 의자.

화안가구 변경숙 대표
선비가 디자인하고 목수가 만든 사랑방 가구
“옛날에 목수는 대를 물리는 직업이었지요. 근데 그게 돈을 많이 벌거나 목수 일이 좋아서가 아니었어요. 나무 때문이에요. 나무는 길게는 수십 년을 말려서 쓰는 재료예요. 산에서 나무를 베어 와 말리고 다듬고 또 말려서 가구를 만들 수 있는 재목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 목수 일은 한 세대에 끝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공을 들여 관리하고 대를 물린 목재를 다루면서 어찌 목수들이 일을 허투루 할 수 있겠느냐며 화안가구 변경숙 대표가 말한다.
화안가구는 조선 시대 사랑방 가구를 리프로덕션하는 공방이다. 전통 가구지만 디자인이 간결하고 은근해 전통 가구를 변형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화안가구의 제품은 조선 시대 가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가구의 크기와 비례, 재료, 만드는 방식,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단다. “사랑방 가구를 누가 디자인했는지 아세요? 바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었어요. 선비는 평생을 두고 학문을 닦고 시서화를 즐기며 예술적 안목을 키운 이들 아닙니까. 그들은 뛰어난 미학적 지식과 예술적 안목으로 무장된 이들이었지요.” 선비는 가구를 새로 마련해야겠다 싶으면 먼저 목수 집으로 3년 치 삯을 보냈다. 목수를 데려와 반년가량은 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선비는 목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미학과 철학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비와 목수가 함께 가구를 만들기 시작하면 변형과 수정을 반복하며 하나의 가구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변경숙 씨는 화안가구를 시작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인사동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했다. 매일같이 우리 옛것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좋아서였다. “시골 외가가 지방문화재였어요. 어려서 방학이면 외가에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어린 눈에도 그때 할아버지의 책상과 문갑이 그리 좋아 보이더라고.” 그가 최순우, 한창기, 김수근 선생 같은 분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모두 인사동 골동품점을 하면서다. “내가 골동품 가게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분들과 교류할 수 있었겠어요. 민속학이나 미학을 공부하거나 우리 옛것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어요. 사료나 자료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것의 실물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분들이 내게 돌을 벌어주지 않아도 좋았어요. 그분들을 통해서 배우고 알게 된 것이 정말 많았거든요.”


1 3층 책장. 우리 가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균형미가 돋보이고 튼튼해 보인다.
2 장식성이 강한 2층장 ‘해와 달’. 위아래로 동그란 장석 두 개가 해와 달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3 선비가 종이와 벼루 등 문방구를 수납하던 문갑으로 조형성과 비례미가 뛰어나다.


옛 물건들이 점점 귀해지고 값도 너무 오르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골동품은 이제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골동품을 다루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그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최순우 선생이 그를 재촉하셨다. “제가 망설이고 있을 때 선생께서는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 하셨어요. 네가 좋은 물건도 많이 보아왔고 안목도 있으니 꼭 해야 한다면서요. 그리고 선생께서 절대 디자인에 변형을 주지 말고 조선 시대 사랑방 가구를 그대로 재현하라 하셨지요. 사랑방 가구가 지닌 분할과 비례미는 완벽에 가깝다며.” 그는 최순우 선생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우리 가구 전시를 열면서 화안가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골동품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가구 공방에서 잔뼈가 굵은 목수들을 모아 작은 공방을 차렸다. “나무는 인이 박여야 다룰 수 있는 거예요. 나무의 성질을 모르고는 가구를 만들 수도, 디자인할 수도 없어요. 이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지. 그런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목수를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 목수들에게 항상 이야기해요. 예수 아버지도 목수였다. 목수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직업이고, 이 세상이 다 불타버리고 난리가 나도 목수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가 공방을 꾸려온 20여 년 동안 화안가구는 청와대에도 들어갔고 주미 대사관과 주중 대사관,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접대실에도 들어갔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일본에서 재일 교포의 의뢰를 받고 설계한 집에 화안가구를 들였다.
그는 전통 가구는 실제 사용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생활 속에서 자꾸 바라보고 만져보고 사용해야 그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알게 된다고. “우리 것이 좋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달라요. 사회 지도층에 있으면서 말로는 우리 것이 좋고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정작 집에 가보면 이탈리아 가구만 쓰는 이도 많아요. 그런데 우리 가구는 직접 써보지 않으면 그게 얼마나 멋지고 좋은 물건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좋은 가구를 너무 비싸지 않게 만들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화안가구 같은 공방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이름난 장인도 의미가 있지만, 솜씨 좋은 목수들이 기본에 충실한 가구를 잘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화안가구 마니아 피상순 씨
만년필과 안경이 놓여 있던 법정 스님의 선비 책상
“법정 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 때예요. 저는 학창 시절에 어찌나 용감했던지 책을 읽거나 어떤 계기로 존경하는 분이 생기면 무턱대고 찾아갔어요. 법정 스님과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그날 보았던 공부방 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윗목에 조그마한 반닫이가 있고 그 위에 도자기가 하나 있었어요. 아랫목 근처에는 선비 책상이 하나 있는데 원고지와 만년필, 안경이 척하니 올려져 있는 모습이 그리도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스님께 여쭤보니 화안가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나중에 취직을 하고 돈을 모아 첫 번째로 구입한 것이 바로 그 선비 책상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화안가구와의 인연은 피상순 씨를 화안가구 마니아이자 전통 가구 컬렉터로 만들었다. “우리 가구는 나무라서 그런지 몰라도 만지면 만질수록 정이 붙고 가깝게 느껴져요. 쓸수록 정을 느낀다고 할까요.” 10여 년간 그의 공부 책상이 되어주었던 선비 책상은 이제 남편의 차지가 되었다. 요즘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화안가구는 다실에 들여놓은 의자와 사무실에 가져다 놓은 사방탁자다. 의자는 좌판이 널찍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즐기기에 그만이고 사방탁자는 마음이 부산스러울 때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명쾌한 비례미에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듯하다.


가람가구학교 가람 김성수 원장
작가 정신과 장인 정신이 만나는 공방 가구

가람가구학교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않았다면 입학 자격을 주지 않는 독특한 학교다. “나무를 다루면서 가구를 만드는 일은 이를 평생 직업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20대는 아직 경험할 것도 보아야 할 것도 너무 많으니 묵묵하게 나무만 만지고 있기에는 이른 나이라는 가람 김성수 원장의 말이다. 실제로 가구를 배우기 위해 가람가구학교를 찾는 이들 대부분이 30~40대이고 공방 가구를 구입하는 주요 소비층 또한 30~40대라고.
1997년 시작한 가람가구학교는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한 학기에 5~10명 정도 학생을 선발하고 디자인 교육 6개월, 가구 제작 교육 6개월로 구성한다. 공방 가구 하면 가람가구학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졸업생들이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람 김성수 씨가 처음 가구 공방을 차렸던 1982년만 해도 사람들은 공방 가구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 잠시 공방 가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했으나 경제적 불황으로 사라졌던 관심이 2~3년 전부터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디자인 제품이 불특정 다수의 ‘보편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공방 가구는 특정 문화 코드의 마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공방 가구를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의 다양성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으로 보면 분명 공방 가구는 부자들이 구입해야 맞는 물건이에요. 그러나 공방 가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무리가 되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다른 부분의 소비를 조절해서라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가구를 선택하는 겁니다.” 그는 인터넷 또한 공방 가구 마니아층 형성에 기여했다고 한다. 이제 안방에 앉아서도 해외 작가의 작업과 동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문화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외국 작가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입 목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목재 산업은 1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 규격화된 목재를 생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공산품을 생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레드 오크는 느티나무, 월넛은 먹감나무, 체리는 참죽나무 등 외래 수종 중에서 우리 나무와 비슷한 컬러와 질감, 정서를 지닌 나무를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믿을 수 있는 품질의 목재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졌기에 목공 작업에 도전하는 이들도 늘어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졸업생들이 가구 공방을 오픈하면 라면을 먹더라도 2년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주고는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기간이 1년으로 줄더군요. 그 시간은 소비자가 공방을 지켜보는 시간이죠. 저 작가가 꾸준히 작업을 하는지, 저 공방이 지속 가능한 곳인지를 보는 것이죠. 소비자 입장에서도 몇 년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공방에서 가구를 구입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공방 가구에 단발적인 고객은 별로 없어요.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물건이기에 어떤 공방 스타일이 나와 맞다 싶으면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거죠.” 가구 공방은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라며 그가 말한다. 직업 정신과 작가 정신, 그리고 장인 정신으로 일구어가는 것이 가구 공방이다.
“유럽은 공방 가구의 마니아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어요. 어떤 작가가 어떤 가구를 몇 점 한정 제작하겠다는 발표를 하면, 마치 공연장 입구에 줄을 서듯 사람들이 몰려와요. 우리의 공방 가구도 유럽을 닮아가고 있고요. 작은 공방을 운영하면서 전시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 힘들기에 공방 가구는 오픈 하우스 형식을 빌려 전시를 하곤 합니다. 누군가의 집에 가구를 전시하는 거죠. 그러고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사람들에게 공개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주문을 받는 거죠.”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나 구입하는 사람이나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이라며 그가 들려준다. “가구는 가구다워야 합니다. 디자인을 논하기 이전에 쓰임새를 우선해야 하는 것이죠. 공방 가구의 전제 조건은 ‘가구’라는 거예요.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사용에 불편하면 실패한 겁니다. 또 하나, 나무를 재료로 하는 만큼 색감, 질감 등 나무 고유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도록, 나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인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고요.”


1 이경원 씨 작품으로 서랍 앞면을 한지로 마감했다.
2 유정민 씨 작품으로 오크 소재 CD장.
3 안형재 씨 작품으로 호두나무로 제작했다.
4 책장은 송근원 씨 작품.

*모두 가람가구학교 출신 작가 작품으로 서울 힐스테이트 갤러리 시즌 기획전(10월 31일까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문의 02- 3661-0488


가구 작가 이양선 씨
할머니 머릿장처럼 대를 잇는 가구

<행복>을 10년 이상 꾸준히 구독해오고 있는 열혈 독자 이양선 씨. 그는 가람가구학교를 통해 늦깎이로 데뷔한 가구 작가다. 가구 작업을 시작하기 전 20년 동안 전산 엔지니어로 일했단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결국 목디스크로 수술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계기로 그는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혼자 할 수 있고, 창의적이며, 대를 이을 수도 있는’ 일을 찾다가 만난 것이 가구다. 3년 전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요즘은 가구도 쉽게 쓰다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것이 싫더라고요. 그 옛날 할머니들이 머릿장을 물려주었듯 대를 물릴 수 있는 가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가구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공방을 꾸렸다. 주문 가구 제작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으나 틀에 박힌 주문 가구를 만들다 보니 또다시 삶이 획일화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란다. 지난해 가을, 그는 주문 가구 제작을 그만두고 작품으로 작업의 방향을 돌렸다. 가구를 통해 달라진 그의 삶은 남편에게도 전염되어, 2년 전 남편도 가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양선 씨와 달리 그는 전통 가구 공방에서 가구를 배웠다. 올겨울 부부는 제주도로 내려간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작은 숲과 나무가 있는 곳에 공방과 갤러리를 마련할 계획이란다. 제주에는 왕벗나무, 팽나무, 굴참나무 등 가구를 만들기 좋은 나무가 제법 있단다. 직접 산에서 나무하고 건조시키고 다듬는 일도 해볼 요량이다. 옛날 목수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아들에게 창고의 나무와 공방을 물려주고 싶단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다가, 자신과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설 때 그 손에 나무와 연장을 쥐여줘볼 생각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